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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평점 :
오십 대 여성인 '나'는 남편 '석구'가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자 동료를 스토킹해 고발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과 함께 운영해온 학원 문을 닫게 되고 남편과는 별거에 들어간다. 둘 사이에 하나 있는 딸 해준은 어릴 때부터 아빠와 좀 더 가까웠기 때문인지 문제를 일으킨 아빠 편을 들면서 엄마를 원망한다. 졸지에 직장도 잃고 집도 잃고 가족도 잃은 '나'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고 불면증을 겪다가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약 처방과 상담만으로는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일기쓰기교실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린다.
이주혜의 두 번째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한 여성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글쓰기를 만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를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일기쓰기교실에 등록한 '나'는 '림자'로 불리는 선생님의 지도 하에 '마웨', '고슴', '도치'와 정기적으로 만나서 서로의 일기를 공유한다. 일기의 사전적 정의는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기록"이지만, '나'의 일기는 그날그날 겪은 일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기라기 보다는 자서전, 회고록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일기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현재의 일은 과거의 일의 결과이며, 과거의 일과 헤어지지 않으면 현재의 일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나'의 일기는 '시옷'이라는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1970년대생인 '시옷'은 전직 공무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의 외동딸로 할머니의 사랑까지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따금 어른들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개)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부모님이나 할머니가 '시옷'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남자아이처럼 보이는 외모 때문에 자신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누가 봐도 예쁜 여자아이인 '애니'를 내심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애니를 질투한 적은 없고, 오해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1980년이 되고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회복될 기미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면서, 시옷의 삶에도 점점 그늘이 드리워진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모르는 남자가 집으로 와서는 방 하나를 차지한다. 잘 웃고 늘 친절했던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고 짜증이 늘어난다. 시옷의 집은 대대로 동네에서 잘 사는 축에 속했는데, 이제는 시옷이 가입한 어린이 합창단의 단복을 살 돈도 없다. 결국에는 아버지가 돌아오지만 그 집에선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고, 예전에는 못산다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좋은 면이 있다고 했던가. 예전에 살던 집과 다르게 어둡고 냄새 나고 다른 가족과 공유하는 집에 살게 되었지만, 그 집에서 시옷은 평생 기억하게 될 친구 '윤수'를 만난다. 시옷보다 열 살 어린 남동생도 태어나 가족에게 기쁨을 준다. 시옷의 일기는 아쉽게도 이쯤에서 끝이 나지만, '나'의 이야기를 통해 시옷의 미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시옷은 아마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가 학생 운동을 할 것이고, 노선의 차이로 동지들과 불화를 겪을 것이다. 동아리 후배와 결혼해 딸 하나를 얻겠지만, 그 딸과도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갈등할 것이다.
시옷의 일기에서도 '나'의 이야기에서도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다. 원하는 건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어렵게 손에 넣은 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건 아이일 때나 어른이 되었을 때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이일 때는 어려서 모르고 몰라서 몰랐던 것들을 어른이 되면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생겨서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상대의 마음이나 사람들의 관계나 전후의 사정 같은 것들. 그렇기 때문에 '나'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걸 잃어버려도 종국에는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 경험한 것처럼 상상도 못했던 좋은 걸 얻게 되거나 새로운 걸 배우기라도 할 것이다. 그러니 쓰자. 계속 살자.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22쪽)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