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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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과거의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과거로 돌아가는 건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자의와 무관하게 과거에 갇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예가 알츠하이머병이다. 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세 번째 장편소설 <타임 셸터>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환자들을 위해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한 공간을 제공하는 클리닉을 배경으로 한다. 작년 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 속의 시간(또는 시간 속의 기억)을 공간으로 재현한다는 설정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두 번째 장편소설 <슬픔의 물리학>을 읽으며 기억과 시간, 공간이라는 개념이 이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슬픔의 물리학>은 타인의 기억 속에 잠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소년 '게오르기'를 화자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끝 무렵의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게오르기는 일하느라 바쁜 부모가 못 놀아주는 대신 사준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걸 남몰래 깨달았다. 소년은 이 능력을 이용해서 1913년생인 할아버지의 다사다난한 어린 시절을 체험하기도 하고, 전쟁의 화마 때문에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집안의 비극을 알게 되기도 한다. 전쟁 통에도 피어난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영원히 비밀을 간직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게 된다. 신이라도 믿어야 살 수 있었던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부모님의 고충도 뒤늦게 이해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자신을 겹쳐 보면서 그가 스스로 초래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혐오에 눈물짓기도 한다. 


그 책은 그를 괴물로 그려내지만 상관없다. 나는 그 소년 안에 있었고 이야기를 전부 안다. 거기에는 거대한 오해와 중상이, 엄청난 불의가 숨어 있다. 나는 미노타우로스다. 나는 피에 굶주리지 않았다. 청년 일곱 명과 처녀 일곱 명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왜 갇혀 있는지 모르겠고, 잘못한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어둠이 몹시 두렵다. (88쪽)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던"(187쪽) 게오르기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능력이 점차 퇴화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잠입도 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수집한다. 그렇게 수집한 이야기들은 멸망 이후의 세상을 위한 '타임 셸터'가 된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세 번째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한 '타임 셸터'는 이 소설에 이미 소제목으로 나오고, 심지어 <타임 셸터>에 등장하는 시간의 부랑자 가우스틴도 이 소설에 나온다(!!). 게오르기는 본격적으로 기억을 수집하기 전인 1990년대에 가우스틴을 만나 온갖 기발한 사업을 벌이며 그전에도 그 후에도 경험한 적 없는 우정을 나눈다. 나중에 게오르기는 공항에서 우연히 가우스틴의 모습을 보는데, <타임 셸터>에 나오는 가우스틴과 비슷한 걸로 보아 동일 인물(캐릭터)인 듯하다. 


게오르기는 종국에 어떤 깨달음(에피파니)을 얻게 되는데, 그 깨달음이란 "남는 것은 특별한 순간이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아무것도일어나지않음'"이란 사실이다(386쪽). '아무것도일어나지않음'이란 말 그대로 인생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국 일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아지고 이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인생뿐 아니라 사회도, 역사도, 신화도. 그러나 슬픔이 남은 자리에는 늘 이야기라는 꽃이 피고, 이 꽃이 새로운 생명을, 사회를, 역사를, 신화를 만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기꺼이 슬퍼하고 부지런히 이야기를 읽고 쓸 것. 이것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 - 살아갈 목적 -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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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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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남아공 출신의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J. M. 쿳시의 소설을 야금야금 읽고 있다(<추락>, <폴란드인>).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생애를 직접 쓴 일종의 자전소설로, <청년 시절>, <서머타임>으로 이어지는 3부작의 1권이다. 이 책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른 두 권도 곧 읽어볼 예정이다. 이 책에 그려진 작가의 '소년 시절'은 다른 백인 남성 작가들의 그것과 비슷한 듯 다르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일반적인 미국이나 유럽 출신이 아니라 남아공 출신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같은 남아공 출신 작가인 데버라 리비나 태어난 나라는 이란이지만 남아공에서 유년기를 보낸 도리스 레싱과 겹쳐 보인다.


이 책에 따르면 저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약자성, 소수자성을 강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가난한 부모는 케이프타운에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하고 시골로 이사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여성인 어머니를 틈만 나면 비하하고 조롱했고, 지금으로 치면 남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장남인 저자에게 과보호라는 이름의 의존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행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학생들을 통합해서 교육하지 않고 인종별로 교육했으며, 백인 학생들 안에서도 종교별, 출신지별로 차별을 일삼았다. 차별을 당연시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히 폭력적인 성향을 띠었고, 내성적이고 온순한 성격이었던 저자는 그들의 괴롭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와중에도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해주는 어머니와, (내성적이고 온순한 성격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친구 대신 탐닉했던 영화, 라디오, 책 덕분이다. 종교나 인종의 구분을 넘어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어떤 형태의 우정이나 사랑을 금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금지된 우정이나 사랑을 기어코 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나는 늘 놀랍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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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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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초 전미도서상 수상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내가 늘 그렇듯이 사놓고 몇 년을 안 읽다가 최근에 대대적으로 책장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을 처분할까 말까 고민하다 50페이지만 읽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결국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약간 막장 드라마 같은 느낌이 없지 않은데,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이 특이해서 읽는 동안에는 막장 드라마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오히려 실험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연애의 과정을 연극 수업에 빗댄 대목들이 좋았다.


