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론 한길그레이트북스 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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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자유 없는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아렌트의 혁명론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것이다. 혁명은 공적 자유를 창출해야만 한다. 공적 자유를 창출하고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 혁명은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적 자유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공적 자유를 정치적 자유라고 하면, 또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 않고, 공적인 분야에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평의회라고 하는 작은 집단에서 가능하리라고 본다.  평의회를 다시 말하면, 작은 단체에서 조금 큰 단체로 또 더 큰 단체로 자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진출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들 각 단체는 수직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이 단체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단체에서는 수평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을 대표하지만, 또한 그 신뢰에 바탕한 자신의 의견을 지니고 공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이러한 평의회의 모임이다.

그러면 이러한 혁명 개념에 맞는 혁명이 있었던가?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혁명을 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미국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미국의 독립이나 건국이라는 말을 쓰는데, 아렌트는 미국의 독립, 건국을 혁명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미국의 혁명만이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혁명의 시원으로 이야기하는 프랑스 혁명은 실패한 혁명인가? 프랑스 혁명은 공적 자유의 문제를 밀고 가지 못하고, 사적 차원으로 문제를 치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공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 또는 빈곤층의 해방 문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혁명은 가능한가

 

우리는 이 책을 이런 질문에 역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 도대체 혁명이란 아렌트에 의하면 새로운 시작이고 공적 영역의 자유 추구라는데, 이 시대에서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어쩌면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정치사회에서 정권을 교체하더라도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않으면 혁명은 불가능하리라고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아렌트의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오히려 아렌트의 논의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경제 차원의 문제이니, 혁명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혁명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렌트의 말대로 미국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데는 미국에서는 빈곤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들은 오로지 정치적인 문제로 출발하였고, 이 시작된 문제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고, 이에 권위를 부여했기에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공적 자유를 지칭하는 정치 사회에서의 혁명을 꿈꾼다면 우선, 시민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시민사회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된 상태에서 정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과연 그런가?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한다.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문제가 동시에 일어날 경우, 아렌트의 논의에 의하면 혁명은 방향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아렌트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시민사회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집단이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역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아렌트에게서 배울 점은 두가지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되, 다시 종합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99%가 시위에 나섰다. 이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이게 아렌트 논의의 핵심이다.

이 99%가 제대로 사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에서 제도를 확립하고, 이 제도를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일을 담당하는 개인 또는 집단이 바로 혁명을 이끌어가는 개인 또는 집단이 될 수 있다. 

 

다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아렌트의 논의에 보면 우리나라는 힘든 나라임에 틀림없다. 우선 국회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 아렌트의 책을 참조하면 이들은 단지 국민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국민의 의지를 호도해서, 즉 국민의 권리를 그들이 모두 전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렌트의 이 책 논의를 따라가면 지금의 국회제도에서는 국민은 공적 영역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지 특정한 시기에 투표를 할 뿐이다.

또 이 책에 나오는 미국의 상원의 역할을 기대할 수도 없고, 단지 우리는 하원의 역할만 하는 국회를 지니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공적 영역의 자유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고, 미국 혁명에서는 권위를 대표하는 사법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헌법에 관한 모든 권리를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양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우리가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 지방자치제를 통해 어느 정도는 확보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작은 지역 정치에서부터 자신의 공적 영역에 참여할 자유를 행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새로운 정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존재이고,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 그것은 바로 아렌트 말에 의하면 혁명이 가능해지는 세상이리라.

 

이상 내 멋대로 이해한 아렌트의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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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4
김선욱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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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철학이 무얼까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망설이고 답을 하지 못한다.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아니며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철학하면 특정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도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여기까지는 그래도 학생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고, 칸트, 헤겔이 나오면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들 말고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하면 머리를 쥐어싸매게 된다.

 

이런 사람들도 이름을 한 번 들어봤을까 말까 한 학생들에게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하면 누구?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십상이다.

 

사실 아렌트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무척 어려운 사람 아니던가.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주어야 한다면 참 막막하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핵심 사상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어렵지 않다. 유대인 차별을 통한 정치적 인간이라는 이야기, 전체주의 이야기, 악의 평범성 등을 한 편의 동화 속에서 잘 구현해 내고 있다.

 

철학적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이를 예전에 시도한 책이 위기철의 논리시리즈였는데, 이보다 더 정교하게 동화 속에서 아렌트의 사상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 놀랍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또다른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거나,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철학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일이다. 특히 더 힘든 일은 철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용어부터 사상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왕따라는 동화 속의 현상을 통해서 인간은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함을, 정치적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권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함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우리가 쉽게 다수결 원칙으로 넘어가는 문제를 전체주의 문제와 연결시켜 참여와 대화가 필요함을,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가기를 알려주고, 다름으로 인해 남을 멸시하는 문제를 왕따 문제를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의 예를 들어서, 악의 평범성을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동화 속에서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개되기에 동화를 읽으면서 아렌트의 핵심사상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

 

