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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평점 :

언젠가는 읽을 거라고 마음만 먹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읽지 않는 책들이 있다. 그중 한 권이 나에게는 <모비 딕>이었다.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완독이 힘들지 않았다. 일단 초반부가 (좋은 의미로) 예상 밖이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그 유명한) '이슈메일'이다. 몇 년 간 상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슈메일은 바다에 대한 동경을 잊지 못하고 이번에는 포경선에서 일해 보기로 한다. 포경선이 출항하는 항구로 간 이슈메일은 그곳에서 '퀴퀘그'를 룸메이트로 만나 며칠을 같은 여관, 같은 방, 같은 침대 위(!)에서 보내고 포경선 '피쿼드' 호에 승선한다.
초반부에 이슈메일과 퀴퀘드그의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하게 펼쳐져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는데, 아쉽게도(ㅠㅠ) 두 사람이 피쿼드 호에 승선한 이후로는 뱃사람들 이야기의 비중이 훨씬 더 높다. 피쿼드 호의 선장은 '에이해브'인데, 포경선에 타는 대부분의 선장과 선원들이 고래 잡이로 벌게 될 돈에 눈이 멀어 있는 것과 달리 에이해브는 몇 해 전 자신의 다리를 잃게 한 흰 향유고래 '모비딕'을 다시 만나 복수할 생각뿐이다. 모비딕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위험을 불사하는 에이해브 선장과, 그런 그를 측은하게 여기는 선원들과 불만스럽게 여기는 선원들 간의 갈등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모비 딕>이 출간 당시에는 문학이 아닌 해양학 책으로 분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 이 책에는 고래의 종류, 고래의 특징, 고래의 생태와 활동 등 고래에 대한 다채로운 지식은 물론이고, 포경업의 역사, 포경의 기술, 잡은 고래의 용도 등 당대의 문화와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백과사전식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내용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고래뿐 아니라 19세기 포경업 전반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선원들이 배에서 어떻게 생활했고 노동 환경은 어땠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유익하다.
내가 이 책에서 특별하다고 느낀 점은 내용보다도 서술 방식이다. 이 책에는 현대의 독자들이 보기에 불편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질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동물을 존엄한 생명체가 아닌 정복 대상으로 보거나,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듯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대목들이 그렇다. 그런 대목이 나올 때마다 옛날 책이니까 어쩔 수 없다,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는데, 예상 밖의 결말과 역자 후기를 읽고 이 책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 즉 반어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고래 잡이를 통해 돈이든 야망이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인간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고래가 상징하는 생명, 자연에 대한 정복, 착취가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거라는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선장으로서의 권위와 책임을 개인적 복수에 사용하는 에이해브 선장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스러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모습은 역으로 독자들이 어떻게 살아야(살지 않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