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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말할 수 있다면 - 여행의 여섯 가지 목소리
문상건 지음 / 슬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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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해외여행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경험해볼 수 있는 사치재 같은 것이었다. 반면 지금은 단돈 몇십만 원이면 누구나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한국보다 물가가 저렴한 나라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한 달 살기', '두 달 살기' 등에 도전하는 여행자도 늘고 있다. 이렇게 해외여행이 흔해지고 또 뻔해지다 보니 여행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볼 기회 또한 드물어지고 있다. <소소하게, 여행중독>의 저자 문상건은 여행의 의미가 퇴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이 책 <여행이 말할 수 있다면>을 썼다.


저자는 지금이 마치 '해외여행 의무화 시대' 같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딱히 휴가철이 아니어도, 별다른 목적이나 계획이 없어도, 쉽게 여행을 떠나고 쉽게 다음 여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여행작가로서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여행이 최고라거나 여행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여행을 자주 하지 않아도 괜찮고, 일부러 많은 나라를 여행할 필요도 없다. 여행 별거 없다, 이제 여행은 충분히 했다고 깨닫는 것도 큰 공부다.


저자에게 여행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주는 성찰의 기회다. 저자는 미얀마에서 트레킹을 하다가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트레킹 중간에 목에 수십 개의 링을 한 모습으로 유명한 카렌족의 마을에 들렀다. 저자는 그들의 원시적인 전통과 순수한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마주한 건 그들이 관광객에게 돈을 받고 사진 촬영을 하게 해주거나, 촬영을 대가로 기념품 숍에서 물건을 사게 하는 모습이었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문명과 동떨어져 사는 소수 민족을 운 좋게 발견했다'고 하는 말은 거짓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행이 허세 또는 과장에 불과하더라도, 떠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 할 수 없는 경험, 알 수 없는 기분은 분명히 있다. 저자는 자신이 만약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고, 여행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고민하며 여행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여행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이다. 굴레 안에 있는 사람은 답답한 줄 모르지만, 한 번 굴레 밖으로 나와본 사람이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


저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행자들도 부럽지만, 한참 나이가 많은 중장년층이 여행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 인생의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성숙한 머리와 마음의 상태로 떠나는 여행은 어떤 느낌일까. 젊은 시절의 체력은 없어진 지 오래여도, 젊은 시절 못지않은 호기심과 열정으로 여행에 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저자의 마음까지 두근댄다. 이 밖에도 오랜 경력의 여행자이자 여행 작가인 저자의 여행에 관한 생각,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는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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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의 탄생 -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8인의 성공기
김정진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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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벌고 있습니다." <덕후의 탄생>의 저자 김정진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덕후 기질을 보였다. 그 덕분에 직업군인 시절 국방부 1호 특허 등록을 했고, 미아 방지를 위한 아기 지문 등록제를 발명했고, 세계 최초로 밥상머리교육 앱 '지혜톡톡'을 개발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덕업 일치'를 이룬 사람들의 성공 비결을 이 책에 소개한다.


