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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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이현이 9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이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모든 작품이 좋았다. <실패담 크루>는 사회초년생인 '나'가 각자의 실패담을 공유하는 '실패담 크루'라는 모임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회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는 자신의 실패 경험을 끄집어내 이야기로 만들어 연습까지 하는 정성을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나'의 실패담보다 또 다른 신입 회원의 실패담에 더 관심을 보여 질투를 느낀다. <언니>는 한때 같은 독서실에 다녔던 '언니'를 대학 조교로 만나게 된 '나'가 언니의 번역 일을 돕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두 작품 모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다 실패하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선의 감정>은 월급쟁이 의사인 '나'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환자를 상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소설의 '나'는 <실패담 크루>의 '나', <언니>의 '언니'와는 달리 사회의 주류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체를 들여다 보면 그 또한 병원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그마저도 최근에 실적제로 전환되어 경쟁이 치열해졌다) 처지라는 점에서 조직과 타인의 인정(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빛의 한가운데>의 '안희' 역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주류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아들이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면서 잠잠했던 일상에 파문이 일어난다. 결국 이 사회에서 못 가진 사람은 못 가져서, 가진 사람은 가졌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작가의 인식이 느껴졌다.


불안은 불신으로 이어지고 불신은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단 하나의 아이>의 대학생 '보미'는 아이 돌보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초등학생 '하우'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보미를 채용한 회사는 돌보미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정하고 있어서, 보미는 하우에게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피상적인 관계만 맺는다. <우리가 떠난 해변에>의 방송 작가 '설'은 과거 연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커플이 되었던 두 사람의 현재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커플의 현재는 설의 상상과 달랐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설의 전 애인 주영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이 온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그들 자신일까 아니면 그들이 속한 사회일까.


불안을 더 많이 느끼는 건 아무래도 강자보다는 약자, 남성보다는 여성이다. <가속 궤도>의 '소진'은 자신이 일하는 학원 블로그에서 이상한 악플을 보고 공포에 시달린다. 소진은 대학 때 사귄 남자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고, 헤어진 후에는 스토킹을 당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소진은 급기야 운전 도중 급발진인지 공황인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을 겪는다. <이모에 관하여>의 '재연'은 첫째 출산 후 회사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둘째를 임신한다. 어렵게 입주 도우미를 구하지만 업체 소개와 다른 점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재연이 느끼는 공포는 점점 커진다. <사는 사람>은 유명 입시 학원의 상담 실장인 '다미'가 학생의 부탁으로 시험지 유출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도 상당히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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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 시티 소설Q
손보미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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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안전해졌다고 느끼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안전하지 못하다고, 아니 훨씬 더 불안해졌다고 느낀다. 가령 내가 어릴 때에는 지하철 승강장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선로 근처에 가는 게 불안했다. 이제 더는 그런 종류의 불안함을 느끼지 않지만, 치한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여전하고 불법 촬영 문제는 예전에는 없었는데 요즘은 심각하다. 세상은 점점 더 안전해지고 있는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손보미의 장편 소설 <세이프 시티>는 제목 그대로 도시의 안전 문제를 다룬다. 잘나가는 경찰이었던 '나'는 수사 도중에 발생한 문제로 인해 사실상 강제로 휴직을 하게 된다. 이대로 경력이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새벽마다 집 밖으로 나가 산책하는 습관을 들인다. 어느 날 '나'는 철거가 진행 중인 구도심을 산책하다 여자 화장실만 표적으로 삼는 연쇄 범죄 사건의 범인을 맞닥뜨리게 된다. 경찰로서 가만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범인과 대치하다 큰 부상을 입는데, 이것이 예상치 못한 사태로 연결된다.


이렇게 요약된 줄거리를 보면 (휴직 중인) 경찰이 주인공인 평범한 범죄 스릴러 소설 같은데, 작가는 여기에 몇 가지 신기술을 더한다. 하나는 도시 내의 각 구역의 안전도를 평가해서 알려주는 '세이프 시티'라는 앱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기억 교정' 프로젝트이다. '나'는 새벽 산책을 나갈 때마다 세이프 시티 앱을 확인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앱이 안전한 장소를 알려주는 고마운 수단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범죄 행위를 저질러도 되는(원래 우범 지역이니까)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기억 교정' 프로젝트는 '나'의 남편의 대학 동창인 신경과학자 임윤성이 개발 중인 기술로, 범죄 피해자의 기억을 삭제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범죄 가해자가 범죄 당시 느낀 쾌락을 제거해 재범 방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임윤성은 범죄 피해자가 된 '나'를 이용해 프로젝트를 홍보하려고 하는데, '나'가 휴직 전에 겪은 사건과 여자이자 경찰인 점이 문제가 되면서 또 다른 사건들이 일어난다. 대체 여자에게 안전한 장소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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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신
리즈 무어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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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미국의 청소년 캠프 프로그램에서 한 소녀가 실종된다. 소녀의 이름은 '바버라'. 문제는 이 소녀가 캠프장을 비롯한 이 일대 삼림을 소유한 부호 반라 가문의 딸이라는 것이다. 반라 가문에는 바버라 이전에 실종된 아이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바버라의 오빠이자 반라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베어'라는 소년이다. 베어의 뒤를 이어 여동생 바버라까지 실종되자 반라 가문 사람들과 캠프 관계자들은 물론 경찰과 지역 주민들 모두 다양한 가설을 내놓으며 범인을 추리한다. 대체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리즈 무어의 전작 <무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선뜻 구입해 읽었는데 역시 재미있었다. <무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비하면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의 느낌이 강한데(정유정, 스티븐 킹이 추천한 이유가 납득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대목에서 역시 이 작가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1970년대에 살기 위해 결혼을 택한 여자, 경찰이 되기로 한 여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캠프 관리자가 된 여자, 불안한 엄마와 어린 남동생을 돌보는 여자 등 다양한 여자의 삶을 보여준 점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여자 경찰 캐릭터 너무 좋은데 후속편 안 써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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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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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작가가 책을 만드는 줄 알았다. 물론 작가가 있어야 원고가 있고, 원고를 토대로 책이 만들어지지만, 원고를 책으로 만들고 그 책이 독자의 손에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노동이 투입된다는 걸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김혜진의 장편 소설 <오직 그녀의 것>은 출판 편집자의 삶을 그린다. 1990년대 어느 대학의 사학과 학생인 홍석주는 국문학과 창작 수업의 청강생이 된다. 석주는 자영업자인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교사가 될 생각으로 사학과에 진학했으나 어릴 때부터 동경한 문학에 대한 마음을 좀처럼 접지 못한다.


