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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스트넛맨
쇠렌 스바이스트루프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스트넛맨>을 재미있게 봤다. 초반에는 배우들도 낯설고 내용이 복잡해(보여)서 몰입을 잘 못했는데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어서 세 번 정주행 했다. 원작 소설이 있길래 구입해서 읽었는데 역시 재미있다. 배우들의 대사나 연기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인물들의 심층적인 심리를 알 수 있어 좋았고, 소설을 영상화 하는 과정에서 수정 또는 삭제된 장면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이 맛에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있으면 가능한 한 구해서 읽는 편이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주택가에서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건에 투입된 형사는 코펜하겐 경찰 살인수사과의 나이아 툴린과 유로폴에서 좌천되어 살인수사과에 임시 발령된 지 얼마 안 된 마르크 헤스. 이들은 현장에서 절단된 시체와 시체 뒤쪽에 매달아 놓은 밤 인형(chestnut man) 외에 눈에 띄는 특징을 찾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시 여성의 절단된 시체가 발견되고 현장으로 달려간 툴린과 헤스는 다시 한 번 밤 인형을 마주친다. 밤 인형이 중요한 단서임을 짐작한 두 사람은 과학수사대에 감식을 의뢰하고, 그 결과 각각의 밤 인형에서 일 년 전 실종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회부 장관 로사 하르퉁의 딸 크리스티네의 지문을 발견한다.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사건을 수사하는 툴린과 헤스의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실종된 아이 크리스티네의 부모인 로사와 스텐의 서사다. 툴린과 헤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처음 만났고, 툴린은 부서 이동을, 헤스는 유로폴 복귀를 원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사건 해결에 대한 열의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피해자가 발생하고, 피해자들이 전부 (남편이 있든 없든 간에) 아이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엄마들이라는 사실이,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양육에 헌신하고 있지 못하는 싱글맘 툴린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비슷한 사연이 있는 헤스의 내면에도 파문을 일으킨다.
로사와 스텐은 각자 사회부 장관과 건축가로서의 업무에 복귀해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딸의 실종과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다. 이런 와중에 잇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단서에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크리스티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일 년 전에 이미 크리스티네를 살해한 범인을 지목해 구속시킨 경찰은 크리스티네의 생존 가능성을 부정하고, 로사와 스텐은 시체도 찾지 못한 딸을 마음에 묻어야 할지 말지 고민한다.
드라마 <더 체스트넛맨>을 재미있게 본 이유 중 하나는 범인을 찾는 과정 자체도 흥미롭지만 사건을 둘러싼 네 사람(툴린, 헤스, 로사, 스텐)의 입장이나 심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툴린과 헤스에게 이 사건은 형사라는 직업인로서 해결해야 할 업무에 불과했지만, 점차 개인적인 감정(죄책감)이 개입하면서 나중에는 다음 커리어를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잘 처리하고 싶은 과제가 된다. 로사와 스텐은 사회적으로 어서 사적인 문제는 잊고 공적인 임무로 복귀하라는 압박을 받고 그들 또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점점 자신의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나 결국에는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인다.
범인의 경우 처음 살인을 한 연령과 살해 방법의 잔인한 정도 등을 참작했을 때 사이코패스로 볼 여지가 크지만, 살해 대상을 매번 여성으로, 그것도 자녀가 있는 여성으로 택한 점을 생각하면 여성혐오자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범인으로서는 양육을 제대로 못한 어머니를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왜 양육 책임은 어머니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지, 왜 부재하는 아버지나 폭력적인 아버지는 처벌하지 않는지 - 애초에 자기가 뭔데 남을 처벌할 자격이 된다고 믿는지(who do you think you are?) - 이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