결국 동화로 철학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철학을 완전히 소화해낸 상태에서 이를 남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아렌트 소개에 완전히 성공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학교 폭력 문제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학교 폭력, 이를 이 책에 나오는 왕따와 같은 문제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이 책은 아렌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어른들은 어른들의 문제를 이 책을 통해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초등학생이니 초등학생이 읽어도 좋지만, 사실 초등학생에겐 약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고(책을 제법 읽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재미와 이해를 함께 할 수 있는 책이지만), 중학생 이상이면 충분히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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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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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렌트 읽기를 다시 시작하다. 어떤 책을 고를까 하다가 가장 얇은 이 책을 선택하다. 먼저 머리에 기름을 칠한 다음 아렌트의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편이 더 아렌트에 쉽게 접근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기, 제목을 영어대로 번역을 하면 폭력에 대하여 정도가 되겠다. 폭력에 대하여, 20세기후반에 일어났던 여러 폭력을 보면서 아렌트가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찰한 내용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많은 면에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해야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은 "도구적이고, 그래서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에 반에 권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우한다....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고 한다." 즉, 폭력은 사적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권력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

 

이런 논의를 참조하면 폭력의 상황에 사람들이 눈감을 경우, 그 폭력은 권력의 이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결코 권력이 될 수 없는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이를 권력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순응하게 된다. 이러한 무관심, 또는 감성의 부재가 사회에 폭력이 만연하에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란 소설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힘센 폭력에 굴복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폭력을 물리치는 과정이 나타난 소설인데, 이 소설을 아렌트의 이 책에 대입하면, 결국 폭력은 개인의 힘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는 상태는 집단의 힘으로, 즉 집단의 행동으로 공적 영역에의 참여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영역에 집단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힘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은 당연히 정당성을 획득하며, 폭력을 굴복시키게 된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마음에 새기게 된 말은, "권력이 이미 거리에 있을 때에도, 그 권력을 줍고 책임을 맡을 만한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비해 왔던 조직 성원들이 필요해진다"는 아렌트의 말이다.

 

우리가 87년 6.10민주화 투쟁으로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순간, 이를 준비했던 조직 또는 조직 성원들의 부재로 우리는 권력을 넘겨주고 만 경우가 있었고, 그 후의 여러 촛불 시위에서도 거리에 이미 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력을 받아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점에서 이 구절은 통열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고찰은,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드는데, 그 노력을 우리들이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 이 또한 명심해야 한다. 다만 권력은 그냥 주어지지 않고, 행동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현존하는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통해 권력이 아닌, 폭력을 권력으로 위장하려 한다. 이러한 속임수를 간파하고, 이미 그 권력이 붕괴하고 있음을 알게끔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단순히 폭력이다 비폭력이다를 떠나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덧글

불행하게도 이 책은 품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다른 책에 다시 실려 있다. 구해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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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우리 -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뤼스 이리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 동문선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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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장면들은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일까, 아니면 차별이 교묘하게 나타나는 모습일까?

 

장면 1

학교 출석번호. 분명히 한 반에 남녀가 모여 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정할 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남자가 1번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여자는 남자 아이들 뒤를 이어서 번호를 매긴다. 모든 일이 컴퓨터로 처리되어 굳이 남녀를 분리해도 되지 않는데... 관행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이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 이제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스레 행해지고 있다

 

장면 2

연말 이러저러한 대상 시상식. 어느 방송이나 대부분은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여자 두 명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주요 진행은 가운데 남자가 하고 양 쪽의 여자들은 보조 진행자란 인상을 준다. 21세기 이제는 뉴스에서도 남녀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연예 활동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면 3

예전 어느 대선 때 이야기. 예전이라고 해봤자 그리 오래 전 얘기도 아니다. 한 10년 됐나? 모 여성후보가 대권후보로 나오자 여성계가 양분되었다. 이념을 떠나서 여자 후보가 나왔으니 이 후보를 지지하자는 측과 어떻게 이념을 떠나서 지지하냐는 측으로. 결과는? 뭐... 지금은 단지 여성 후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에 대선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시장 후보로는 여성 후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정책을 지니고 있는냐로 쟁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면 4

미스코리아, 기타 무슨무슨 아가씨 선발대회. 아직도 하고 있는 대회가 많은데... 텔레비전에서는 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것. 그런데 아직도 무슨 아가씨 대회를 만들자는 사람이 있나 보다. 무슨 아가씨보다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대회가 의미가 있나? 지역 홍보를 위한 수단일텐데...

 

장면 5

시에서 가끔 말하는이를 찾을 때 너무도 단순하게 둘로 나눈다. 기다림의 정조가 강하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화자가 나오면 여성적 화자, 당당하고 적극적인 화자가 나오면 남성적 화자. 그래서 김소월,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여성적 화자라고 하고, 이육사, 유치환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적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여성의 특징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애상적인가? 꼭 여성만 그러한가?

 

장면 6

다시 학교. 평가를 하는데, 음악과 미술은 남녀 구분없이 평가를 한다. 절대평가인 셈. 그런데 체육에서는 남자의 기준과 여자의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를 한다. 가끔 남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한다. 우리는 여자에 비해 미술, 음악 실력이 모자라는데, 왜 이 두 과목은 똑같이 평가를 하고, 체육은 우리가 잘하는데, 기준이 다르냐? 다 다르게 하든지, 다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여기서 이리가라이의 책이 빛을 발한다.

