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정조(正祖)의 국가통치 방식에 대해 고찰한 정치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정조 개인의 일생에 대해서는 책 제1장에서만 간략하게 서술되어 평전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총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정조 당시의 대외관계를 다루지 않고 정조이후 세도정치기를 주로 다루었지만 저자가 밝혔듯 저자의 또 다른 저작 ‘정조사후 63년’의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책의 구성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정조사후 63년’을 일독하길 권합니다.
이책은 정조 통치기 당쟁을 막기 위해 언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정조의 정책이 그의 사후 19세기 내내 김조순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 등 외척 세력에 의해 조선 말기 정치가 어떻게 피폐해졌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 시각과 내용은 이 책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책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밀도 있는 연구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몇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짚어 봅니다.
정조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군주로서 정통성리학에 자신의 식견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붕당정치를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정치가 조선 중기 이후 우암 송시열을 숭상하는 근본주의 성리학자들이 정권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했고 당시 정권을 잡았던 노론 벽파 (老論 僻派)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 당시까지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南人)세력을 고위직에 기용하는 인재등용술을 썼습니다.
남인들을 비롯해 능력있늠 서얼, 중인들을 국책 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 검서관으로 기용해 학문연구와 국책자문을 맡겼고 규장각 각신들을 정승으로 기용하는 수완을 보였습니다.
채제공 (蔡濟恭)으로 대표되는 남인 출신 고위 정치인들은 정조가 함께 기용한 노론출신 관료들과 함께 정조의 국책사업이던 사도세자의 능 이전과 추존사업, 그리고 수원의 화성건설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정통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노론 세력을 상대로 남인세력을 기용하고 또 그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정조 자신이 노론 정치가들 못지 않은 정통 성리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보수적 노론 정치가들이 경전을 인용해 국왕의 정책에 반대를 해도 정조는 다른 경전을 인용해 이들의 논리를 반박했습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정조 자신의 개인적 역량에 따른 것으로 사실 그의 엄청난 역량을 바탕으로 한 성왕론 (聖王論)을 주장하며 임금은 도덕적 모범자로 남고 사대부들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노론의 성학론 (聖學 論)을 거부하였습니다.
조선 말 정조만큼 역량이 뛰어나지 못한 국왕이 집권하는 동안 정조대에서 이루어 넣은 제도적 성과는 허물어질 수 있는 리스크가 존재한 것이지요.
정조는 견제와 균형에 상당히 능한 노련한 보수 정치가로 남인을 기용하면서 노론이 공격한 남인의 서학수용을 학자의 관점에서 관대히 처리하여 남인을 보호했으며 노론 세력들이 전통 성리학 이외에 청으로 들어온 패관문학에 심취해 있을 때 이들의 문체가 정통 성리학의 관점에 맞지 않는 것이라며 당시 유행하던 소설 등의 양식의 글을 금지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노론을 공격합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보수적 성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론과 남인의 약점을 두루 이용해서 정조대는 확실히 능력있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당색과 상관없이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남인들의 스스로 공부하던 서학은 탄압 받고 정약용 형제들은 귀양을 가고 외척들이 세력을 잡아 조선이 망할 때까지 거의 60여년을 세도정치로 일관하고 서세동점의 시대를 잘못 읽어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더 진한 법인가 봅니다.
영정조 대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으나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을 채워주는 그런 책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평전분야는 한국 출판계가 특히 약한 분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전은 쓰기 쉽지 않은 책이지만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보수주의 러시아학자 로버트 서비스 옥스퍼드대 교수가 스탈린, 레닌, 트로츠키 세사람의 평전을 낸 것은 유명합니다.
한국사 분야에서도 이들 못지 않은 멋진 평전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