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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어릴 때는 생일이나 입학식, 졸업식 같은 이벤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난 생일로부터 한 해가 지났으니까 다시 생일이 오는 건 당연하고, 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졸업을 하고, 졸업을 했으니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 또한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쯤이었을까.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에 입학한 나와 달리 재수를 하거나 취업을 택한 친구들을 볼 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게 줄 알았는데 그로부터 몇 년을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게 되었을 때에는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이벤트가 더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하기 싫었던 것 같다.
이희영의 장편소설 <이벤트>를 읽으면서 새삼 그 시절을 떠올린 건, 인생의 여러 문턱을 쉽게 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주인공 '슬목'의 모습으로부터 그 때의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서른두 살의 직장인 '슬목'은 남들이 부러워 하는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더 이상 회사 생활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퇴사를 결정했다. 슬목의 새 직장은 지하철은커녕 버스도 드물게 오는 숲속에 위치한 '담야'라는 한옥 호텔로, 처음에 슬목은 워라밸이 지켜지고 스트레스가 적다는 점에서 만족했으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갈수록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기업에 비하면 보수도 적고 업무 내용도 아리송한 데다가, 호텔에 숙박객을 유치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잘 안풀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너가 취미 삼아 하는 일이라고 해도, 담야는 숙박하는 손님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없다시피 해 직원들이 불안해 할 정도다. 그래서 슬목은 맞춤형 이벤트를 원하는 고객을 초대해 무료로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고객의 사연을 홍보 컨텐츠로 활용하자는 의견을 냈고, 어렵지 않게 통과가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었던 슬목은 열심히 이벤트를 준비했고, 준비한 대로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고객을 초대해도 예상대로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고, 그 무렵 슬목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다. 갑자기 원인도 이유도 모를 혼수상태에 빠지고, 눈을 떴을 때의 '나'는 그 전의 '나'가 아닌 것이다.
알고 보니 슬목의 몸에는 서른두 살 현재의 자아와 스무 살 과거의 자아가 공존하는 상태. 더 자세히 말하면, 낮에는 서른두 살 현재의 자아로서 직장에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다 집에 돌아와 잠이 들면 과거의 자아가 깨어나는 시스템이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덕분에 슬목은 서른두 살 '현재의 나'가 아닌 스무 살 '과거의 나'의 시선으로 지금의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현재의 나'가 보기에 자신은 회사를 그만두고 숲속에 있는 호텔에 취직해 그마저도 주어진 일을 제대로 못 해내는 한심한 인간이지만, '과거의 나'의 시선으로 보면 지금의 자신은 어찌 되었든 대학을 졸업했고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있고 비바람을 피할 집도 있는 어엿한 어른이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가진 것이 전혀 없었던 재수생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미래다.
'현재의 나'로서 '과거의 나'를 다시 보기도 한다. 슬목은 자신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잘못 되었다고 믿었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못채우고 나왔고,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으며, 대학을 재수하고 대기업을 퇴사하고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가족도 못 이뤘다고 생각하며 자책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막상 '과거의 나'와 한 집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되고 보니, 매정한 말을 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 하나라도 더 사주고 싶었다. 남을 대하듯 나를 대하면 이렇게 다정해질 수 있는데 그동안 왜 못 했을까. 내가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건, 나를 가장 사랑해줘야 했던 건, 사실 나 아닐까.
"막 스무 살이 된 그때에도,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콤플렉스 덩어리다. 나만 대입에 실패한 것도, 나만 회사를 그만둔 것도 아닌데, 세상에서 내가 가장 못난 사람으로만 느껴졌으니까. 부모님의 괜찮다는 말조차 고깝게 들을 만큼 나는 몸이 아닌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었다. 만약 스무 살의 조슬목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스스로를 위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터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존재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했겠지." (214쪽)
소설의 제목인 영어 단어 '이벤트(event)'에는 뭔가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상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도 있다. 열심히 준비한 '행사'도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어그러질 수 있기 마련인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 때문에 인생에 제동이 걸리는 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입학 다음에 졸업, 연애 다음에 결혼, 이런 식으로 인생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고 믿는 편이 착각이며 오만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해 하는 일뿐이다. 그러니 무사히 한 해를 지나 다음 생일을 맞이하는 건 너무나 특별한 사건이고, 이를 위해 매일 새로운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건 더없이 중요한 이벤트다.
손님들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이벤트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슬목의 이야기가 나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부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