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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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의 소설가, 루시아 벌린의 단편집 <청소부 매뉴얼>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작가 루시아 벌린의 생애에 관해 알아야 한다. 1936년생인 루시아 벌린은 24살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미국 서부 탄광촌과 칠레 등지에서 10대를 보냈고, 32살에 이미 세 번 이혼했고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해야 했던 루시아 벌린은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원,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했고 그러면서도 글을 썼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시아 벌린은 평생에 모두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청소부 매뉴얼>에는 그중 43편이 실려 있고, 대부분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은 여러 집을 전전하며 청소부 일을 하는 여자의 고단한 삶이 자세히 나온다. 집주인들은 청소부가 청소를 완벽하게 하는지보다 물건을 훔치지는 않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일을 시작할 때 면저 시계나 반지, 비싼 핸드백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한다. 나중에 그들이 집에 돌아와 물건의 소재를 확인할 때면 차분하게 '베개 밑, 아보카도 색 변기 뒤' 하는 식으로 위치를 말해주기 위해서다. <나의 기수>와 <관점>은 저자가 응급실 또는 내과 병원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에인절의 빨래방>은 저자가 싱글맘으로 네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던 시절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분신으로 보이는 '나'가 한 주에 몇 번씩 기저귀를 빨러가는 에인절 빨래방은 근처에 사는 노인들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사랑방이다. 여기서 만난 어떤 할머니는 '나'에게 집 열쇠를 주면서, 언젠가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시신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할아버지는 거울로 '나'의 손을 흘끗흘끗 보다가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농을 건네며 치근댄다. 할아버지는 자꾸만 '나'가 인디언인 것 같다고 우기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하면서 벽에 붙은 게시문을 읽는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아기 침대 팝니다 - 아기를 사산했음."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다>는 저자가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진 후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울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아들 벤을 데리고 사촌인 벨라 린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벨라 린에게 열일곱 살 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남자 조가 자신을 떠났고, 조와의 두 번째 아이가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벨라 린은 '나'에게 낙태 수술을 제안하고, 그 길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간다. <그녀의 첫 중독치료>는 저자 자신의 알코올 중독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장남과 차남에게 삼남과 사남을 맡기고 중독 치료자를 위한 재활 병동에 들어간다. 재직 중인 학교에는 난소종양 수술을 받으러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를 전제로 하는 문학이지만,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인생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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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천재 작곡가의 뮤직 로드,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7
김성현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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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만큼 유명하고 모차르트만큼 오해받는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팟캐스트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 모차르트 편을 들으며 든 생각이다.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도 모차르트는 알 만큼 모차르트는 유명한 음악가다. 나 역시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를 배웠고, 방과후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에도 통과의례처럼 모차르트의 곡을 익혔다. 그런 나조차 모차르트 하면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낸 타고난 천재, 도전하는 일마다 성공했던 팔방미인, 라이벌 살리에리의 질투와 음모로 인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사내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다. 


클래식 클라우드 <모차르트> 편의 저자 김성현은 이러한 인상 또는 이미지가 대체로 오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책에서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을 하고 작곡의 영감을 얻은 독일 뮌헨,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 밀라노 등을 직접 발로 누빈 여정을 소개한다. 아울러 수많은 자료와 연구 문헌을 조사해 찾아낸 모차르트의 생애와 음악에 관한 진실을 밝힌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고 음악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흐릿하고 모호한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모차르트의 맨얼굴, 진정한 실체를 만날 수 있었다. 


남들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4쪽) 


모차르트를 이해하려면 보통 사람과는 달랐던 복잡다단한 그의 생애부터 알아야 한다. 모차르트는 1756년에 출생해 1791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는 35년 생애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년 2개월 2일을 여행으로 보냈다. 모차르트의 생애에는 세 번의 중요한 여행이 있다.  첫 번째 여행은 어린 시절 아버지, 누나와 함께 떠난 '1차 그랜드 투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나름 유명한 궁정 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교육자였다. 일찌감치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만 6살이 되던 해인 1762년에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르를 데리고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여행을 떠났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상 오늘날 뮤지션들이 하는 순회공연에 가까웠다. 왕과 귀족들 앞에서 모차르트 남매가 연주를 하는 것이 여행의 주된 일정이었다. 이 여행은 장장 3년 5개월 하고도 20일, 총 1269일 동안 이어졌다. 이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 가족은 레오폴트의 연수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고 유럽 전역에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알렸다. 모차르트 또한 유럽 각지의 최고 수준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기량을 갈고닦았다.


