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이그 주연 20부작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라기에 큰맘 먹고 구입한 책인데 드라마 방영 소식은 들리지 않고 책만 남았다. 처음엔 핍이 주인공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핍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서 이게 뭔가 싶었다. 나중에 그들 모두가 핍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나서야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과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이해되었다.
대학 졸업 후 간신히 취업한 직장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핍은 오늘도 상사의 눈을 피해 엄마와 통화하느라 정신없다. 핍은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자신을 키워준 건 감사하게 여기지만, 엄마가 예나 지금이나 경제 관념이 없고 정신이 불안정한 데다가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게 부담스럽다. 핍은 자기 또래 여성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이 남자 저 남자와 연애도 해보고 싶고 젊음을 맘껏 누리고 싶지만, 현실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데려갈 집조차 없다.
핍은 현재 여러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일종의 셰어 하우스다), 어느 날 동거인 중 한 사람인 아나그레트가 핍을 불러세운다. 아나그레트는 유명한 인터넷 무법자인 안드레아스 볼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볼프의 '선라이트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핍은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현재 직장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는 말에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설의 중심 인물이 핍인 줄 알았는데 점점 안드레아스 볼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안드레아스 볼프는 동독 정부의 핵심 인사인 아버지와 교수인 어머니 슬하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체제에 대한 불만 때문에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안드레아스는 청소년 상담사로 일하다 한 여자아이를 알게 되고, 그 여자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후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더 큰 범죄를 기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동독의 정보기관인 슈타지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을 하게 된다. 안드레아스는 위키리크스처럼 각국 정부 또는 기업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는 일을 해 주목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인터넷 세계의 무법자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소설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핍과 안드레아스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사회의 어두운 실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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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인터넷과 페미니즘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소설에 나오는 모든 문장이 곧 저자의 입장 또는 견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만약에 마르틴이 포르노를 안 본다면 아마 포르노를 안 보는 유일한 독일인일걸. 인터넷 포르노는 독일 남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독일 남자들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주변을 통제하려 들고 자신이 가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어. 마르틴은 내가 인터넷으로 여자 친구들을 잔뜩 만나니까 자신은 인터넷 포르노를 보는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고. (36쪽)
그가 폭로하는 정보 대부분이 여성 탄압과 관련돼 있음을 알고 핍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 그는 인터뷰나 보도 자료에서 늘 공격적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냈다. 아나그레트가 여자들끼리의 모임을 선호하고 지금도 여전히 볼프를 존경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92쪽)
"그래봤자 다 허튼소리일 분이야. 나는 이렇게 부패한 세상에 순수한 빛을 비추고 다른 남자들의 성차별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이다, 이거잖아. 볼프는 여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자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남자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소름 끼치는 부류야." (338쪽)
톰은 묘한 혼종 페미니스트였다. 행동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페미니스트인데 개념적으로는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예전에 톰은 레일라에게 "나는 페미니즘이 남녀 평등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이론에 완전히 공감할 수가 없어. 여자들이 남자들과 동등하면 안 되는 건가. 왜 꼭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르고 남자들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339쪽)
안드레아스의 관점에서는 네트워크에 사회주의를 적용한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656쪽)
발가벗은 채 변기에 앉아 있는 어느 집 아내의 업로드된 이미지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구분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 기계로 인해 인간의 뇌는 피드백 회로로 축소되고, 각자의 개성은 대중적 일반성으로 매몰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6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