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산문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제목이 된 구절은 '고아'란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고아'란 말에 부모가 없다는 뜻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고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다보면 우리들 삶이 어쩌면 고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그것도 너무도 급격하게 과거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단절된 현대인들의 삶이 바로 고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인데...예전에 자연과 더불어 지내던 삶에서 자연과 완전히 단절된 삶도 모자라, 이제는 멀쩡한 자연까지 죽이는 일을 하는 정치권들의 모습에서 '고아'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이 개발될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불도저라 불리던 김현욱과 건축가 김중업이 쓴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우리 사회는 김현욱의 주장처럼 변해왔고, 그에 따라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갈 때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함께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더욱 달라질 수가 없다. 아니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더욱 안 좋은 쪽으로. 우리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그래서 제목 뒤에 따라오는 글이 더 중요하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157쪽)
이렇듯 이 산문집은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많다. 글들이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으로 내려온다. 마음에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이게 바로 글의 힘이다.
제목을 약간 비틀면,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읽는 인간의 탄생은 주체적 인간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고, 이때 주체적이란 말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박준 산문집을 읽으며 이 제목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만'으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로 뒤에 오는 말과 함께 해야 한다.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 '같이 읽으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란 말이 될 수 있다.
'고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이것은 바로 운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런 공감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고립되지 않았다는 것.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고아'란 글을 포함해 많은 글들이 이렇게 마음에 들어온다.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이 들고, 글을 통해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