책에는 맥주, 게임, 종이비행기, 공룡, 연애, 드론, 민요, 악기 등 다양한 분야의 '덕질'을 직업으로 승화한 사람들의 사례가 나온다. 맥주 덕후 박상재 대표는 '모난 돌이 정 맞는' 한국의 학교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호주의 대학에서 국제경영과 금융을 전공하며 적성을 찾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카이스트 MBA에 진학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맥주 유통에 관해 배웠는데 그것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인터넷에서 맥주 만들기 동호회 카페를 발견해 가입하고, 초보자용 수제 맥주 제작 세트를 구입해 맥주를 직접 만들어봤다. 그 후로 그는 눈만 뜨면 맥주만 연구하는 생활을 했다. 그렇게 맥주 입문 7개월 만에 상업 양조를 시작했고, 3년 6개월 만에 세계맥주양조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게임 덕후 진솔의 사례는 놀라움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그는 게임을 도피처로 삼았다. 부모가 자신을 때리고 학교 아이들이 괴롭힐 때마다 게임을 하면서 분노를 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지휘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학과에 원서를 넣고 한 달 동안 준비했다. 게임 덕후가 되었던 것처럼 공부 덕후가 되어 미친 듯이 몰두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사회에 나온 후 여자는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에 부딪혔을 때도 게임을 하듯이 달려들었다. 현재 그는 세계 최초로 게임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기업을 창업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덕후들을 위한 10개의 조언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걸 안 좋게 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고 그걸 업으로 삼아 돈까지 받으며 오래 할 수 있으면 더욱 행복한 일이다. 덕질이 직업이 되는 '덕업일치'를 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 또 파서 끝장을 봐야 한다. 그 분야의 고수를 찾아서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다. 우연히 어떤 영감을 얻거나 기회가 왔을 때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여러 분야를 덕질하고 있다면 교집합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다. 이 밖에도 좋은 팁이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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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짝 비켜 가겠습니다 - 세상의 기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나만의 속도로 걷기
아타소 지음, 김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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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산 게이의 <헝거> 이후, 이렇게 솔직하고 대담한 에세이를 읽은 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낮에는 회사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트위터에 글을 쓰는 일본의 트위터리안 아타소(@ataso00)다. 저자는 오랫동안 자신이 여자인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주변 여자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마다 압도적으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처럼 못생긴 게 여자인가, 같은 여자인 게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연기하면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싫었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추해서 싫었다.


저자가 이렇게 복잡한 성격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저자의 어머니는 늘 저자를 '못난이'라고 불렀다. 일곱 살 아래인 여동생에게는 언제나 '예쁘다'고 칭찬하면서, 저자에게는 못생겼다고 욕하고 때렸다. 저자의 친척과 친구들은 "여자의 무기는 얼굴이다." "여자는 조금 멍청한 편이 낫다", "여자는 남자랑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 같은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 처음엔 저자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울컥했는데, 점점 그 말을 믿고 따르게 됐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만난 남자들을 보니 결국 다 여자의 외모를 따지고, 자신보다 똑똑하고 학력 높고 돈 잘 버는 여자는 싫어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는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저자에게는 M군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M군은 평소 저자에게 "네 성별이 여자라는 게 안 믿겨", "아마 너가 눈앞에서 알몸으로 있어도 안 당길걸"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저자는 당연히 M군과는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M군이 저자를 엄청 취하게 한 다음 강간을 시도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저자는 M군이 실은 자신에게 성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승리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남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인간으로서의 존엄보다 중요하다니.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후 저자는 연애나 결혼보다도 인간으로서 자립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직장을 구했고, 집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고, 언어폭력은 물론 신체적 폭력까지 일삼았던 가족과는 연을 끊었다. 장래 희망은 없지만 하루하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은 확고하다. 학창 시절, 범프 오브 치킨(Bump of chicken)의 가사가 좋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꾸준히 글을 쓴 지 올해로 10년째다. 이제는 제법 유명한 트위터리안이고, 책도 내서 작가라고 불린다. 여자라는 굴레를 버린 덕분이다.


저자는 가끔 어릴 적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입받았던 생각대로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그때는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결혼도 출산도 자기 자신의 행복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결혼이나 출산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그게 옳고 당연한 일인데, 어느 누구도 그게 옳고 당연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 '여자'로 본 사람들이 그랬다. 이제부터 나는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저자의 단호한 결심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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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걸 클래식 컬렉션 1
요한나 슈피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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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가 무슨 이야기였더라?' 어린 시절 엄마가 사주신 명작 동화 전집 중에 <하이디>가 있었고 그걸 읽은 기억도 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하이디의 친구 클라라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가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는 그 유명한 장면만 떠오를 뿐, 대체 왜 클라라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다시 자신의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는지, 애초에 하이디와 클라라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고, 하이디는 어떻게 해서 산에 살게 되었는지 등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읽어 보았다. 내 기억 속에서 잊히기 일보 직전인 동화 <하이디>의 원작을.