결국 석주는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에 응하지 않고, 대학 졸업 후 '교한서가'라는 출판사에 교열자로 취직한다. 느리지만 꼼꼼하게 일하는 자세로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석주는 얼마 후 인문교양부의 편집자로 이동하게 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편집자 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나 몇 년 후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구조 조정을 당하게 되고, 임용 시험을 준비하던 석주는 신생 출판사 '산티아고북스'의 문학 편집자 구인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다. 그렇게 편집자 경력을 다시 시작하게 된 석주는 수많은 책들을 만들고 또 만들며 책이라는 바다를 항해한다.


석주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성공으로, 누군가에게는 실패로 보일 것이다. 가난한 집 딸이 혼자 힘으로 취업해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정년이 될 때까지 일했으니 성공했고, 편집자로서 좋은 책을 많이 만들고 그 책들 중 몇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적도 있으니 성공했다. 하지만 오래 사귄 연인과 끝내 결혼하지 않은 것이, 책을 읽고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낙이 없는 삶을 산 것이, 어떤 사람은 - 어쩌면 석주 자신도 - 아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시력이 저하되고 온몸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책을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치고는 너무 크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 만사 유한하고 돈도 명예도 부질 없다. 사랑도 행복도 찰나에 불과하고, 그 어떤 성과도 나만의 공은 아니다. 결국 온전히 내 것인, 나에게만 속해 있는 '오직 나만의 것'은 그동안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실력과 기술, 감각, 안목, 경험뿐이다. 이것이 내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2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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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아름다움 - 어느 우정의 역사
앤 패칫 지음, 메이 옮김 / 복복서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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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도 어떤 일을 능히 이룰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혼자서는 상상도 못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의미라고 나는 해석한다. 미국 작가 앤 패칫의 산문집 <진실과 아름다움>에 나오는 저자와 친구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 책은 1992년 <거짓말쟁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데뷔해 2001년 출간한 <벨칸토>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앤 패칫이 2004년에 발표한 첫 산문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우정을 나눈 루시 그릴리와의 일화들을 소개한다. 


앤과 루시는 같은 대학에 다녔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루시는 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앤은 루시에 대해 알았는데, 그건 루시가 대학에서 유명 인사였기 때문이다. 루시는 어릴 때 앓은 암의 후유증으로 턱의 일부를 잃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처음에는 남다른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루시에게는 탁월한 재능과 엄청난 친화력 등 다른 매력도 많았다. 그래서 앤은 루시와 같은 대학원(아이오와대학 문예창작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뻐했고, 루시 또한 앤과의 만남을 기뻐했다.


작가와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여자 대학원생인 앤과 루시에게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둘 다 하루라도 빨리 성공하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버틸 만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두 사람은 각종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펠로십, 공모전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작은 목표들을 이루고 결국 둘 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을 받으면서 점차 생활이 안정되는(집도 사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난) 앤과 달리, 루시는 화려한 성공을 거둘수록 장렬한 고통을 겪는다. 


루시는 오랫동안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런 남자를 만나려면 적어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외모를 갖춰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위험한 성형 수술을 여러 차례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졌다. 앤은 친구로서 루시를 말리고 싶었고 실제로 말린 적도 있지만, 암도 장애도 겪어본 적이 없는 앤으로서는 루시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루시의 선택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그래서 앤은 루시를 위해 간병도 해주고 돈도 빌려주고 방도 내주는 등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다가 결국 더는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얼마 후 들려온 루시의 부고. 사인은 따로 있었지만 앤의 자책을 막을 순 없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앤이 루시를 위해 해준 것들이 정말 많지만, 내가 앤이라면 루시와 알고 지내는 동안 내가 루시에게 해준 것보다 루시가 나에게 해준 게 더 많다고 느꼈을 것 같다. 앤의 재능과 성실성을 고려할 때 앤은 혼자서도 충분히 작가의 꿈을 이루었을 것 같다. 하지만 루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루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이제까지 쓴 작품들과 같은 작품을 쓰고 지금과 같은 작가가 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혼자 걸을 뻔했던 길을 함께 걸어주고 더 먼 곳으로 이끌어준 친구의 빈자리를 들여다 보는 저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루시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고, 상황이 온통 암울해 보일 때 자신이 내뿜는 환한 빛을 빌려주었다. 나누어줄 빛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빛을 빌려주는 것, 수년에 걸쳐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온 일이었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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