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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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헤어지는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타 지역에 사는 사촌 형제들을 만나면 몇 날 며칠 뒤엉켜 놀다가 울면서 헤어졌다. 엄마나 아빠의 친구 모임에 따라가서 만난 또래 아이들과는 처음에만 좀 서먹하지 나중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헤어질 때 서로의 부모님이 겨우 떼어놓아야 할 정도였다(지금은 그들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같은 반 아이들과 부둥켜안고 울면서 헤어졌던 기억이 있는데, 중학교 졸업식 때는 몇몇 친구들과만 아쉬운 감정을 나눴고,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식 때는 아쉬움보다 후련함이 더 컸다. 지금 헤어진다고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고, 이참에 정리될 관계는 정리되고 정리되지 않는 관계는 앞으로도 이어질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어른이 된 지금 이별을 매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회복력이 약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회복력도 약해져서, 어떤 이별은 날이 갈수록 아프고 쑤시고, 또 어떤 이별은 영영 낫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화자인 '나'도 그런 이별을 맞은 상태다. '나'는 어느 날 아내 유디트로부터 이별을 고하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갑작스러운 이별 선고에 '나'는 우선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가, 점점 슬픔을 동반한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는 수치도 잊고 엉엉 운다. 잘 놀던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아이처럼. 다정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한동안 그렇게 울던 '나'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찾아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나'는 아내가 거쳐간 도시와 호텔을 전전하지만 번번이 간발의 차이로 아내를 놓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예전 여자친구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자동차 여행을 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동생을 만나러 가기도 한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나'의 머릿속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끓었다가 가라앉는다. 처음에는 자신을 헤어진 아내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처지로 만든 아내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자신을 낡은 호텔에서 자위나 하는 신세로 만든 아내를 때리고 싶고 죽여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점차 '나'는 아내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짐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아내가 곁에 없는 지금은 주로 혼잣말을 하지만, 아내가 곁에 있을 때는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모두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아내가 잠자코 자신의 말을 들을 때는 만족했지만, 아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증오심을 품었다. 그 시절 '나'는 아내를 아무런 생각도 해석도 해서는 안 되는 존재, 남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의문 한 점, 불평 한 점 없이 얌전히 따라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나'는 비로소 아내가 '나'에게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떠난 이유를, '나'의 추적을 경멸하는 이유를, 총으로 위협하면서까지 경계하는 이유를 납득한다. 이런 '나'를 그동안 참아준 아내가 더없이 사려 깊은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유디트에게서 변화가 일어나는 기미가 가끔 눈에 띄던 초창기만 해도 나는 비교적 쉽게 해석들을 내뱉곤 했어. 심지어 그런 해석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고. 유디트 또한 그것을 이해했지. 다만 그녀가 해석을 잘못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해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지." (131쪽)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유디트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로 여겨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사려 깊게 변해갔지만 정작 나는 그 사려 깊음을 읽어내지 못했던 거야." (136쪽)


마침내 아내와 재회한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고령의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나러 간다. 유디트는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포드 감독의 말버릇을 이상하게 여기며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포드 감독이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인칭은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표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196쪽) 결국 이 말은 온전한 단독자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닐까. 타자 없이는 나도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만큼이나 타자를 존중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소설의 초반부에 '나'는 뉴욕 인근의 한 호텔 객실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다가 "반창고를 보는 것과 혼잣말을 생각하는 것"(14쪽), 이 두 행위가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반창고를 본다고 상처가 더 빨리 낫지는 않는 것처럼, 혼잣말을 한다고 현실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보는 눈을 들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본다면, 혼잣말을 하는 입을 멈추고 거리로 나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본다면, 그때는 어떤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새로운 나와 만나기 위해선 과거의 어리숙했던 나와 이별할 필요가 있을 터.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에는 영영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이별은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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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지혜의 시대
변영주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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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이 하도 많아서 오랜만에 신나게 밑줄 그으며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영화감독 변영주가 2018년 초에 한 강연의 일부를 엮은 것이다. 저자는 이 강연에서 '영화로 더 나은 사회를 꿈꾸다'라는 주제로 영화에 대한 생각과 창작에 임하는 자세 등을 공유했다.


저자는 좋은 영화가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반대로 좋은 사회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은 믿는다. 영화감독으로서도 좋은 영화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계에 남아 있는 불공정한 관행이나 불합리한 악습 등은 고치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영화뿐만 아니라 어떤 업계든 조직을 결성하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일개' 무엇이라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자신과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노조를 만들거나 단체로 행동하라고 조언한다. 잘못이 있다면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서 바로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습이 계속 남고 폐단이 더욱 커진다. 그것을 나서서 바로잡는 것이 바람직한 공동체 구성원의 자세다.