<하이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 마이엔펠트. 젊은 여자가 한 손에는 꾸러미를 들고 다른 손에는 다섯 살가량 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여자는 '알프스 삼촌'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알프스 삼촌은 마이엔펠트에서 가장 높은 산자락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일흔 살 가량의 할아버지다. 마이엔펠트 사람들은 마을 가까이에 살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지도 않으며 혼자 지내는 이 노인을 괴짜라고 여기고 두려워한다. 여자는 하나뿐인 언니가 남긴 딸인 아이를 그동안 맡아 키웠는데 얼마 전 부잣집에 좋은 조건으로 채용이 되면서 더 이상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의 할아버지인 알프스 삼촌에게 아이를 맡기고 도망치듯 산을 내려온다.


짐작했겠지만 이 아이의 이름이 바로 하이디다. 부모는 일찍 죽고 이모에게 버림받고 남은 혈육이라고는 할아버지뿐인 가엾은 하이디. 사람들은 알프스 삼촌이 워낙 괴짜라서 하이디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을 내려올 거라고 예상하지만, 예상과 달리 하이디는 할아버지와 오순도순 즐겁게 지내며 무럭무럭 자란다. 하이디는 염소 치는 목동 페터와 페터의 할머니인 그래니, 페터의 어머니인 브르기테와도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이디의 이모가 다시 찾아와 하이디를 도시로 데려간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름난 부자인 제제만 씨의 외동딸 클라라의 친구로 하이디를 추천한 것이다. 하이디의 이모는 하이디가 부잣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이 하이디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도시로 온 하이디는 점점 얼굴의 혈색이 나빠지고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하이디>에 나오는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하이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다. 하이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이디를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축복으로 여긴다. 하이디가 하는 말이나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를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기특해 하고 칭찬한다. 하이디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거나 실수를 해도 야단치거나 닦달하지 않고 하이디가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응원해준다. 반면 하이디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하이디가 무엇을 해도 싫어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싫어한다. 하이디의 이모 데테와 제제만 씨 집의 가정부 미스 로텐마이어, 제제만 씨 집의 하녀 티네테가 그렇다. 이들은 자기가 먹고사는 일에만 관심 있을 뿐, 하이디의 상태나 요청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 결과 이들은 모두가 하이디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호명 받지 못한다.


<하이디>는 아동을 위한 동화인 동시에 신앙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이디의 할아버지는 오래전 신앙을 버리고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교회 목사가 찾아와 하이디를 학교에 보내고 하이디와 함께 교회에 나오라고 부탁했을 때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하이디가 제제만 부인의 도움으로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하이디의 할아버지도 다시 신앙을 가지게 되고 하이디와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된다. 하이디의 신앙생활에 있어 제제만 부인과 그래니의 역할이 매우 크다. 제제만 부인을 하이디가 제제만 씨 집에 있는 동안 향수병에 걸려 힘들어할 때 힘이 되는 말을 해줬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게 뭔지 다 아셔. 우리가 뭔가를 부탁해도 그게 우리에게 옳지 않으면 그걸 주시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계속 기도를 하면 더 좋은 것을 찾아주시지."(162쪽) 그래니는 하이디로 하여금 읽기를 배우고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하이디는 클라라와 클라센 선생님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신앙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감내할 힘을 준다.


