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에서 한문학(漢文學)을 연구하시는 정민교수님이 2014년 펴내신 책입니다.

하버드 옌칭도서관(Harvard -Yenching Library)에 수장되어 있는 일본의 동양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소장했던 조선과 청국 문인들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서에 대한 소개를 한 책자입니다.

정민교수는 2012년 8월부터 1년간 이 연구소에 초청학자로 머물며 이 일본인 동양학자가 수장했었던 조선과 중국의 고문서들을 살피고 후지쓰카 지카시 컬렉션으로 하버드에서 모르고 있던 고서들의 가치를 확인하는 서지(書誌) 작업을 하신 셈입니다.

본문만 712쪽 총 4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이자리에서 언급하는 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학(漢學)에 문외한인 제 능력밖의 일입니다.

다만 조선후기 역사에서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던 소수의 유생(儒生)들인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청국의 문인들과 교류하던 열린 문인들이었습니다.

특히 박제가의 경우 그의 글씨와 시문이 베이징의 문인들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유명인이었고, 그가 써준 여러 글씨, 편액들이 중국쪽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연행만 4차례 수행한 것도 매우 이례적입니다.

정권의 주류인 서인의 노론(老論)세력 유림들과는 다르게 청국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한다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청국내의 한족(漢族)문인들뿐만 아니라 만주족(滿洲族) 그리고 몽골족 문인들과도 교류하고 배울건 배우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선과 청나라간 18세기에 일어난 연행(燕行)이라는 외교행사의 이면에서 일어난 양국 지식인들의 인적교류사이고, 그들이 남긴 문집과 주고받은 시를 풀이하여 의미를 알아야하므로 문학사이기도 하고, 같이 건네받은 그림을 추적해야 하므로 한편으로 한중미술교류사이기도 합니다.

청나라는 18세기내내 건륭제(乾隆帝)치하의 성세를 이룬 시기였고, 조선은 학자군주 정조(正祖) 통치기였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이 정민교수님 책으로는 두번째인데, 가장 최근작인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김영사,2022)‘에서 받은 인상이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두번째 이 책도 읽게 된 것입니다.

해당주제에 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약간의 실마리라도 보이면 관련 기록을 모두 찿아 비교하고 대조하는 모습은 두 책을 관통하는 아카이브 이용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야가 어떻든 특히 역사와 인문학은 과거의 기록물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해야하는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 정설적 설명이 바뀔 수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책에서 읽었던 가장 인상적인 말씀은 요즘 학자들이 담론(談論, discourse)위주의 연구를 많이 하지 사실관계 확인( fact finding)과 같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연구를 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론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인데 현실을 등한시한다는 뼈아픈 말씀입니다.

지금도 그런현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식인의 역할이 서구의 담론수입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수입상( 知識輸入商)‘을 지식인으로 착각하는 지식사회에 대한 고언(苦言)이라고 봅니다.

또한가지 인상적인 건 북학(北學)과 북벌(北伐)의 대조입니다.

북벌이 단지 명분론으로서 사실상 군사력이 부실한 조선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패배이후 일종의 국책 프로파간다( propaganda)였다면, 북학은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배우자는 자세이므로 훨씬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북학파 학자들은 청국에 있는 문인 학자들을 민족과 상관없이 만났습니다. 상대가 몽골인이건 만주인이건 가리지 않았고 유럽에서 파견한 카톨릭 신부도 만났습니다.

이건 근본주의적 주자학자들인 서인 노론 출신들이 조선사회에서 반상(班常), 적서(嫡庶)차별을 당연시하고 노비를 재물취급하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변경지방 양반들마저 차별하면서 또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등한시한 체 오로지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義理) 만을 강조하는 허물뿐인 명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조선은 이런 근본주의적 주자학자들의 허망한 명분집착과 국방 경제력 강화를 하지 않은 것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집권층인 노론측에서 명분론으로 내세운 북벌론이 조선의 ‘국가보안법’이었다는 설명은 적절해보입니다.

