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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황제
오션 브엉 지음, 김지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1월
평점 :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해 조금은 안다.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오션 브엉의 장편 소설 <기쁨의 황제>는 주인공인 열아홉 살 소년 하이가 죽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철교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죽은 지인이 있는 나로서는 이 장면을 읽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하이는 우연히 그 광경을 본 80대 노인 그라지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라지나의 집에 얹혀 살면서 그대로 삶을 마감했다면 절대로 경험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하이의 어머니는 베트남 이민자로 네일숍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웠다. 삶에 낙이 없어 약물에 의존하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이는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지만 주류 사회의 벽을 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하이는 어머니에게는 보스턴에 있는 의대에 합격해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조용히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결심을 실행하려고 한 순간에 그라지나의 눈에 띄었고,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해 다리에서 내려왔다. 알고보니 그라지나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독거 노인이었고,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은 데다가 어차피 갈 곳도 없는 하이는 그녀의 집에서 지내며 손발이 되어주기로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며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하이는 집 근처 레스토랑 '홈마켓'에서 일하며 돈을 번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장은 아니지만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으며 안정적인 보수를 받는 직업에 종사하며 하이는 더없는 풍요로움을 느낀다. 배경이나 출신은 다르지만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공통의 화제를 가지게 된 동료들에게 깊은 소속감도 느낀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하루 빨리 탈출해서 성공해야 하는 곳 또는 탈출만 해도 성공인 곳으로 여겼던 자신의 집, 고향을 긍정하게 된다. 세상은 그와 그의 동료들을 패배자로 규정할지 몰라도, 하이에게 지금의 삶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된다.
이 소설은 미국이 배경이고 베트남계 미국인이 주인공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살아온 한국인인 나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많았는데,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특수한 이야기인 동시에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 또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 적당히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조차도 힘든 현실에 대한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더 아프고 힘들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은 전세계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프라 윈프리, 리베카 솔닛 같은 명사, 작가들이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낸 것에 수긍이 가고, 뉴욕타임스,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 이해가 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 오션 브엉은 김혜순, 이상, 한강, 차학경 등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언급하는데, 일상을 비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감각이나 소설보다는 시를 닮은 표현들이 어쩐지 그가 언급한 문인들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