개혁군주로 알려진 철학자 군주 정조(正祖)의 치세를 1797년 발생한 ‘강이천 사건’을 중심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독일에서 공부하시고 가르치셨던 백승종 교수의 2011년 저작으로 18세기 후반 정조 통치기의 조선에서 일어난 역모사건을 당시 정권을 공유했던 노론 벽파와의 정치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조는 무시못할 정치세력이었던 노론 벽파의 견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척사파 거두인 청음 김상헌의 후예이자 노론 벽파의 중심 족벌이던 안동김씨 가문의 종손인 천주교도 김건순이 연루된 ‘강이천 사건’을 단순 사기사건으로 축소시켜 종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모에 가담했지만 정조의 왕권으로 안동김씨에 정면 도전하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대신 정조는 강력한 신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性理學)과 고문체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인정하고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품체의 자유분방함을 모두 금지하는 문화투쟁을 전개합니다.
최상층 양반 가문 자제들의 역모였던 ‘강이천 사건’을 원칙대로 처벌하지 못한 정조는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해 김건순을 사건에서 빼는 대신 당시 노론 양반들도 즐겨했던 소품문학을 근절하는 역공을 편 것입니다.
정치적 위험을 문화적 방식으로 대응한 것으로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정조의 문체반정은 기존의 성리학 유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조치로서 ‘개혁’과는 전혀 상반된 ‘수구반동적’ 조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개혁군주’로서의 정조 이미지와 상반된 해석으로 정조는 사실 기존 조선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기존 체제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의 여러군주 중 주자 성리학에 정통한 철학자 군주로 유학경전에 관한 한 자신의 그 어떤 신하보다 박식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총명함은 기존 성리학적 정치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조의 이런 수구반동적 태도는 결국 정조 사후 조선이 19세기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두번째, 정통 성리학적 관점에서 패륜아였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왕권이 강하지 못한 상태로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상황으로 성리학적 윤리에서도 절대 우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보수 반동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철인 군주였던 정조 사후 19세기 조선이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정치기를 맞게되는 필연이 결국 개인적 역량이 뛰어나던 정조의 사후에 일어난 것은 정조가 만들어 놓은 정치 체제 자체를 국왕 개인이 감당할 만하지 못하면 신하들에게 왕이 휘둘릴 수 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게 됩니다. 정조는 신하들의 성학론에 맞서 ‘성왕론’을 주장했지만 정조의 아들 순조는 아버지만큼의 능력도 없었거니와 너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외척세력들로 정권이 넘어가게 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정감록을 비롯한 조선의 예언문화를 연구해온 저자는 18세기 서양학문의 관점에서 조선에 들어오게 된 천주교가 당시의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양반 지식층사이에서 정감록의 예언문화와 서로 교류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성리학 이외에도 노장 사상과 양명학과 불교까지 섭렵한 젊은 선비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새로운 서학의 교리 역시 별 부담없이 받아들여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경직된 근본주의적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조선 사회를 좀더 사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를 꿈꾸었고 이런 이상적 사회를 꿈꾼 대가는 바로 목숨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아무도 이들의 목숨을 보전해 줄 수 없었고 1797년 조사에서부터 의심을 하던 집권 세력들은 정조 사후 대대적 종교박해를 시작해 1801년 강이천 사건의 주모자인 강이천과 김건순 등을 죽이게 됩니다.
이 책은 저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작성한 연구노트를 기반으로 나온 책으로 아무래도 일목요연하다고 보기 어려운 단점은 있습니다.
같은 주장이 반복적으로 나온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봅니다.
하지만 논문을 쓰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상상력을 발휘해 추론을 정립해가며 사료를 검토하는 실제의 케이스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어떻게 추적해가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역사서술에 있어 사료가 중요하지만 사료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공감이 갑니다.
단지 기록을 너무 절대시하기 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 가며 가장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수사관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연구를 위해 모든 자료를 읽어야 한다는 연구 방식은 그 자체로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은 너무나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은 그 자체 학자의 주장으로서 주장의 오리지널리티가 더 중요하지 모든 증거를 다 인용으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증거가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한 것이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