두 번째 여행은 십 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떠난 '2차 그랜드 투어'다. 유럽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 가족은 모차르트의 성공을 시기한 기성 음악가들이 모차르트에 관한 비방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신동 음악가'가 아닌 '오페라 작곡가'로 키우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를 돌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최신 음악의 조류를 배우고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유력 인사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고 연회를 즐기며 문화를 익혔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공부하는 동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취업 자리를 알아보았다. 이 두 차례에 걸친 그랜드 투어는, 요즘으로 치면 현지 유학 겸 구직활동이었던 셈이다.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모차르트가 1756~1777년에 유럽 전역과 이탈리아로 두 차례에 걸쳐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시기를 '모차르트의 수련기'라고 부른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장기간의 힘든 수련기를 거치면서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111쪽) 


세 번째 여행은 이십 대 시절 어머니와 함께 떠난 구직 여행이다. 두 번의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그만한 실력과 명성이면 순조롭게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예상과 달리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는 자신을 받아줄 만한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차르트는 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자신을 귀여워해줬던 사람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해보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신동'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의 모차르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레오폴트는 점점 더 아들을 채근했고, 그럴수록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하라는 구직 활동은 안 하고 연애에 빠져들었다. 결국 힘든 여행에 지친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프리랜서 음악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멀쩡한 '정규직'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 게 여간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고정된 후원자나 꼬박꼬박 급료가 나오는 직장 없이도 자신의 경력을 차근차근 잘 만들어나갔다. <후궁 탈출>을 시작으로 <대미사>,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같은 오페라 작품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며 모차르트의 명성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모차르트의 활동 반경은 잘츠부르크와 빈을 넘어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라하로 점차 넓어졌고, 수입 또한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문제으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상류층과 어울리며 생활한 탓인지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고 모차르트는 고가의 악기와 의상, 신발, 가구, 말과 마차, 와인과 음식 등을 엄청나게 사들였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선 스스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과로에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 듯, <레퀴엠>을 작곡하던 도중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숨 가쁘게 쫓아온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는 '타고난 천재'보다는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그를 천재로 만든 건 우선 아버지 레오폴트였고 그다음엔 '18세기 유럽'이라는 드넓은 세상이었다. (314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차르트가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다행히 모차르트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봐주고 기꺼이 지원해준 아버지 레오폴트가 있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도 그 방식이 고루한 편견이나 인습을 따르는 것이었다면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유럽에서 가장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길 원했고 그러려면 비좁은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유럽 전역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두 번이나 여행을 감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모차르트는 평생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에게 직접 '홈스쿨링'을 받고 '해외 원정 유학'까지 다녀온 셈이다. 모차르트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키운 건 팔 할이 아버지였고 여행이었다.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도 성장했지만 인간으로서도 성숙했다. 모차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자라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만 6세 때부터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기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이다. 어른에게도 불편한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누비는 여정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부담과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레슨이나 연습 따위는 까맣게 잊고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실컷 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소년이나 청년들처럼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연애하는 꿈도 꿔봤을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이런 부담이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부담이나 욕망에 못이기는 척 넘어가보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구직 여행 당시 모차르트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몇 명의 여인을 만나고 그 중 한 명과는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결국 아버지의 만류로 결혼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모차르트가 느낀 희로애락은 그의 음악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짝 스타가 아닌,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위대한 음악가로 만든 것 역시 여행이었다. 모차르트는 연주자로서의 기량도 뛰어났지만 작곡가, 창작자로서의 영감과 창의성도 대단했다. 이는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유럽 전역을 누비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덕분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최고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좋은 영감과 창의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보통 음악가들보다 한참 커버린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너무나 비좁은 무대였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생활하는 걸 답답하게 여겼다. 잘츠부르크의 음악가들은 전통에 갇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한심해 했다. 모차르트의 이런 태도는 결코 오만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당대 유럽 전역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 수준의 작품이었다. 모차르트가 현재까지도 많은 음악가들의 귀감이 되고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여행을 하면서 누구보다 많이 보고 넓게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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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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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고양이> 이후 1년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죽음에 관한 소설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1994년에 <타나토노트>라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크게 새롭진 않았으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신선했다.