병자호란에서 굴욕을 당하고도 바뀌지 않은 체 군사력도 변변치 않은 체 청국의 팔기군과 대항하겠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사고로는 나오기 어려운 황당 그 자체입니다. 북벌의 주장에 대한 연구서는 봐야 알겠지만 일단 제가 아는 한 이것이 정책은 아니었고, 단지 명분론이고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근래 읽은 한문학자들의 연구서들은 제 기대 이상으로 좋은 저서였다는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정민교수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 읽은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님의 아래의 저서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노비와 쇠고기 ( 푸른역사,2023)

명륜동의 성균관이 조선최고의 대학인 줄만 알았지,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이 얼마나 이 기관의 재정지원에 인색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고, 경제 전공자 입장에선 사대부와 양반들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처신이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쇠고기 도살과 판매를 독점하던 성균관 소속 노비들인 반인들을 성균관이 착취하게 되는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조선시대를 현재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도 안되겠지만, 이 책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구조가 이렇게 착취와 묵인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너무 강고하고 경직적인 신분사회가 아니었나, 그리고 지식인이라는 양반이 고담준론말고 도대체 사회의 후생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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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7-30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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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40여쪽 분량의 역사평설입니다.

책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 저자의 입장은 인조(仁祖) 가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인조가 조선의 왕 중에서 문제적 군주인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휘둘린 조선의 붕당 중 서인세역의 반정 ( 反正) 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임금으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명에 대한 제조지은(再造之恩)에만 집착한 서인 척화파 (斥和派)가 자초한 전쟁이 병자호란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을 키우지 않고 무신들과 서죽지빙 양반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망해가는 명과의 의리만을 지키겠다는 주장은 절개(節槪)가 아니고 그냥 바보짓입니다.

인조 집권 후 반정에 공을 세운 무인들보다 문인들을 1등공신으로 세워 ‘이괄(李适)의 난‘을 자초하고, 이후로도 청의 국력을 매번 무시하고 심지어 명에 원군을 보내 정묘호란( 丁卯胡亂)을 자초했으며 끝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자초하게 됩니다.

청은 처음엔 조선을 치려하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관계를
풀려했지만 화이론(華夷論)의 도그마에 빠져있던 집권 서인 양반들은 청을 무시했고 망해가는 명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리석은겁니다. 죽고 사느냐가 걸린 문제를 놔두고 알량한 명분만 찿으니 말입니다.

한 국왕의 통치시기에 두번의 대외전쟁과 한번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건 인조정권 자체가 내치와 외치에 모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문제는 인조와 서임 척화파 양반들이 호란 이후에도 변한게 없이 계속 뜬구름 잡는 헛소리나 하고, 쓸데없는 명분론에 계속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청의 수도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 昭顯世子)에게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농사를 지어 인질로 같이 잡혀온 소현세자 일행들이 먹고 살길을 도모하라고 했을 때 글만 읽은 양반 사대부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농민을 조선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해서 청태종 자신이 조선의 사대부들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청제국을 세운 홍타이지 입장에서도 도무지 실리라고는 모르고 책만 읽고 이상적인 헛소리나 해대는 조선의 양반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굴이 가장 화근거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책의 내용 자체는 이전에 병자호란이나 인조반정 그리고 조선후기 당쟁에 대한 책을 읽으셨으면 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정치사보다 병자호란의 개별 전투를 중심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건 책의 인용 문제입니다. 책의 이야기 전개에 방해를 하지 않으려는 의도였겠지만 이 책은 뒤에 붙어있는 참고문헌들이 어디에서 인용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처에 대한 언급이 제대로 본문에 나와야 합니다. 주석이나 인용이 독서에 방해가 된다면 전체 인용에 대한 내용을 책 본문 이후로 뺄 수도 있습니다. 편집상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영어권의 책들은 역사서나 논픽션의 경우 결코 인용과 주석정보를 빼놓지 않습니다. 바뀌어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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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너무 소략해서 놀랐습니다.

