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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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을 생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아니 용서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자가 많은 세상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냥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용서가 어디 그리 쉽게 되는 것인가? 조금 시일이 흘렀지만 영화 '밀양'을 보라.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가? 자책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분노에 빠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을 겪고 겪은 다음에 살인자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들고, 그 살인자를 만나 용서하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이미 살인자는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에게? 신에게? 이런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피해자의 엄마.

 

이 영화 이청준이 쓴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영화였는데... 이 책은 이런 용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용서가 무엇인지 살핀 다음 용서의 종류를 살피는데... 용서의 종류에는 자기 용서, 대인 관계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가 있다고 한다. 용어를 보면 대략 어떤 용서인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개인적 용서도 힘든데, 대인 관계적 용서에서 정치적, 형이상학적 용서는 더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용서에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기억'이 작동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246=247쪽 참조)

 

그런데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서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또한 용서를 하면 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용서는 재반복 될 뿐이라는 것.

 

기억하지 않으려 한 용서들이 폭력을 계속 부르고, 학살을 계속 불러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진실도 권력을 쥔 자들이 왜곡하거나 은폐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용서에도 전제가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 용서가 있지만, 그런 용서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용서일까? 나를 대리해서 신이 용서를 할까? 영화 '밀양'이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용서는 당사자가 우선 되어야 한다. 피해자 본인이 아니라면 피해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피해를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용서여야 한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른 존재들을 용서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를 또다른 피해로 몰아가는 것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4장 종교와 용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가면 가해자가 뻔뻔해 질 수 있다. 왜 용서를 안 해주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용서를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교환일 뿐이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댓가를 바라는, 즉 빚을 주고 받는 채무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용서가 아니다.

 

이만큼 용서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추구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도 없다. 조건적인 용서는 이미 주고 받는 무언가가 있기에 용서라고 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적 용서'를 하나의 기준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기준조차 없으면 안 된다. 무조건적 용서를 기준으로, 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해-피해자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좀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용서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정으로서의 용서에는 가해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반성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가해를 감추는 장막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수동태로서의 용서. 우리 문법으로 하면 피동형으로서의 용서라고 해야 하나. 성경에는 수동채로 당신은 용서받았다고 나온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가 아니라 당신은 용서받았다다. 용서받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실하게 다가가야 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용서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태도 변화로 피해자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일본과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려고 하는 일본의 자세때문이다. 일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이 한 행위를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핸 장치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 우리나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합니다'가 아니라 '일본,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용서는 우선 피해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가해자에게서 오지 않는 용서는 변화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는, 과거를 망각한 용서일 뿐이라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용서를 피해자에게 구하기 전에 자신들이 진실을 밝히고 성찰하고 참회하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란 말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조건적 용서이겠지만, 무조건적 용서가 그냥 덮어놓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용서는 어렵다.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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