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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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가 제목이 되었다. 왜? 당연한 일이 비범한 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위관료라는 인간들이 국민들을 개, 돼지에 비유하기도 하니, 그들 눈에는 국민들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보다.

 

아니, 그들은 국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권세 있는, 소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사람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이되, 자신들과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사람인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면 주제 넘다고, 지금은 너희들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고, 오히려 이기적이라고 몰아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또는 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선에 두고 다른 것들을 먼저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 다른 것들로 사람이라는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과연 그것이 실패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친 이런 글이 있다.

 

패배를 실패로 착각해선 안 된다. 패배가 상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겼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72쪽)

 

참 좋은 말인데, 패배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파멸로 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패배, 실패하지 않는 패배를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을까?

 

노동자들은 패배하면 곧 죽음이다. 이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라고 외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싸우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패배란 곧 실패다. 이들에게 패배는 사회에서 밀려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다. 아름다운 패배.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 집단으로 보면 아름다운 패배가 될 수 있다.

 

전태일의 운동은 패배했다. 그러나 실패는 아니다. 분명하다. 전태일의 패배로 우리 사회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누가 패배라고 하는가? 우리 사회가 지금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운동 덕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아름다운 패배가 있다. 이들은 이런 패배를 통해서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집단, 관심없던 집단들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패배는 다른 국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이 책에선 '지더라도 개기자'고 했다. 언뜻보면 이해 안 되는 말이지만, 패배가 실패가 아니란 말과 같다.

 

개기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보인다. 개겨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개겨서 과연 달라지는 게 없는가. 달라지는 게 분명히 있다. 개기는 사람 자신이다. 개기면서 결심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진다. 다시 싸워야 할 때 웬만한 충격엔 흔들리지 않는다.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실패했을지언정 원칙을 지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 있는 실패가 된다. (73쪽)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내 삶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선은 있어야 한다. 그 선을 나 스스로 넘어섰을 때 패배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이점에서 정치권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 이승만 정권 당시 사사오입은 욕할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강행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세련된(?) 비례대표 위성정당이란 것을 만든 야당, 여당.

 

이들에게 패배란 실패다. 그래서 이들은 정당하지 못해도, 비록 꼼수란 소리를 들어도 성공하려 한다. 원칙을 지키고 주장하는 실패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보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이제는 없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면 과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까? 국민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이미 원칙을 잃고 자신들의 의석수만을 생각하는데... 그들에게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좋은 삶에 대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없다.

 

여기에 최근 계속 언론을 타고 있는 검찰들의 모습. 또 다른 재벌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이들에게는 좋은 삶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또는 기득권을 지켜주는 직업이 전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들만이 아니다. 곧 수능을 보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그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 직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야 한다. (194쪽)

 

이 말이 통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배제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글 한편 한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진영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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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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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많을까? 그다지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하루하루의 생활에 빠져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삭막한 삶이라고 할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름다움도 우리들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듯이, 삶에 여유가 없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들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살아간다는 말보다 살아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삶이 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느끼는 삶은 우리들에게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 말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심미안 수업이라고 하지만 딱히 어떤 비결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우선은 경험해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경험이 아니라 두번 세번 네번 반복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꾸 경험해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식만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장소성이 중요하다. 어느 장소에서 경험하느냐가 중요하다.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분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국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국악 하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기는데, 국악을 직접 현장에서 들었을 때 그것도 한옥에서 하는 공연을 보았을 때국악이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 이것은 바로 그 장소와 아 름다움이 접목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책으로 아무리 보아도,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미술관에 가서 또는 전시회에 가서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 자신의 눈으로 현장에서 봤을 때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건축의 경우에는 이런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건물에서는 데이트가 잘 된다는 말. 좋은 건물이 내뿜는 그 무엇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이에 사람들이 있을 때와 추한 것들 사이에 있을 때 사람들 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품들에서도 이러한 아름다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 하는 역할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자신의 외부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선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자신의 삶에 여유를 두어야 한다. 삶의 여백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러니 심미안을 기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책임을 두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개인이 삶에 여백을 둘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여백을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채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 도처에 있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심미안이 길러질 수 있다.

 

이 책, 심미안 수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지만, 사회 역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서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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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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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해러웨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삶과 저서에 대한 대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배경지식의 부족.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세상을 단순화해서 보지 말라는 것. 세상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단순화했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아주 작은 존재조차도 엄청난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주 크고 복잡한 존재라도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두 있고, 모두 없을 수 있음을. 경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계임을 생각하게 된다.