<하이디>는 또한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이야기이다. 불우한 소녀 하이디는 이모 손을 잡고 산으로 온 후로 눈에 띄게 혈색이 좋아지고 몸이 건강해지고 성격이 안정된다. 또다시 이모 손에 이끌려 도시로 갔을 때는 산에서와 달리 맛있는 빵을 매일 마음껏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지만,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는 자연을 보지 못하고 귀여운 염소 떼와 놀 수 없다는 아쉬움에 푹푹 시들어갔다. 산으로 돌아와서야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하이디를 만나기 위해 산으로 온 클라라도 자연 속에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했다.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요즘에는 새롭지도 않은 주제이지만, 근대화와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80년대 유럽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창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용감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하이디>는 남성 중심의 문학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스스로의 힘과 재주로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하고 감화시키는 이야기라는 점이 좋다. 하이디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 제제만 부인과 그래니 같은 여자 어른이라는 점도 좋고, 할아버지와 제제만 씨, 클라센 선생님 같은 남자 어른들이 하이디에게 도움을 받거나 하이디로 인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좋다. 같은 여자아이인 클라라와는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는 반면, 남자아이인 페터가 하이디와 클라라 사이를 질투한 나머지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신선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여자가 문제 상황에 처했을 때 구해주는 건 남자라고 은연중에 학습시키는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하이디>의 이런 미덕들이 더욱 눈에 띄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하이디>는 마치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이름만 기억나는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처음엔 기억나는 게 이름뿐이었는데 어린 시절 추억을 하나둘 이야기하는 동안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 친구가 당시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조금씩 생각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 잊고 지낸 친구를 되찾았으니 앞으로는 더욱 소중히 여겨야지. 하이디의 태양처럼 밝고 활기찬 기운이 벌써부터 나를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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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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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최다 부문 수상에 빛나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소설판이다. 영화를 아직 못 봐서 소설과 영화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말할 수 없지만, 소설만 읽어도 충분히 환상적이고 황홀해서 이를 영상으로 구현한 영화를 보면 얼마나 더 환상적이고 황홀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야기의 배경은 소련과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인 1960년대 미국.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자는 영화와 구두를 좋아하는 평범한 처녀다. 엘라이자는 비록 귀가 들리지 않고, 자신을 돌봐줄 가족도 없지만, 직장에는 믿음직한 동료 젤다가 있고 옆집에는 자신의 일이라면 무조건 발 벗고 도와주는 가난한 화가 자일스가 있다. 어느 날 엘라이자는 실험실에 온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가 들어온 것을 알게 된다. 실험실의 보안 책임자 리처드 스트릭랜드는 실험실의 직원들은 물론 청소부들에게도 괴생명체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외부에 괴생명체에 관한 말을 조금이라도 퍼뜨릴 시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에게 왠지 모를 연민과 끌림을 느끼고, 스트릭랜드의 눈을 피해 매일 그를 찾아간다.


여기까지는 <셰이프 오브 워터>가 한창 주목받을 때 영화 프로그램에 소개된 시놉시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이 소설에서 새롭게 발견한 건 리처드 스트릭랜드의 아내 '레이니'의 존재다. 레이니는 군인인 남편과 두 아이를 돌보며 살고 있는 전업주부다. 레이니는 두 아이를 낳은 지금도 여전히 젊고 건강하고 똑똑하다. 하지만 리처드는 레이니가 직업을 가지거나 스스로 차를 운전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가 밖에서 일을 하거나 운전을 한다는 건, 그 여자의 남편이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거나 운전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니는 우연히 일자리를 얻게 되고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자신도 남편처럼 밖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레이니는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 전업주부로 살 수가 없게 된다.


레이니의 이야기를 읽으니 주인공 엘라이자의 이야기가 더 분명하게 읽혔다. 괴생명체를 만나기 전의 엘라이자는 가난해서,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남자 화장실을 청소하는 중에 남자가 들어와서 소변을 보려 하면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보육원 원장이 자신의 장애를 두고 끊임없이 놀리는 말을 하고 공개적으로 괴롭혀도 항변하지 못했다. 엘라이자는 영화를 보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실험실에 괴생명체가 나타났을 때, 엘라이자는 오직 그만이 불완전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온전히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소설에는 엘라이자와 레이니 외에도 젤다라는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온다. 젤다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청소부들의 보스 격 인물로, 흑인이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차별을 당하고 있다. 젤다는 비록 자신보다 한참 늦게 실험실에 들어온 직원들이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더 빨리 승진하고 더 많은 봉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는 하지만, 항상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 엘라이자 같은 - 동료들을 케어하며 살고 있다. 이 책에는 이런 식으로 약자가 약자를 돕거나 구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들을 못살게 구는 존재가 항상 백인 남성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정작 그 백인 남성이 두려워하는 괴생명체는 - 여러 의미로 - 이들 모두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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