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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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까.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다면, 꿈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생생한 추억을 남기고 간다면 어떨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주인공 '나'는 겨우 열일곱 살 때 이런 경험을 한다.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에서 만나 나란히 3등과 4등을 수상한 '나'와 '너'는 급속히 친해져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동네를 오가며 만나는 사이가 된다. 


둘 다 아직 너무 어렸기에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도 이것이 첫사랑이고, 나중에 또 다른 사랑을 하더라도 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 거라는 예감은 들었다. 그 정도로 푹 빠져 있었던 "백 퍼센트"의 상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아무리 찾아봐도 사라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다. 손톱만큼의 가치도 없는 인간 같다. 


그 후로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회사를 다니며 겉보기엔 제법 괜찮은 삶을 산다. 매력적인 여자들과 연애도 해보지만 '너'만큼 사랑한 여자는 없다. 결국 "깊은 위화감"을 느끼고 회사를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한다. 지인의 소개로 내륙 지방에 있는 도서관의 관장 자리를 얻는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 '나'의 오래되고 은밀한 기억을 자꾸만 건드린다. '너'가 들려준, 한때 '나'가 '꿈 읽는 이'로 지내기도 했던 상상 속 도시의 도서관과 그곳이 너무나 비슷한 탓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제까지 발표한 소설의 총합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거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나 요소가 많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이 소설의 초안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79년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이듬해인 1980년에 쓰였다. 당시에는 내용 면에서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아 책으로 출간하지 않았는데, 팬데믹 동안 대대적인 수정과 보완을 거쳐 완성했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총정리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작가가 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속 '나'의 생애는 첫사랑처럼 살면서 잊기 힘든 강렬한 경험(착상)을 한 사람이 오랜 기간 그 경험에 대해 반추하며 정리하고 완성해(초고와 퇴고) 세상에 발표하고 독자들과 감상을 공유하는 경험(출간)의 은유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나'와 '너'가 만든 도시로 홀린 듯 사라진 소년은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온 우리(독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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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2-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답니다
아니 그런데 키치님... 좀 전에 리뷰 쓰신거 본 거 같은데
뭐였죠...<파이브>였네요^^
여기 또 벽돌책 리뷰가...ㅎㅎ

키치 2023-12-19 09:26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읽은 책 리뷰를 한 번에 올렸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