조선후기의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를 240여쪽에 축약해서 넣었기 때문에 많은 용어설명이 생략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context)을 파악하기가 여려워 가독성이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구의 한국학자들 책을 여럿 펴낸 너머북스에서 2009년 출판한 책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총 12권을 국역본으로 펴냈다고 합니다.

아마 전체 국역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서로 기획되어 소략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책에서 스케치하는 18-19세기 조선사회는 강고한 신분제가 자리잡고 있는 사회로 지배계층인 양반들도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사이에서 문반우위의 차별이 당연한 사회였으며, 사는 근거지가 지방인가 서울인가에 따라서도 영향력과 권력접근의 차이가 명확한 사회였습니다.

노상추는 경상도 선산(善山)출신의 무반으로 성리학의 고장인 안동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지만 지방의 양반으로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이로 주위의 인맥들 역시 경상도 남인(南人)이 대부분이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과 교류하기 어려웠던 비주류 출신입니다.

조선사회는 지배층 내에서 무반과 문반의 차별이 있을 뿐아니라 엄연히 서북(西北)지방, 즉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출신 양반도 역시 차별했습니다.

거기에 적서(嫡庶) 차별도 존재해 서자들은 아예 벼슬길이 불가능한 사회였습니다.

지배계급인 양반이 이정도이니 그 아래 평민들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노비(奴婢)들은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토지에서 농업경영를 하면서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재산인 노비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학자 중에 조선이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이도 있습니다( 미국의 제임스 팔레교수의 주장).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의 농지는 소작농보다는 노비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작위주였다고 합니다. 경제적 물질적 기반을 사실상 노예인 노비신분의 천인들이 떠앉은 겁니다.

특화된 노비 중 오직 성균관에서만 일할 수 있는 노비인 반인(泮人)들이 조선의 최고 관학인 성균관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재정지원 부족으로 서울의 반촌을 중심으로 쇠고기 판매를 해서 생활을 유지하고 성균관이 이들의 수익을 수탈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노비와 쇠고기,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2023)

이런 사례를 보면 조선의 양반들이 나랏일을 결정하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상 하위 계급의 백성들을 수탈해서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에 비해 과도한 특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사는 일을 등한시하면서 국왕에대한 충성은 무엇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의리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투표권은 성인 남성에게만 있었고, 그 사회에서 노예 역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여성과 노비 그리고 서출(庶出)들은 극심하고 공공연한 차별을 감내해야 했고, 노비는 노예로서 사람이 아니었고, 양반들에게 토지와 함께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불편해도 조선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노예인 노비들이 있었고 이들을 착취하는 것이 양반들의 부의 원천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서 인정하면 조선 후기에 왜 수많은 하위신분의 사람들이 돈으로 신분을 사 양반이 되려했는지, 왜 서북지역 양반들이 서울의 벌열(閥閱)들에 반기를 들고 민중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수가 없어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왜 수많은 노비들이 도망가고 추노(推奴)꾼들이 노비를 찿으러 다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명분만 쫓고 실질적인 경제활동을 등한시한 체 노비들과 가난한 평민들을 직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구조의 조선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조적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양반들이 성리학 논쟁을 통해 이룩한 철학적 논의들이 사실상 무력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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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의 서양사학자께서 쓰신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이책이 故 이영석 교수님의 유고(遺稿 )라니 안타깝습니다.