 

어렴풋이 이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짐작할 수는 있지만, 헤러웨이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 책을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한 생각은 착가이었다.

 

다만, 해러웨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장한 것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순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를 둔 읽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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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데부 - 이미지와의 만남 동문선 현대신서 184
존 버거 지음, 이은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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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결코 가볍게 읽을 사람이 아니다. 그가 쓴 책들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그가 생각해 내는 것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읽다 보면 놀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 또는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존 버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단순화 해서 보았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됐다.


하나의 존재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존재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로 얽혀 있고, 이런 존재들이 지닌 의미를 자신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하나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 하나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본다는 것과 통할 수 있다.


이 책 첫 장면은 '광부들' 사진이 나온다. 광부들 하면 우리나라에서 독일로 파견한 광부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소위 막장이라고 하는 말과 더불어 태백에 있는 광산, 광부들, 그리고 임길택 시인의 시들도 떠오르는데, 존 버거의 이 사진을 보면 영국 광부들이 떠오른다.


영국 대처 수상의 정책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는 사람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 가던 사람들. 그리고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떠오른다. 


사진 하나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영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또한 광부를 다룬 문학과 영화도 떠오른다. 왜? 이 사진이 의미가 있을까? 이 이미지는 어떤 역할을 할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존 버거의 글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이 종종 재판관을 재판해 왔으며, 무고한 자들에게 복수하라고 탄원했으며, 과거의 고통을 미래에 보여 줌으로써 그런 고통이 결코 잊혀질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권력을 쥔 자들이 무슨 형태의 예술이든 예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예술이 그런 일을 수행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예술은 종종 루머와 전설처럼 떠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생의 야만성이 정당화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단결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궁극적으로 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이와 같은 기능을 할 때, 예술은 비가시적이고 환원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배짱과 명예가 만나는 장소가 된다. (13쪽)


그렇다. 이미지들은 예술이다. 그리고 이런 예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지 않을 것들을 보이게 만든다. 과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결코 잊을 수 없게. 그래서 과거의 권력을 단죄할 수 있게 하고, 현재의 권력에게 경고할 수 있게 한다.


미래가 단순히 권력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와 비슷한 말이 또 있다. '분노의 곶에서 실종되다'라는 제목에 있는 글이다.


작가는 그가 쓰고 있는 것에 관해 최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현대 세계에서는 매시간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잘못된) 정치의 결과로 죽어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인식과 원칙에 대한 정보가 없는 한 어떤 글쓰기도 신빙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작가들은 유토피아적인 쓰레기를 생산해서는 결코 안 된다. (241쪽) 


단지 작가에게만 해당할까? 아니다. 존 버거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최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정치의 결과에 희생당하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정치다. 결국 우리 삶은 정치에 달려 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치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단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일들은 없다는 생각으로, 다각적으로, 더 깊고 더 넓게 보는 눈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연습, 존 버거의 책을 통해서 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정치, 경제, 예술을 비롯한 우리 삶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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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20년 2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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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산문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제목이 된 구절은 '고아'란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고아'란 말에 부모가 없다는 뜻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고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다보면 우리들 삶이 어쩌면 고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그것도 너무도 급격하게 과거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단절된 현대인들의 삶이 바로 고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인데...예전에 자연과 더불어 지내던 삶에서 자연과 완전히 단절된 삶도 모자라, 이제는 멀쩡한 자연까지 죽이는 일을 하는 정치권들의 모습에서 '고아'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이 개발될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불도저라 불리던 김현욱과 건축가 김중업이 쓴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우리 사회는 김현욱의 주장처럼 변해왔고, 그에 따라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갈 때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함께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더욱 달라질 수가 없다. 아니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더욱 안 좋은 쪽으로. 우리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그래서 제목 뒤에 따라오는 글이 더 중요하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157쪽)

 

이렇듯 이 산문집은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많다. 글들이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으로 내려온다. 마음에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이게 바로 글의 힘이다.

 

제목을 약간 비틀면,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읽는 인간의 탄생은 주체적 인간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고, 이때 주체적이란 말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박준 산문집을 읽으며 이 제목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으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로 뒤에 오는 말과 함께 해야 한다.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 '같이 읽으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이 될 수 있다.

 

'고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이것은 바로 운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런 공감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고아'란 글을 포함해 많은 글들이 이렇게 마음에 들어온다.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이 들고, 글을 통해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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