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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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을 생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아니 용서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자가 많은 세상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냥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용서가 어디 그리 쉽게 되는 것인가? 조금 시일이 흘렀지만 영화 '밀양'을 보라.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가? 자책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분노에 빠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을 겪고 겪은 다음에 살인자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들고, 그 살인자를 만나 용서하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이미 살인자는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에게? 신에게? 이런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피해자의 엄마.

 

이 영화 이청준이 쓴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영화였는데... 이 책은 이런 용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용서가 무엇인지 살핀 다음 용서의 종류를 살피는데... 용서의 종류에는 자기 용서, 대인 관계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가 있다고 한다. 용어를 보면 대략 어떤 용서인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개인적 용서도 힘든데, 대인 관계적 용서에서 정치적, 형이상학적 용서는 더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용서에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기억'이 작동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246=247쪽 참조)

 

그런데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서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또한 용서를 하면 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용서는 재반복 될 뿐이라는 것.

 

기억하지 않으려 한 용서들이 폭력을 계속 부르고, 학살을 계속 불러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진실도 권력을 쥔 자들이 왜곡하거나 은폐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용서에도 전제가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 용서가 있지만, 그런 용서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용서일까? 나를 대리해서 신이 용서를 할까? 영화 '밀양'이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용서는 당사자가 우선 되어야 한다. 피해자 본인이 아니라면 피해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피해를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용서여야 한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른 존재들을 용서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를 또다른 피해로 몰아가는 것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4장 종교와 용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가면 가해자가 뻔뻔해 질 수 있다. 왜 용서를 안 해주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용서를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교환일 뿐이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댓가를 바라는, 즉 빚을 주고 받는 채무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용서가 아니다.

 

이만큼 용서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추구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도 없다. 조건적인 용서는 이미 주고 받는 무언가가 있기에 용서라고 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적 용서'를 하나의 기준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기준조차 없으면 안 된다. 무조건적 용서를 기준으로, 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해-피해자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좀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용서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정으로서의 용서에는 가해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반성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가해를 감추는 장막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수동태로서의 용서. 우리 문법으로 하면 피동형으로서의 용서라고 해야 하나. 성경에는 수동채로 당신은 용서받았다고 나온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가 아니라 당신은 용서받았다다. 용서받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실하게 다가가야 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용서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태도 변화로 피해자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일본과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려고 하는 일본의 자세때문이다. 일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이 한 행위를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핸 장치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 우리나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합니다'가 아니라 '일본,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용서는 우선 피해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가해자에게서 오지 않는 용서는 변화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는, 과거를 망각한 용서일 뿐이라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용서를 피해자에게 구하기 전에 자신들이 진실을 밝히고 성찰하고 참회하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란 말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조건적 용서이겠지만, 무조건적 용서가 그냥 덮어놓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용서는 어렵다.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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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조너선 마크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이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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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인종에 따라서 인간의 특성이 다르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인종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 나름의 합리성을 획득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인종에 따라서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서 차별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인종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피부색? 피부색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또 눈동자 색깔로 분류하는 것은? 아니면 머리카락의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아마도 머리 색깔로 사람을 분류해 흑발, 은발, 금발, 갈발(갈색머리), 홍발(빨간머리) 등으로 구분하고, 경제력과 정치력이 우세한 사람들을 주요 인종으로 하고, 나머지는 열등하다고 하면 그것을 따르겠는가? 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종구분이니, 머리 색깔에 따라서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옳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이 책은 여러 사례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다. 거기다 인종주의자들은 아직도 과학계에서 퇴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창조론자들이 과학계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한 것에 비하면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지금 세계 곳곳을 보라. 특히 우리가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자. 미국은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도 한참 동안 인종에 따라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그 차별이 1960년대에 들어서 형식적으로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은 일어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뿌리가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이 책은 인종주의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양한 사람들을 인종이라는 틀로 구별하고 틀지우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은 공식적인 과학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과학자가 접근하기 힘들다. 인문학을 통해서만 역사적, 경험적,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진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간의 변이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인종의 특징과 연결되는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루어졌다. 103쪽.

 

이 말에 이어서 그는 '인간의 차이를 인종과 차별화해오면서 우리가 갖게 된 긍정적인 지식과 양자 간의 상호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1. 인간의 집단은 주로 문화적으로 구별된다.

2. 집단들 안에서의 변이가 집단 간 변이보다 훨씬 더 크다

3. 인간의 생물학적 변이는 분리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4. 인구 집단은 생물학적으로 실존하지만, 인종은 그렇지 않다

5. 인간 집단에는 만들어진 구성요소도 있다

6. 인구 집단을 무리로 묶는 것은 임의적이다

7.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8. 인종 분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자연적인 생물학적 패턴을 반영하지 않는다

9. 인간은 유전자 변이가 거의 없다

10. 인종 문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이지 생물학적이지 않다 104-114쪽.