<죽음>은 추리 소설가 '가브리엘 웰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브리엘은 평소처럼 아침에 눈을 떠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사를 찾아간 가브리엘은 진료소에서 자신의 우상인 1930년대 미국 배우 헤디 라마를 빼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자의 이름은 뤼시 필리피니. 자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매라고 소개한 뤼시는, 아무래도 가브리엘이 죽은 것 같다며 가브리엘을 도와 가브리엘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함께 찾기로 한다.


가브리엘을 죽인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가장 유력해 보이는 인물은 총 세 명이다. 가브리엘의 쌍둥이 형 토마, 가브리엘의 출판사 대표 알렉상드르 드 빌랑브뢰즈, 그리고 가브리엘을 적대시하는 평론가이자 작가 장 무아지다. 가브리엘은 용의자 세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경쟁 상대였다고만 여겼던 쌍둥이 형 토마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을 염려하고 또 지원했다. 가브리엘을 이용해 돈 벌 궁리만 하는 줄 알았던 출판사 대표 빌랑브뢰즈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가브리엘 사후 가브리엘처럼 글을 쓰는 인공지능을 개발할 생각을 할 정도였다. 대중 앞에서 가브리엘을 공공연히 비난했던 평론가 무아지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의 재능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이제야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지만, 죽음의 강을 건너버린 지금, 돌이킬 방법은 없다. 그저 저승에서 그들의 안녕을 기원할 뿐이다. 가브리엘은 끝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알게 되고,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푸는 데 성공한다. 원래의 육체를 되찾을 길은 없지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매 뤼시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로서 존재하기로 결심한다.

<죽음>은 그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선보인 작품들과 달리,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같은 면모가 많이 보인다. 주인공 가브리엘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마찬가지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점, 장르 소설 작가라는 점, 범죄학, 생물학, 심령술 등에 두루 관심이 많은 점 등이 그렇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으나 자국인 프랑스에선 장르 소설 작가라고 폄하당하고, 외국에선 영미권 작가가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다는 설정은, 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자신의 발언이 아닐지. 이 밖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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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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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고 단번에 팬이 된, 박상영 작가의 소설집이 나왔다. 제목은 <대도시의 사랑법>. 2019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비롯한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나는 이 중에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를 먼저 읽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주인공 '나'가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규호'라는 남자를 만나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전부 모이면 여섯 명이라서 '티아라'라고 이름 붙인 친구들과 클럽을 찾은 '나'는 친구 '지연'이 난동 부리는 걸 말리다가 밀쳐져 쓰러지고 입술에 피가 난다. 이때 자신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준 사람이 규호였고, 다정함에 감동한 '나'는 규호에게 키스를 해버리고 만다. 그 후로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뮤지컬 극장으로 규호가 찾아오고, 규호가 일하는 이태원 클럽으로 '나'가 다시 찾아가면서 둘은 점점 특별한 사이가 되고 사귀게 된다.