저자는 영화감독이지만 영화만 보지는 않는다. 어부가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기다리듯, 손에 잡히는 소설, 만화, 드라마 등등을 닥치는 대로 읽고 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이야기를 듣는 기회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영감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창작자는 게으른 것이다. 저자는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다. 임권택 감독이 국악을 좋아하냐고 묻기에 안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변 감독 게으르네"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한 저자는 다음날부터 몇 달 동안 국악만 들었다. 그랬더니 자신이 국악을 왜 싫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공포영화가 싫다면 한 3일 동안 공포영화만 보고, 헤비메탈이 싫다면 일주일 정도 헤비메탈만 들어보라고 충고한다. 그냥 싫은 건 취향이 아니다. 그중에 무엇은 싫고 무엇은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취향이다.


'영화계에서 여성이라 차별받는 부분'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저자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저자는 "한국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것만큼, 회사의 노동자로 사는 것만큼, 백수로 사는 것만큼, 학생으로 사는 것만큼 힘들다. 더 힘든 건 없어요. 똑같이 힘든 거지요."라고 답했다. 여기에 저자는 이런 조언을 덧붙인다. 힘들다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힘든지 구분하라는 것이다. 내가 무능력해서 힘든지, 잘 몰라서 힘든지, 여성이라서 힘든지, 영화감독이 되려고 해서 힘든지, 이런 걸 구분할 수 있게 되면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보인다. 연대의 대상이 보인다. 이 밖에도 좋은 문장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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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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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를 처음 배울 때, 스페인어를 배우면 스페인뿐만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와 라틴아메리카, 미국의 라티노 공동체에서도 말이 통할 거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스페인어가 중국어, 영어와 함께 전 세계에서 사용자 수가 가장 많은 언어 중 하나인 건 알았지만, 그렇게 넓은 지역과 많은 인구를 포괄하는 언어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어는 세르반테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의 모국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알면 문학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어로 쓰인 스페인어권 문학만의 특징과 매력은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서가명강 시리즈의 신간이자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김현균 교수가 쓴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스페인어권 문학 중에서도 시의 특징과 매력에 주목한다.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시인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루벤 다리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카노르 파라 등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1960년대 쿠바혁명 이후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 문학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작가들을 가리켜 '붐 작가'라고 부른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물론 이전부터 자생적으로 존재했고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그중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 루벤 다리오다. 니카라과 출신의 시인인 루벤 다리오는 스페인어권 문학의 황태자이자 근대시의 선구자, 스페인어의 혁명가로 불린다. 다리오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전복하는 혁신적인 시 운동인 '모데르니스모'를 주창했다. 이 운동의 결과 다리오를 따르는 수많은 '다리오스'들이 탄생했고, 다리오 사후에도 수많은 시인들이 다리오의 정신을 따르는 시를 창작했다.