서양사 특히 영미권의 책은 사실 영어판을 읽어온 터라 한글로 한국학자가 쓴 책은 많이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책은 저자가 과거에 발표하신 논문과 저서 그리고 번역서를 기반으로 쓰신 역사에세이입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다른 역사서처럼 특정한 시기 특정한 주제에 대해 일관적으로 서술된 책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역사서술방법이 도입되고 있는데도 주분야이신 사회사(Social History) 분야를 집착해오셨다는 고백이 놀랍습니다 (p8). 유행에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주분야에 대해 계속 파고드는 인문학 연구는 지금처럼 학문의 실용성이 강조되고 모든 학문이 인스턴트식품처럼 변해버린 세태에 귀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두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3장 공습과 피난의 사회사
6장 19세기 유럽사를 보는 시각

위에 언급한 두 글이 저에게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3장이 나찌 독일의 영국 대공습 (The Blitz)에 관한 이야기이고 6장은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Eric Hobsbaum)과 리처드 에반스(Richard Evans)가 쓴 19세기 유럽사에 대한 서평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개전 초기, 영국은 전시 수상으로 처칠( Winston Churchill)이 수상으로 당선된 이후 당시 프랑스를 침공해 영국 침공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한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참전을 계속 종용합니다. 독일공군의 영국공습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다루어진 것으로 가장 최근 것으로는

The Splendid and the Vile,Erik Larson( William Collins,2020)

참조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글은 공습 자체보다 이 공습에 대한 경험이 당시 영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더 중점적으로 살피고, 영국인들이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총화단결하여 싸운 것이 일종의 신화(Myth)가 아닌지 점검합니다.

전후 세계질서를 만드는 데 영국의 정치가 처칠의 영향력이 커서 그의 나찌에 대한 항전에 대한 이야기가 정치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독일의 대공습 당시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 갔던 여성들과 아이들이 어떤 경험을 하고 전쟁이후 경험이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공중폭격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에서도 거의 전무한 상황인데, 폭격이 북한지역에 집중되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학자가 쓴 미공군의 공중폭격에 대한 책은 제가 아는 한 이 책이 유일합니다.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2013)

위의 연구서는 이전부터 읽으려 했지만 읽을 기회가 쉽게 오진 않습니다.

다음 6장 19세기 유럽사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책에 대한 서평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특히 얼마전 세상을 떠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19세기 삼부작 ( 한국에도 오래전에 한길사에서 번역을 해서 한국어 판본이 존재합니다)에 대한 서술방식을 비평하고 최근 출간된 리처드 에반스 교수의 19세기 유럽사인 ’힘의추구 (The Pursuit of Power)’에 대한 글을 평가했습니다.

The Pursuit of Power , Richard Evans ( Penguin,2017)

영국의 유명한 현대사가 (Modern Historian)로 알려진 리처드 에반스는 독일사가 전문인데 저자에 따르면 특히 19세기 독일사회사가 전문이라고 합니다.

19세기 100여년의 시간은 서구에서 보나 동아시아의 한국에서 보나 매우 중요한 시기로 생각합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반세기는 산업혁명이후 제국주의로 팽창을 계속하던 서구세력이 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와 마주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장기 19세기‘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경영이 극에 달한 시기이고, 후발로 자본주의 근대화를 받아들인 일본이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서 이권을 계속 차지하자 이를 모방하기 위해 정치부심하던 시기였고, 20세기 초 대만과 홋카이도 병합을 시작하고 오키나와를 복속하고 이후 조건을 침략합니다. 그리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은 뒤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만주에 괴뢰국을 세웁니다.

길게 보아 19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갈등의 세기였던 20세기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서구의 시각에서든 한국의 시각에서든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서양사가 더이상 한국사회에 귀감이 된 모델로서의 필요는 예전보다 덜해졌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정치적 사회적 조직과 제도의 원산지로서 그리고 이런 외국에서 도입된 제도가 한국에서 제대로 적용이 되는지 보려면 그 비교대상으로서의 가치는 아직도 유용한 것 같습니다.

호흡이 긴 책보다 짦은 글모음이 편하다면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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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에서 연구하시는 이병한 교수께서 2019년 출판하신 동아시아의 냉전사 연구서입니다.