문제는 '나'가 규호에게 '5년도 넘게 나와 함께 살아온 가족'이자 '또 다른 나'라며 '카일리'의 존재를 밝히면서 비로소 드러난다. 작가는 한 번도 HIV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카일리의 정체가 HIV라는 걸 독자는 안다. 카일리 때문에 '나'와 규호가 연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관계를 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불행해질 거라는 것도 안다. '나'는 카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호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고 자신의 곁을 지키는 게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영민하고 성실한 규호가 자신 때문에 제약된 삶을 사는 게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규호의 등을 떠밀고 규호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성화를 부린다. 그러면서도 규호가 정말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나'와 규호가 제약된 삶을 사는 게 단지 카일리 때문일까. '나'와 규호는 가난하다. 안정된 직업을 가지기 어렵고, 가족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다. 주택청약 당첨, 주택 담보 대출 등 이성애 부부가 당연히 누리는 혜택을 동성애 커플은 똑같이 누릴 수 없다. 성관계를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잘 사귀었던 '나'와 규호가 헤어진 이유도 결국 돈이다. 어쩌면 인천에서 이태원으로 출퇴근하던 규호가 '나'와 사귄 이유 중 하나도 '나'의 집이 서울에 있고, 여차하면 '나'의 집에 머무르면서 돈을 절약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을지 모른다(실제로 규호는 '나'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규호는 한 시절을 '나'의 곁에 머물렀고, '나'는 그 시절을 평생에 걸쳐 기억할 것이다. 나 자신도 좋아할 수 없었던 나를 좋아해준 사람. 그게 바로 규호이므로.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먼저 발표되었지만, 작품 자체는 <대도시의 사랑법>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다. 규호와 헤어진 후 '나'는 규호가 집에 들어올 때 함께 가져온 침대 매트리스를 버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방콕행 비행기를 탄다. 데이팅 앱에서 알게 된, 싱가포르계 말레이시아인 '하비비'를 만나기 위해서다. 얄궂게도 '나'와 하비비가 묵게 될 숙소는 오래전 '나'가 규호와 함께 묵었던 그 고급 호텔이다. 그때는 카일리 때문에 마음 놓고 성관계를 즐길 수 없었지만, 이제는 HIV prEP(프렙: 노출 전 예방요법)을 위한 약물 처방이 승인되어 카일리 걱정 없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규호가 없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같은 소원이 이루어져도 규호가 없다면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규호와 함께 했던 추억을 지울수록 자신도 함께 지워지는 걸 느낀다.


이어지는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정신없이 웃다가 또 정신없이 울었다. 사랑이 뭐라고,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들. 사랑이 뭐라고, 그 사랑을 떠나보낸 바보들. 이제까지 슬픈 사랑 이야기를 읽고 다른 결말을 상상해본 적은 없는데, 이 소설은 '나'와 규호가 다시 만나 함께 행복해진 결말을 일부러 상상해봤다. 작가님도 상상해보셨을까. 상상해보셨다면 부디 써주시고 발표해주셨으면 ㅠㅠ


책을 덮으니 오래전 미국 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가 생각났다. 최근에 본 일본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도 생각났다. 20여 년 전 <퀴어 애즈 포크>를 볼 때만 해도 성소수자, LGBT란 용어조차 생경했다. <어제 뭐 먹었어?>가 방영된 지금은 일본 같은 보수적인 나라에서도 동성혼 합법화가 의제화되고 있다. 한국도 곧 뒤따를 거라고 기대한다(앞지르면 더 좋다). 퀴어 서사가 여기까지 왔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별, 박상영은 어디까지 갈까.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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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안아주듯 나를 안았다
흔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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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글을 쓰며 수많은 구독자들에게 위로와 살아갈 힘을 선사하는 작가 흔글(조성용)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타인을 안아주듯 나를 안았다>. <내가 소홀했던 것들>을 비롯한 전작들이 타인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을 담은 책이었다면, <타인을 안아주듯 나를 안았다>는 타인을 위로하듯 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기 작가가 된 후에 겪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언제부터인가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가 쭉쭉 떨어지고 있다. 한때는 이 사실이 너무나 싫었고 자신감까지 떨어졌는데 이제는 홀가분하다. 잠시나마 내 계정에 들러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이제까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곁에 남은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 다수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다 소수의 진짜 인연을 놓치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다는걸,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는 SNS를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예쁘게 정리된 피드를 보면 기분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무엇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점점 우울하게 만들었다. 가진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안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계정도 그들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모아서 만든 컬렉션이라는걸. 그들에게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못난 구석이 있고 비참한 일상이 있다는걸.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내 삶을 들여다보지 않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안다.


유명 작가이다 보니 독자들로부터 상담을 청하는 메시지도 종종 받는다. 재작년에는 한 독자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데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서 힘든 입시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남들은 저만치 앞서 나가는데 자기만 그동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같아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그 메시지를 보면서 인생이란 퍼즐은 영영 완성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인생이란 퍼즐은 나 자신의 성장에 맞춰 커지기도 하고 더 복잡해지기도 한다. 인생의 가장 젊은 시기인 지금은 그 퍼즐을 완벽하게 맞출 생각을 할 게 아니라, 퍼즐을 보다 크고 멋지게 만들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밖에도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볍게 읽히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이다. 마음이 헛헛할 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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