 

이 점을 명심하면, 우리는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 집단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인종 이론이 예측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과학이 인간 다양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학자의 전문 지식을 대체하는 데 사용할 때, 과학은 인종주의적이 된다. 인간의 변이를 연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자연적 패턴을 연구하는 것이다. 118쪽.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아니 부끄러워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창조론자들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듯이 인종주의자들도 그렇게 되는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자.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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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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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의 50년 전에 나온 이 책이 (1973-1974년에 쓰여졌다고 하니)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에. 이렇게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여기에 이 책은 출발-일-귀향이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민 노동자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민 노동자들이 귀향을 하더라도 그곳에서 계속 살기는 힘들어진다는 사실. 결국 그는 다시 이민 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음에.

 

유럽을 배경으로,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유고슬리비아,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이,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로 와 노동자로 지내게 되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담은 존 버거의 책(사진-장 모르)이다. 그의 책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충격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이는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몇몇 구절들을 통해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의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 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 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한 이민 노동자들은 불사(不死)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 - 일하는 것 - 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64쪽)

 

섬뜩하고도 슬픈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일들이 과연 먼 과거의 일인가? 지금 우리나라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노동력이라는 틀에 맞춰진 존재 아닌가. 그들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지는가. 그냥 추방해 버리면 그뿐이지 않은가. 지금도 그런데... 살기 위해서 온 그들에게 해준 것은 단지 그들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뿐. 나머지는 아예 모르쇠를 하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민 노동자(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다. 이게 신자유주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다.

 

이런 이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가 없다. 조직화된 저항은 곧 추방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은 대부분 이주해 간 나라에 순응한다. 자신들의 상태가 결코 '비정상'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비정상'임을 깨닫게 된다.

 

'정상적인' 것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행동, 즉 '비정상적'이며 '극단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을 통해서이다. 그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해서 그 정상성이 박탈되어 버리고 나면,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느낌은 그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그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체로 확장되어 나간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가까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정상적인' 것들이 나 자신의 얼마만큼을 부정하거나 속박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104쪽)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것이 바로 세계화된 자본이 추구하는 것이다.

 

'각국 정부나 다국적 기업들은 지구 전체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정책을 짜고 있으며, 일시적인 이민 노동자로부터 얻어내는 자본주의의 이득은 상당한 것이다.' (111쪽)

 

이런 자본의 간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자신이 있는 곳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런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주어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데... 이런 상상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틈을 발견해 내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게 된다.

 

'사람의 시각의 지평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든간에, 그의 상상력은 경계선을 모르는 법이다. 자기 마을 밖으로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한 남자라도… 저 멀리 별나라까지 닿을 수 있는 상상의 세계 전부를 창조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도 사람은 세계의 다른 쪽 끝을 꿰뚫어볼 수가 있다.' (135쪽)

 

그럼에도 자기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옮기려고 해도 어렵다. 특히 이민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으로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기가 또 요청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만큼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삶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이들은 '비정상'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노조를 결성하기도 하고, 파업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개인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지만 이민 노동자 전체로 보면 '정상'적인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비정상'이었음을 알려주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미래가 있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서 어떤 헌납을 한다는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의 지속성만이 아니라(그 헌납이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포함될 수도 있다), 자기가 믿고 있는 가치의 지속성을 말한다. 그 희생은 미래에 인정을 받고 용납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지금 제공되는 것이다. 그 희생이란, 사실은 미래에까지 그 지속성이 확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전통을 향해서 이루어진다. 그 전통의 내용은 신의 뜻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 가족의 재산에 대한 희망, 국가의 운명, 혁명의 필요성 등 여러가지로 변한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모두가 그 속에서 재확인을 구하고 있다.' (187쪽)

 

이민 노동자에게는 이주해 간 나라에서는 이런 지속감을 느끼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이주 노동자들은 지속감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가족에게서 찾는다. 가족들의 현재 행복을 위해서 그들은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하는 것은 미래라기보다는 현재의 가족들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서 자신과 가족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믿음을 지니려는 마음도 있기에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외국으로 노동자들을 보냈지만, 이제는 외국에서 노동자들이 들어온다. 그들이 이 책에 나온 것과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책은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오레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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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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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쓰기다. 쓰기는 읽기다. 읽으면서 머리 속에 글을 쓴다. 그냥 글자만 따라가지는 않는다. 문자를 읽으면서 그 문자에 속한 또는 문자가 포괄하고 있는, 문자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레 쓰인다.

 

마찬가지로 쓰기는 읽기다. 쓰면서 읽게 된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쓰기와 읽기는 같은 행위가 된다. 그런데 왜 읽기와 쓰기를 할까? 그것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다. 자신을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을 밖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이 책에 있다.

