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머
모래 지음 / 고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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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오리와 그를 찾는 모험>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모래의 장편소설 <드리머>는 마치 한 편의 청춘 영화 같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철과 여정, 필립, 명우는 스무 살 동갑내기 친구 사이다. 이들은 여느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돈이 없는 대신 시간은 널널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필립의 옥탑방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거나 술을 마시며 남아 도는 시간을 죽인다. 문제의 여름 날에도 언제나처럼 기철과 여정, 명우가 필립의 집으로 모였다. 남들보다 늦게 도착한 명우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영양가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여정과 그런 여정의 헛소리를 별 대꾸도 없이 듣고 있는 기철과 필립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짜증이 난 상태로 부엌으로 간 명우는 술잔을 찾기 위해 싱크대 위 찬장을 열었다가 낡은 수첩 한 권을 발견한다. 부엌 찬장 안에서 수첩을 발견한 것도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특이한 만듦새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열어본 내지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그림 한 장이 있었다. 그 순간 필립이 다가와 수첩을 채갔고, 명우는 천만 원을 준대도 수첩을 안 판다는 필립의 말을 듣고 더욱 더 호기심을 느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첩을 가지겠다는 명우와 수첩을 내주지 않겠다는 필립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자, 보다 못한 기철이 수첩에 얽힌 비화를 들려준다. "그 수첩, 필립네 할머니 거였대. 가리교라고, 그 중국 사이비 종교 있잖아."...


이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주인공인 네 명의 청춘들이 수첩을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이다. 조폭 출신의 아버지를 둔 명우는 친구들 중에 가장 유복하고 좋은 대학에도 다니지만,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고 이런 게 인생이라면 계속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러나 수첩을 발견한 후로는 공포가 희열이 되고, 불안이 사라지고, 세상의 비밀을 다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급기야 명우는 수첩을 손에 넣기 위해 기철과 여정을 이용하고, 그렇게 수첩과 관련을 맺게 된 네 사람의 남은 인생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다른 하나는 수첩 자체에 얽힌 비밀이다. 소설 속 문제의 종교 '가리교'는 도교 연단술과 불교 밀교 수행, 지역 샤머니즘, 기독교 신앙까지 각종 다양한 종교적 레퍼런스를 섞어서 만든 잡탕 신흥 종교다. 교주인 렁왕웨이는 예지능력과 치유 능력, 텔레파시 등 갖가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면서 해외에서까지 수많은 신도들을 모았다. 초능력이니 신흥 종교니 하는 걸 누가 믿나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숟가락을 구부린다든가, 꿈으로 태아의 미래를 알 수 있다든가 하는 소리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종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문제는 초능력이나 신흥 종교 자체라기 보다는 그런 것들에 혹하는 인간들의 심리다. 이 소설은 바로 그 '혹하는' 심리를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로 보여준다. 자기 삶에 100퍼센트 만족하는 인간은 없고, 있다 한들 만족도를 200퍼센트, 300퍼센트로 늘리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방법을 모르니까 보통은 돈이나 권력을 탐하는데, 돈이나 권력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누가 혹하지 않을까. 작가가 소설에 불교와 힌두 사상의 신비주의를 많이 담았다고 하는데, (나처럼) 잘 몰라도 충분히 즐기며 읽을 수 있는 오컬트 스릴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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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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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잠잠했던 수면장애가 다시 생겼다. 보통은 오후 열한 시쯤 잠자리에 들어서 오전 일곱 시쯤 일어나는데, 요즘은 열두 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고 겨우 잠들었다 깨면 새벽 네 시다. 잠이 안 오면 나는 무조건 책을 읽는데,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다시 잠들 기미가 안 보일 때 읽기 좋았던 책이 김영하 작가의 신작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이다. 몽롱한 정신으로 한줄 한줄 읽다보면 순식간에 글 한 편을 다 읽고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매직...! (그만큼 내용이 흥미롭고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읽기 좋았다는 뜻이다.)


그동안 김영하 작가가 발표한 책들을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이 책만큼 작가님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 책은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발표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개인사라든가,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에 남몰래 안고 있었던 열등감이나 우울, 불안, 죽음에 대한 충동 등을 전에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젊을 때는 인생이 선불제인 줄 알고 지금의 고생이 나중의 영광으로 이어질 거라 믿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인생은 후불제이며 젊어서 함부로 쓴 건강과 시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는 고백 또한 가슴에 사무쳤다(ㅠㅠ).


