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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평점 :

존 쿳시.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이른바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인데도 의외로 술술 읽혀서 놀랐고, 다른 한 번은 문장이 쉽고 내용이 자극적인 소설 대부분이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사유나 통찰이 얕은 데 반해 이 소설은 문장이 쉽고 내용이 자극적인데도 문제의식이 뚜렷하고 사유와 통찰이 깊어서 놀랐다. 존 쿳시가 한 작가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사상 최초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하고(1983년, 1999년),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은 한 중년 남성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52세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두 번 이혼하고 현재는 독신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는 그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제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이 알려지면서 대학은 물론 학계에서도 문제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딸 루시의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기로 한다. 처음에 그는 딸의 집에서 지내며 그동안 구상만 했던 오페라 극본을 완성해 화려하게 재기할 계획을 세우는데, 딸의 농장에 강도가 침입해 그의 차를 훔치고 딸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삶은 점점 그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루리 자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소설에 그려진 루리라는 인간은 결코 좋은 인간으로 보기 어렵다. 소설 초반에 그는 성매매를 일삼고, 딸보다도 어린 제자에게 잠자리를 강요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죄를 가린다.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키고 딸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루시의 성 정체성(레즈비언)을 못마땅해하고, 루시와 가깝게 지내는 여성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그들 중 한 명과 잠자리를 가진다. 루리는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착취하는 여성 혐오자에 가깝다.
루리가 이런 인간이라서 처음에는 소설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소설을 계속 읽으면서 루리보다 더 이상한 인간을 발견했다. 바로 루시다. 루리가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 루시는 이십 대 중반에 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해 혼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다. 루리는 젊은 여성인 루시가 혼자서 시골에 살면서 농장을 경영한다는 게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일찍 노후의 삶을 택한 것 같기도 해서 불만스럽지만, 일단은 딸의 인생이므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문제의 강도&강간 사건 이후 아버지로서 더는 딸의 선택을 방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루리는 더 나쁜 일을 당하기 전에 도시로 돌아가자고 루시를 설득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이번 만은 루리가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내 생각과 달리 루시는 농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한다(심지어 더욱 문제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생략한다). 대체 왜 그러느냐는 루리의 물음에 루시는 여기서 도망치면 자신은 영원히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어차피 다른 도시나 나라로 가봤자 여자의 삶은 거기서 거기라는 의미에선 공감하지만, 그래도 루시가 사는 동네는 치안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 거 아닌지... 거기는 남자도 살기 힘든 동네잖아요...
결과적으로 루리는 루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오페라 극본 작업에도 몰두하지 못하고 안락사를 앞둔 개들을 돌보며 지내는데, 이게 참... 인간의 본질 같다고 느꼈다. 루리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이로 취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존재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전에는 작품이든 후손이든 뭔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죄를 분명하게 인식한 이후에는 죄 많은 내가 뭔가를 만든다는 게 또 다른 죄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을 앞둔 개의 등이나 만지고 있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