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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평점 :
작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있는데, <암컷들>의 저자 루시 쿡의 '학계 탈출 사연'이 그와 비슷하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동물학 석사 학위를 받은 저자의 스승은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다. 저자는 동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 학문과 자신의 스승이 동물 암컷의 실상을 무시하고 나아가서는 여성인 자신을 부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불안의 근원은 성(性)이었다. 이 분야에서 여자는 딱 한 가지를 뜻했으니까. 패배자.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다. 착취의 진화적 근거는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사실에 있다." 대학 시절 우리를 가르쳤던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의 바이블인 <이기적 유전자>에 쓴 말이다. (17쪽)
결국 저자는 학계에서 나와 직접 마다가스카르섬과 캘리포니아의 설산, 하와이나 캐나다의 바다 등을 모험하면서 직접 동물들을 조사하고 탐구하고, (낡아빠진 과거의 진화생물학이 아닌) 새로운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만났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기존의 생물학이 과거의 성차별적 신화의 영향을 받아 사실을 왜곡하는 면이 많고, 특히 현실에서 인간 여성이 차별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 암컷을 바라보는 방식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존 생물학은 성세포의 차이가 성 불평등의 확고한 생물학적 토대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정자를 가진 남성은 작고 양이 많은 정자의 특성에 따라 성적으로 방종한 특성을 지니는 반면, 난자를 가진 여성은 크기가 크고 수가 제한된 난자의 특성에 따라 까다롭고 정숙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정설이자 상식이지만, 저자가 직접 자연 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바는 전혀 달랐다. 난자를 가진 동물 암컷의 상당수가 육체적으로 수컷을 능가하고, 성적으로 방종하고, 성격도 능동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동물 암컷들의 놀라운 실상을 소개한다. 두더지 암컷은 남성호르몬이 넘치고 음경이 발달해 수컷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점박이하이에나 암컷도 수컷과 동일한 음경이 있으며, 이들은 동물의 생식기로 성을 구분할 수 있다는 통념의 반증이다. 성별이 평생 고정되어 있다는 것도 편견이다. 올챙이는 모두 XX로 태어나 암컷으로 발전하지만, 연못에서 나와 개구리가 되면 절반이 난소가 정소로 변형되며 XX수컷이 된다. 암컷의 특성과 수컷의 특성이 한 몸에 있는 암수한몸, 교미 전후로 상대를 잡아먹는 팜파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레즈비언' 도마뱀은 수컷의 도움 없이 복제만으로 번식한다.
다윈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남성에게 유리하고 여성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자연 세계를 관찰한 것은 뿌리 깊은 남성 우월주의 탓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왜곡되고 편향된 가설이 부인하기 힘든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남성과 여성의 생래적인 특질로 인식되면서, 강간, 스토킹 등 여성 대상 범죄를 합리화하고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차별 및 혐오를 당연시하는 관습 및 문화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생물학 연구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과 편견을 폭로하는 내용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동물 연구 그 자체를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개인적으로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수컷들이 어떤 기발한 행동을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흥미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암컷의 관심을 끌려고 암컷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변장하는 담수어 구피의 이야기가 재밌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욕과 식욕은 연관되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