책의 제목이 된 <단 한 번의 삶>이라는 문구는 (후기를 제외하고) 책의 맨 마지막에 실린 <어떤 위안>이라는 글에 등장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자신이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겁을 주었지만 그 '나중'은 오지 않았으며, 온다 한들 자신으로서는 삶을 돌이킬 수도 없고 돌이키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의 삶을 살고, 살면서 무수한 선택을 하며,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삶을 바꿀 수도 있지만 무수히 많은 다른 선택이 그 선택을 무용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런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나 후회로 지금을 흘려보내기 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낫다.


돌이켜 보면 나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런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나 후회를 종종 하는 편이고, 그때마다 여지 없이 수면장애가 발생했던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새벽에 읽은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책을 읽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할 때도 종종 있는데, 그런 삶은 아무리 부유하고 화려하다 해도 부럽지가 않다. 오히려 작가님이 책에 쓰신 대로 나이가 들면서 급속도로 나빠지는 시력 때문에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한스러울 뿐. 제목은 <'단 한 번'의 삶>이지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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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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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에 걸쳐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었다. 4년 전 처음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은 것인데 느낌이 사뭇 달랐다.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이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만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작가가 소설에서 표현한 제주 4.3 사건의 참혹한 진상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그 사이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시고, 이를 계기로 한강 작가님의 등단작부터 최근작까지 다시 읽어 보면서 한강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다시 만난' 지금은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이 사뭇 다르다.


소설가인 경하는 오랫동안 우울에 시달리며 차라리 죽기를 소망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에서 목공 일을 하는 친구 인선이 작업 도중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간다. 인선은 경하에게 당장 제주로 가서 집에 혼자 남은 새의 먹이를 챙겨 달라고 부탁하고, 다친 친구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경하는 그 길로 제주로 향한다. 공교롭게도 경하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중산간 깊은 골짜기에 따로 떨어져 있는 인선의 집까지 가는 길이 천리만리다.