 

'독서의 목적은 생각하는 긴장과 외로움, 쾌락을 얻기 위함이다. 독서는 이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121쪽)

 

혼자만 알고 있으면 읽기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냥 읽는 것이다. 이때 읽기가 쓰기라고 했으니 어디에 쓰는가 하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쓴다. 자신의 몸에 마음에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문자를 통해 남들에게 알리지 않는 쓰기다.

 

이것도 의미가 있지만 읽기가 남들에게 알려지는 쓰기로 전환이 되면 더 많은 파장을 만들 수 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읽기가 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읽기로, 다시 다른 사람의 쓰기로 간다. 이렇게 읽기와 쓰기가 연결되면서 끊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읽기와 쓰기에서 나온다. 무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행할 뿐이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178쪽)

 

바로 읽기/쓰기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냥 행한다. 그것이 잘못된 건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는 권력에서 비롯된다.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지만 무지로 굳어지게 되기도 한다.

 

무지로 굳어진 권력은 자신들의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행동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은 이런 당연한 세계에 틈을 내고 있다.

 

정희진의 읽기가 쓰기로 전환되어 우리의 읽기를 촉발하고 다시 우리에게 쓰도록 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지의 세계, 당연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 구절을 보자.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 사회는 약자가 말만 해도 폭력으로 간주한다.' (165쪽)

 

결국 읽기가 쓰기로 나아가지 않으면, 익숙함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잃는다. 왜 우리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타인이 되어야 할까?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탈전통)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원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169쪽)

 

바로 우리가 홀로 살아가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쓰기는 공동체의 삶에, 자신의 지식을 재배치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나를 알기 위해서 읽는다'로 바꿀 수가 있다. 우리는 나를 알기 위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알기 위해 읽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해줄 책만이 아니라 자신과 정반대에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책도 읽어야 한다.

 

아니, 좋은 읽기는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내가 안주하고 있던 세상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을 흔들지 못하는 읽기는 나를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정희진의 이 책을 읽으며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 역시 무지와 당연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그냥 내게 주어졌기 때문에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좋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이 읽은 책을 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이다. 수많은 책이 나오고, 많은 생각들을 만나게 되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여성에 관한 글들이 많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인용한다.

 

'여성 대상 폭력의 특징은 가장 죄질이 나븐 사례가 법으로는 가장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186쪽)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모욕, 차별, 생명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다.' (218쪽)

 

'여성 살해는 일상이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225쪽)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아버지)들 간의 자존심, 자원, 욕망을 둘러싼 갈등을 여성의 몸에 실천하는 체계화된 사회 시스템이다. (227쪽)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살해들이 문제가 되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 그와 더불어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외침,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누군가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누구도 함부로 해서는 안될 생명이다.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생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어보라. 읽기를 통해 자신의 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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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양자역학 수업 - 마윈의 과학 스승 리먀오 교수의 재미있는 양자역학 이야기
리먀오 지음, 고보혜 옮김 / 더숲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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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과학은 어렵다. 과학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특히 물리학은 어렵다.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고도의 수학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물리학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위안을 받았다. 물리학자들이 다 수학을 잘한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한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을 다른 물리학자만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수학 계산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으로 결과를 도출해내기도 했다고 하니, 수학을 못한다고 꼭 과학을 못한다는 법은 없나 보다.

 

유명한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수학을 잘했지만 그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박사 시절 급류에 대해 연구했다. 센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현상 말이다. 급류를 연구하려면 매우 복잡한 방정식 하나를 풀어야 했는데, 수학을 잘 못했던 하이젠베르크는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어 하마터면 졸업도 못할 뻔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물리적 직감이 매우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중간 과정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과정을 뛰어넘어 최종 결과를 잘 찾아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방정식의 근삿값을 추측해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졸업을 위해 추측해낸 답이었지만 수학자들이 증명해보니 놀랍게도 정답이었다. (70쪽)

 

물론 그가 수학을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다른 뛰어난(?) 물리학자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의 이런 이야기는 수학과 과학을 일대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들이 많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수식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과학자들의 실험실이나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실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전물리학(뉴턴을 중심으로 하는)에서 양자역학(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현대 과학자들)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양자역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섞어 가면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과학에, 그것도 어렵다는 양자역학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 모든 것은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흥미를 지녀야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학문하는 세계에 적용하면, 누구나 학문의 세계에 들어설 수도 있고, 들어서지 않을 수도 있다. 확률은 반반이다.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그러니 경우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그것을 몇가지만으로 국한해서 제한하면 양자역학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리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읽으면 야, 물리학이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삶에서 과학이 나왔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과학에 관한 몇몇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이렇게 과학이 우리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또 21세기에 양자역학은 양자컴퓨터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 지금보다 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이 책에서 저자인 리먀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역학이 더 발전하면 소설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 뇌를 전이시켜 영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저자 리먀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열어놓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질지 그것은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들 삶 역시 불확정성의 세계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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