냉전사(The Cold War History)라는 분야 자체가 현대사 중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를 다루는 매우 특수한 분야이다보니, 그리고 그중 사회주의/ 공산주의권에 대한 분야이므로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저자의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권에 대한 20세기의 역사는 그 이념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요한 한축으로 잊혀져야 할 이유도 정당성도 전혀 없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북한의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애초의 이들의 순수한 동기를 알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100년이 넘게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 바라보는게 처음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을 흔히 보듯 미소 두 블럭간의 대결로 보는 서구적 시각 혹은 유럽적 시각(Eurocentric perspective)이 아니라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지역의 시각으로 냉전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유럽과 다른 동아시아의 냉전의 역사를 추적해보려고 했고, 미국과 동맹국인 일본이나 한국 등 자유주의 진영에서 본 냉전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북조선, 그리고 북베트남 등 소위 공산주의 국가들이 바라본 냉전을 다뤘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컴플렉스( Red complex)로 터부시했고 그래서 분명히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기록된 역사였으나 애써 무시하고자 한 역사의 한 부분을 복원한 점에 이 책에 의의가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한 중국의 부상(浮上)은 집필당시인 2014-2018년에 그 전조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지난 2022-2023년 현재처럼 첨예해지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물론 이 책이
나온 후의 상황이라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유의해서 볼 사항입니다.

근래에 접한 정치권의 논쟁 중 상식적인 면을 물고 늘어진 한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책을 소개하시면서 한국전쟁의 성격이 ‘국제전(International War)’ 이었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여당 정치인들이 북한의 남침 사실을 무시했다느니,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다고 날선 비판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처럼 비판의 근거는 대지 못했습니다. 논쟁하는 법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서구의 냉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미소대결을 본격화한 최초의 사례라고 나오고 냉전이 열전 (the Hot War)로 번진 사례로 언급됩니다. 한국전쟁의 국제전성격은 또한 휴전협정 당사국을 보면 됩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휴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의 팽덕회, 국제연합군의 미군 대장 마크 클라크 (Mark W Clark) 이 사인했고,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국제연합군 수석대표 미군 대장 윌리엄 해리슨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국제전이 아니면 국제연합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 대장이 후정협정에 사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조선인민군 사령관의 이름은 협정서이 올라있으나 당사자라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백선엽 장군 이름은 없습니다.

이 해프닝은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조차 모르거나 아니면 왜곡해도 된다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중국쪽의 인식을 일별할 수 있는 연구서가 한권 나왔습니다. 한국전쟁, 즉 중국에서는 항미원조(抗米援朝)라고 불리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서사가 어떻게 전유되고 있는지 살핀 문화사입니다.

항미원조, 백지운 지음( 창비,2023)

또한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휴전협정 체결이후 1958년까지 진행된 북한의 재건과정이 새로운 중국의 정체성만들기와 연결된다(p85)고 인식합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후 첫 국제전이 한국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마오쩌뚱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북중관계를 혈맹이라고 부르고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과 관련된 언급은 여기서 그치고 저자의 주장을 잠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통념과 달리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는 오랜기간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나타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영향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화의 주체가 명대의 한족(漢族)에서 청대의 만주족(滿洲族)으로 바뀌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화의변태(華夷變態)라는 용어가 생겨나고,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등 중화사상 자체가 분기하고 중심이 없어지는 듯 보이고, 과거 근세시대의 종주국인 중국과 종속국인 중국 주변국간의 조공(朝貢) 관계가 국제법적인 조약관계로 바뀌었어도 오랜기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관계에서 고래의 영향인 중화주의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일견 당연하고 당연한 주장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중국과 수천년간 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계가 근대적 외교관계로 바뀌었다고 해도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유교문화에 대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자명합니다. 문명개화가 무엇이든 서양의 법률체계를 배우고 더할 수는 있어서 서양적인 법과 정치개념들이 동아시아 전통의 관념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인도네시아 등 국가들과 중국과의 관계입니다. 이번에 처음 본 내용이고 새삼 무지를 깨닫게 되는 부분입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제국과 얽힌 근대이후 뿐만 아니라 근세이전 중국과 조공관계를 이루던 복잡한 역사가 있어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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