소설은 우울증으로 인해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경하가 인선의 연락을 받고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가는 여정을 내 기억보다 훨씬 오랫동안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경하가 내내 머릿속에 담고 반복해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언젠가 경하가 꿈에서 본 장면으로,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심어져 있는 모습이다. 때마침 발 아래로 물이 차오르고 나무들이 바다에 쓸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경하는 무의식적으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느끼고 하나라도 더 뭍으로 옮기려고 하지만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경하는 인선에게 이 꿈에 대해 말했고, 인선은 꿈속의 장면을 영상으로 구현해 보자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 동안 경하는 인선과 친구가 된 과정과 인선이 들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 인선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인선의 집에 머물렀던 추억과 인선과 함께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구현하기로 했던 약속 등을 떠올린다. 고생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한 후에는 인선의 혼처럼 느껴지는 존재와 대화하며 인선의 어머니와 인선이 감내해야 했던 각자의 삶의 진상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다루지만, 사건을 사건 자체로 그리기 보다는 사건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더욱 중심적으로 그린다. 이는 <소년이 온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소년이 온다>는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건 자체를 입체적, 종합적으로 그리는 반면, 이 소설은 인선의 가족이 대대로 겪은 수난과 고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의 밀도는 낮은 대신 사건의 지속성과 비극성을 강조한다. 이는 실제로 4.3 사건이 1948년 한 해에 잠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학살이며, 최근까지도 정확한 진상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관점은, 4.3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4.3과 무관한) 경하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경하는 개인적으로 힘든 사건을 겪은 듯 보이는데 그 사건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사건이 남긴 고통을 혼자서 오래 앓기만 한다. 그러다 인선의 연락을 받고 제주에 가면서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고통을 혼자서 오래 앓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거칠게 표현하면) 나만 아픈 게 아니라 너도 아프고 우리 모두 아프다는 인식을 통해 아픔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소설이 아픔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는 것은, 인선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 경하가 병원 곳곳에 붙어 있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볼지 말지, 인선의 다친 손가락과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을 제대로 볼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는 장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상처를 보는 행위 자체가 상처를 치료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상처를 보지 않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선의 손가락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역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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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합 0장 위픽
한정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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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강자 또는 다수자 속성에 끌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 또는 소수자 속성에 끌리는 사람이다. 나는 압도적으로 후자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좋다. 모두가 더 높은 곳으로 향할 때 낮은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에게 끌린다. 밝은 자리에 훤히 드러나 있는 것만 보지 않고 그늘진 자리에 숨겨져 있는 것을 부러 찾아보는 사람을 동경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후자에 속하고, 한정현 작가 또한 그렇다.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쿄코와 쿄지>,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마고>, 산문집 <환승 인간> 등 이제까지 출간된 한정현 작가님의 책을 전부 읽었다. 읽으면서 느낀 건, 작가님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와 아주 많이 겹친다는 것. 그냥 역사와 정치, 사회와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정치에서 배제되어 왔으며 사회에서 차별 당하고 문학이라는 장(場)에서나 겨우 목소리를 내거나 형상화되는 존재들에게 관심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 이유로 한정현 작가님의 신간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하는 편이다. 이 책도 나오자마자 구입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판타지 소설인 걸 알고 '오오, 작가님 드디어 판타지 소설 쓰셨구나' 싶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던 건, <환승 인간>에서 어릴 때 판타지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고 쓰신 걸 읽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 '덕후'였던 사람이 판타지 소설을 쓰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아아, 이건 그냥 한정현이다. 하프엘프, 하프드래곤 같은 판타지 소설적인 용어가 나오기는 해도, 이것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국적, 민족,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고 혐오 당하는 존재들, 한정현 작가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약자, 소수자들을 가리킴을 모를 수가 없다. 덕분에 (나에게는 익숙지 않은) 판타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느낌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사랑과 연합 '0장'>이라는 제목에 예고되어 있듯이 이 소설은 '대서사시의 시작점'으로서 앞으로 쭉 후속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아마도). 나야 뭐 한정현 작가님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으니까 후속편(들)도 계속 읽어가겠지.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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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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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두려움이 컸다. 주디스 버틀러, 한나 아렌트, 존 버거 등 많은 학자, 사상가들이 이 책을 극찬했다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책도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펼친 이 책. 본격적인 독서에 앞서 저자 소개글부터 찬찬히 읽어 봤다.


발터 벤야민(1892-1940). 독일 출신 유대계 언어철학자, 문예학자, 비평가, 번역가. 1892년 7월 15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베를린대학, 뮌헨대학,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철학, 독일 문학사 및 예술사, 심리학 공부. 졸업 후 재야에서 문예비평가이자 번역가로 활동. 나치의 박해에 시달리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나치의 힘이 파리에도 미치자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세관에 붙잡히면서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슬프고 안타깝다. 만약 그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졌을까.


<고독의 이야기들>은 발터 벤야민이 '노벨레'의 형식을 빌려 집필한 글들과 문학적 테마가 담긴 글들을 묶은 문학작품집이다. 노벨레란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을 의미한다. 읽으면서 같은 독일문화권 작가인 카프카, 재독 소설가 배수아의 글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노벨레의 원조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라고 한다. 괴테의 소설 <노벨레>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새로운'을 의미했던 이 단어가 현재의 의미로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대체로 길이가 짧고,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각 글이 시작되는 책장마다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이 실려 있어 그림을 보고 이어질 글의 내용을 상상해 보거나 글을 읽으면서 그림과의 관계를 유추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글의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지만 내용은 의외로 현실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이기까지 하다. 가령 <황후의 아침>이라는 글을 여는 이런 문장. "건강한 사람들도 가끔은 문필가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삶이 주권자라는 것을, 분립 불가능하고 심층적인,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주권자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33쪽)


<두 번째 자아>라는 글의 이런 대목. "당신은 자기 비난으로 저녁을 허비했습니다, 당신은 열등감을 안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가 억압돼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느끼는 충동을 따르지 못하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충동은 두 번째 자아가 당신의 삶으로 통하는 문에 달린 손잡이에 가하는 압력입니다, 그 문이 왜 그렇게 꽉 닫혀 있는지, 왜 억압이 존재하는지, 당신 자신이 왜 충동을 따르지 않고 있는지 당신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43쪽) 이 밖에도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아서 앞으로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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