소설은 세 파트로 구성된다. 첫 번째 파트는 1980년대 미국 남부의 한 예술고등학교 연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세라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연기의 재능을 인정 받아 어렵게 이 학교에 입학했다. 연극반을 지도하는 킹슬리 선생은 세라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신뢰 연습'이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이 수업에서 세라는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10대 답게 학교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풋풋한 연애를 한다. 하지만 킹슬리 선생의 초청으로 영국의 연극단이 학교를 방문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파트는 30대가 된 세라의 친구 캐런이 작가가 된 친구 세라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그린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세라는 작가가 되어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책으로 썼는데 아마도 그 책의 내용이 첫 번째 파트인 것 같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서로를 보고 반가워 하면서도 내심 불편함을 느끼는데 그건 서로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함께 잘못을 저지른 남자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반면 여자들만 대가를 치른다는 것인데, 그에 대한 응징 내지는 처벌이 세 번째 파트에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이 <신뢰 연습>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물론 소설 속에 신뢰 수업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연극 훈련 방법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연극뿐 아니라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는 신뢰가 필요하고 그것을 연습하는 과정이 곧 성장인데, 남성 중심 사회 내에서 여성은 어릴 때부터 (친족 포함) 남성을 신뢰하지 않도록 교육 받고, 신뢰에 대한 책임은 (남성이 원인 제공자인 경우에도) 여성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란다. 남성 또한 여성을 신뢰하지 않도록 교육 받지만(꽃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여성을 신뢰한 남성이 치르는 대가와 남성을 신뢰한 여성이 치르는 대가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차이가 크다.


이 소설을 읽고 생각이 난 작품이 있는데 일본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가 2015년에 발표한 소설 <아침이 온다>이다. 이 소설에는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히카리라는 소녀가 나온다. 히카리는 아직 아이인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무서운데, 자식을 보호하기는커녕 네 잘못이니 네가 책임지라는 식으로 나오는 부모와 똑같이 관계를 가지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오히려 피해자처럼 구는) 남자친구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를, 섹스와 임신을 선택했을 때 치를 수도 있는 대가라면 누가 그것을 할까. 요즘의 비연애 비섹스 비출산 트렌드는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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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책 - 책은 삶이 되고 너는 내가 된다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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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주변에 그럴 사람이 없어서, 열심히 읽은 책의 내용이나 감상이 휘발되는 게 아까워서, 개인 블로그에 독후감 비슷한 리뷰를 남기기 시작한 게 17년 전의 일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취미 활동은 쉬거나 그만두어도 책 리뷰 쓰기만은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책을 계속해서 읽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이고 내가 쓰고 싶은 서평의 형태일까. 인문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의 서평집 <살아가는 책>을 읽으며 나도 이런 글을, 이런 서평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독자가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의 기본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 아니라 저자가 직접 경험했거나 인터뷰를 통해 취재한 내용을 더해 책 속의 현실과 우리(저자와 독자)가 속한 현실을 연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영국의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의 책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읽으며 이 책에 나오는 가사도우미 쥘리에트의 사연과 자신의 살림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 이성미 씨의 사연을 겹쳐 본다가사도우미와의 관계를 고용주와 고용인의 그것으로만 생각했다면, 그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그가 이 집에서 일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을 거쳤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중년, 여성, 가난, 육체 노동자 같은 일종의 태그들로 그를 납작하게 보고 얄팍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 <난파선과 구경꾼>을 읽으며 자신이 만난 친족 성폭력 피해자를 떠올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을 글로 써서 책으로 낼 만큼 강한 사람이었지만, "단말기에 카드를 '삽입'하라"는 일상적인 문장에도 얼굴이 파래질 만큼 피해를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글을, 그가 겪은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로 사연으로 책으로 교훈으로 소비하는 것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가. 스스로 '구경꾼'이라고 자조하면서도 계속해서 이런 책을 찾아 읽고(저자의 경우 '만들고') 또 그래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다가 출판인들과 함께 영국의 에든버러를 여행했을 때의 일화를 떠올리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장소는 실제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했던) 지형이나 지물뿐 아니라 그 장소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사건 등으로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들이 있는데, 인간은 왜 기억하고 싶은 건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잊으면서 잊고 싶은 건 계속해서 기억할까. 이런 식으로 어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읽은 책에서 그 답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질문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책 읽기, 글쓰기를 한 점이 멋지고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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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 황인찬의 7월 시의적절 7
황인찬 지음 / 난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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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은 2024년 7월의 '시의적절' 시리즈로 나온 황인찬 시인의 산문집이다. 산문만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고 산문도 있고 시도 있는데, 시인이 썼지만 시집은 아니라는 이유로 산문집이라고 썼다. 시의적절 시리즈는 매달 새로운 작가의 책이 나오는 콘셉트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해당하는 달의 특징을 부각하는 내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7월에 출간되는 것을 목표로 제작된 책이지만 7월 또는 여름의 정서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시, 시 쓰기,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내용이 많아서, 저자가 얼마나 시에 진심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생각한 것은, 저자는 시를 너무 사랑해서 시만 생각해도 마음이 벅차고, 시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고 무용하고 무력한 존재인 것 같고, 그래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넘어 죄의식마저 느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도 시를 쓰지 않는 삶은 상상할 수 없고("다시 태어나도 나는 아마 시를 쓰겠지. 시쓰기에 매번 절망하고 실망하면서도,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또 쓰고야 말겠지"), 기왕 쓰는 것 제대로 쓰고 싶어서, 오래된 시 새로운 시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읽고, 존경하는 시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는 것 같다. 저자 자신은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나보다 더 소중하고 다시 태어나도 헌신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렇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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