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너무 소략해서 놀랐습니다.
조선후기의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를 240여쪽에 축약해서 넣었기 때문에 많은 용어설명이 생략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context)을 파악하기가 여려워 가독성이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구의 한국학자들 책을 여럿 펴낸 너머북스에서 2009년 출판한 책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총 12권을 국역본으로 펴냈다고 합니다.
아마 전체 국역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접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서로 기획되어 소략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책에서 스케치하는 18-19세기 조선사회는 강고한 신분제가 자리잡고 있는 사회로 지배계층인 양반들도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사이에서 문반우위의 차별이 당연한 사회였으며, 사는 근거지가 지방인가 서울인가에 따라서도 영향력과 권력접근의 차이가 명확한 사회였습니다.
노상추는 경상도 선산(善山)출신의 무반으로 성리학의 고장인 안동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지만 지방의 양반으로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이로 주위의 인맥들 역시 경상도 남인(南人)이 대부분이라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과 교류하기 어려웠던 비주류 출신입니다.
조선사회는 지배층 내에서 무반과 문반의 차별이 있을 뿐아니라 엄연히 서북(西北)지방, 즉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출신 양반도 역시 차별했습니다.
거기에 적서(嫡庶) 차별도 존재해 서자들은 아예 벼슬길이 불가능한 사회였습니다.
지배계급인 양반이 이정도이니 그 아래 평민들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노비(奴婢)들은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토지에서 농업경영를 하면서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재산인 노비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학자 중에 조선이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이도 있습니다( 미국의 제임스 팔레교수의 주장).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의 농지는 소작농보다는 노비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작위주였다고 합니다. 경제적 물질적 기반을 사실상 노예인 노비신분의 천인들이 떠앉은 겁니다.
특화된 노비 중 오직 성균관에서만 일할 수 있는 노비인 반인(泮人)들이 조선의 최고 관학인 성균관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재정지원 부족으로 서울의 반촌을 중심으로 쇠고기 판매를 해서 생활을 유지하고 성균관이 이들의 수익을 수탈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노비와 쇠고기,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2023)
이런 사례를 보면 조선의 양반들이 나랏일을 결정하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상 하위 계급의 백성들을 수탈해서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에 비해 과도한 특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사는 일을 등한시하면서 국왕에대한 충성은 무엇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의리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투표권은 성인 남성에게만 있었고, 그 사회에서 노예 역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여성과 노비 그리고 서출(庶出)들은 극심하고 공공연한 차별을 감내해야 했고, 노비는 노예로서 사람이 아니었고, 양반들에게 토지와 함께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불편해도 조선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노예인 노비들이 있었고 이들을 착취하는 것이 양반들의 부의 원천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서 인정하면 조선 후기에 왜 수많은 하위신분의 사람들이 돈으로 신분을 사 양반이 되려했는지, 왜 서북지역 양반들이 서울의 벌열(閥閱)들에 반기를 들고 민중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수가 없어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왜 수많은 노비들이 도망가고 추노(推奴)꾼들이 노비를 찿으러 다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명분만 쫓고 실질적인 경제활동을 등한시한 체 노비들과 가난한 평민들을 직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구조의 조선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조적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양반들이 성리학 논쟁을 통해 이룩한 철학적 논의들이 사실상 무력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