파블로 네루다는 한국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몇 안 되는 라틴아메리카 시인 중 한 명이다. 네루다의 이름이 한국에도 알려진 건 영화 <일 포스티노>의 공이 크다. 칠레 출신인 네루다는 시인이기 이전에 정치가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재에 저항하고 빈민가의 현실을 그린 시를 썼다. 그 결과 수많은 칠레 국민들이 그를 흠모하고 칭송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넉넉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네루다의 시는 지금까지도 칠레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읽힌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명예를 누리니 시인으로서는 최고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세사르 바예호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오늘처럼 살기 싫었던 날은 없다."라는 문장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문장을 쓴 사람이 세사르 바예호다. 페루 출신인 바예호는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이주하는 삶을 살았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산 것이 바예호의 시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예호의 시를 보면 고통과 슬픔, 외로움의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니카노르 파라 역시 이름은 낯설지만, 시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시인이라면 자신만의 사전을 지녀야 한다."라는 문장을 접해본 적 있을 것이다. 시에 대한 모든 통념을 부정한 파라는 자신만의 언어유희를 통해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건 알았지만, 시만 해도 이렇게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있고 다양한 시도와 계승이 있었는지 몰랐다. 라틴아메리카의 시가 한국의 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황지우, 박남철 같은 이름난 한국 시인들의 시에서 라틴 아메리카 시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라틴아메리카 시를 아는 삶과 모르는 삶은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다를까. 직접 그 차이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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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교도관이야? - 편견을 교정하는 어느 직장인 이야기
장선숙 지음 / 예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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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공무원이 되려면 다른 공무원 직렬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정공무원은 경찰이나 소방공무원 등에 비해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다. 경찰이나 소방공무원은 일반 시민들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달려와 해결해준다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교정공무원은 일반 시민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에서 일하고 직접 만나 도움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장선숙 교도관 역시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고 초등학교 은사를 찾아갔을 때 취업을 축하한다는 말 대신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왜 하필 교도관이야?" 교육공무원인 은사님의 머릿속에도 교정공무원 하면 어둡고 무서운 곳에서 험한 일을 한다는 인상이 있었던 탓일까. 이 일을 계기로 교도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회 전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저자는, 그 후 스스로 더 나은 교도관이 되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고 교도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벌였다. 그 결과 2015년에는 교정대상을 수상했고, KTV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이다>에 출연해 교정공무원을 알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책에는 저자가 올해로 30년째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겪은 희로애락과 교도관이 하는 일, 교도관이 갖춰야 할 덕목, 교도관에게 필요한 자세 등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가 처음 교도관이 되었을 때 한 일은 전체 수용자 번호와 이름과 수용거실을 외우는 것이었다. 특히 저자는 수용자들의 이름을 잘 외우려고 노력했다. 번호로 불러도 되지만, 부름을 받는 사람은 번호로 불릴 때와 이름으로 불릴 때 전혀 다른 기분을 느낀다. 저자는 가능한 한 수용자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도록 철저히 암기해 수용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이런 노력 하나하나가 수용자의 교정으로 이어지고, 수용자가 복역을 마치고 사회에 나갔을 때 예전과 다른 삶을 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교도관이 아니라 교사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교대나 사범대에 가지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봐서 교도관이 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교사가 하는 일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한정하지 않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로 바꾸면 교도관인 자신도 교사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길로 법무연수원 내부강사과정에 지원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사 학위까지 받은 지금은 수용자와 교정공무원 모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니 일본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소설 <속죄의 소나타>가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은 십 대 시절 한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죄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인생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도관을 만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되고 열심히 공부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한다. 이 책에도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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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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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계절이 오면 전 세계의 독서가들은 어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을지 서로 예측하며 즐거워한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올가 토카르추크와 페터 한트케에게 돌아갔는데, 향후 몇 년 안에 이 작가의 이름이 불릴지도 모른다. 바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전 세계가 극찬한 현대 중국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옌롄커다. 


옌롄커는 1958년 중국 허난성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 때부터 28년을 군인으로 복무했다. 군인이었던 옌롄커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옌롄커의 이력에는 "1979년 군대 내 문학창작반에서 활동하던 중 <전투보>에 단편 <천마 이야기>를 실으며 데뷔했다."라고 나오지만, 이 소설의 서문을 보면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29년 전 극심한 허리 통증과 목 디스크를 앓던 옌롄커는 중국 대륙을 돌며 영험한 의술과 명약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중국 시안에서 멀리 떨어진 옥수수 들판에 서게 되었다. 그 순간 그에게 이런 영감이 떠올랐다. "한 편의 소설이 한 사람과 옥수수 줄기 하나만을 묘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발상이 이 소설 <연월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만 보고 그릴 수 있는 것만 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소설 <연월일>에는 옌롄커가 그동안 발표한 70여 편의 중단편 중에서 저자가 직접 고른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연월일>을 비롯해 <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등이다. <연월일>은 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친 농촌 마을에서 홀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을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과 가뭄을 피해 다른 마을로 떠났지만, 노인에게는 그럴 힘도 여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을에 혼자 남은 노인은 마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식량을 훔쳐 먹고, 쥐가 이동하는 경로를 쫓아 곡식을 찾아서 먹고,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쥐를 잡아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연 이 노인은 지독하게 긴 가뭄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노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면서도 은근한 감동이 느껴졌다.


이어지는 <골수>는 지능이 낮은 네 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우는 요우쓰댁의 이야기를 그린다. 요우쓰댁의 남편은 태어나는 아이마다 머리가 성치 않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혼자 남은 요우쓰댁은 남편을 원망하며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네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내겠다고 다짐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어떻게 남편감을 구해 시집을 보냈는데, 문제는 셋째 딸과 막내인 아들이다. 셋째 딸은 지능이 낮아도 남들 하는 건 다해보고 싶은지 하루빨리 남편감을 구해 시집을 보내달라고 요우쓰댁을 졸라댄다. 막내아들은 그런 요우쓰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위 누나의 젖가슴을 만져대 요우쓰댁의 속을 뒤집는다.


이 밖에도 중국 농촌의 현실을 신랄하게 묘사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옌롄커 이전에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렸던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인생> 등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옌롄커의 작품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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