 

1987년부터, 평1989년까지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 편의 끝부분에 년도가 적혀 있다.

짧막한 글들이지만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뭉뚱그려서 말하면 평등이란 같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이다. 여성이 여성해방운동을 하는데, 이는 자칫하면 남성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리가라이는 주장한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되, 이는 사람다움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그래서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지 말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지점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상대는 극복되어져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운동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여성성, 남성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다움을 찾아가야 한다니. 그래서 이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공생이 되어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논점을 지니면 장면6이 이리가라이의 주장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되, 엄연한 차이가 나는 일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생활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다면 차이는 차별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남녀는 서로가 배타적인 집합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교집합을 많이 지니고 있는 두 집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여기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리가라이 책,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조를 받아들이면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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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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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귀환 2권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제자백가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처음에 관중을 이야기한다. 관중 부분을 읽으면서 서양 산업사회가 막 대두하던 시기, 엄청나게 많은 사회사상가들이 생각나고, 결국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이 생각났다. 성공한 사람. 그는 다른 모든 사상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다음 사람들은 그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려고 한다.

 

1. 제자백가에 왜 관중이 나오는가?

 

관중이 제자백가 시리즈 제일 앞에 나온다. 의외다. 관중이라 함은 관포지교의 주인공으로, 그냥 우정의 대명사로 생각하고 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관중을 보아준 포숙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 책에 의하면 관중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펼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모신 사람을 춘수시대의 패자가 되게 만든 사람. 그러면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다 펼친 사람이다.

 

이 덕분에 관중은 춘추전국시대 많은 학자들의 역할 모델이 된다. 다들 관중을 꿈꾸었으나, 관중처럼은 되지 못했기에, 관중은 제자백가를 다루는 이 책에서 맨 앞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즉, 관중을 계승하거나 넘어서려는 노력들이 제자백가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관중에 의한 국가주의의 탄생

 

그렇다면 관중은 어떤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가? 강신주에 의하면 관중은 자신의 겪은 현실체험을 정치사상으로 승화시키고 완성시킨 사람이다. 나와 남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며, 이상적이 아닌 현실에서의 정치를 이해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백성(여기서 백성은 귀족층을 의미한다)만이 아닌 민중을 발견한 사람. 민중을 국가의 힘으로 전환시킨 사람이다.

 

이러한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서 다른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제나라 환고을 패자로 모시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주어야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힘을 바탕으로 무조건 누르지 않고, 우호적인 자세로, 주변국들이 또 민중들이 자발적인 복종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민중들의 자발적인 복종이 바로 국가주의의 시초가 된다. 이 때부터 우리는 국가주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고, 국가라는 개념이 우리들 삶에 깊숙히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국가는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는 기구인데, 이를 억압적기구로 인식되지 않고, 이데올리기적 기구로, 합의와 동의하에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는 기구가 된다. 이런 국가가 삶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국가를 벗어나는 사유를 할 수 없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도 된다.

 

관중은 처음으로 이 일을 해낸 사람. 그래서 제자백가들의 귀감이 되는 사람. 그를 계승하려든, 극복하려든 말이다.

 

 

3. 공자는 핵심 사상은? 

 

관중이 왕을 중심으로 민중까지 아루르는 국가를 꿈꾸고 건설했다면, 공자는 민중은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예가 중심이 되는, 즉 주나라의 예를 다시 회복하는 목적을 지니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간다고 한다.

 

우리는 공자의 핵심사상을 인으로 알고 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그것이 인이고, 이로인해 공자가 예수나 부처와 같은 반열에 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강신주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공자의 핵심사상은 예이다. 그것이 주나라의 예.

 

강신주에 의하면 이 때 한자어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인은 귀족을 나타내며, 백성을 의미하는 민은 민중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민이라고 했을 때에야 모든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공자는 인과 민을 철저히 구분하고, 민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닥 한다. 

 

도를 함께 할 수 없는 소인에 불과한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면 귀족 중심의 예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예를 실현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니, 이는 왕을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한다. 사람들 자신이 예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이상적이 나라가 실현된다고 했으니, 그의 주장이 서로 권력을 잡으려 한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때 뜻을 펼치기는 어려웠으리라.

  

 

4. 왜 공자의 학파가 주류가 되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공자의 학파는 주류 학파가 되었고, 나머지 학파들은 이단이 되었다. 이는 국가주의의 확립과도 관계가 있다. 한 나라로 통일이 되었을 때, 이제는 안정이 필요하다. 변혁이 필요없는 시대에는 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는 간단히 말하며 제 자리를 알고, 제 자리에 맞는 행위를 하라는 규범이 아니던가?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다는 사상, 그 자리를 지켜야 훌륭한 인간이라는 사상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있던 나라에서 통치자들에게 유용한 사상이 되리라.

 

그러니 공자의 사상이 후대에 올수록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왜 춘추전국시대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때 공자의 사상은 개에게나 주어버려도 될 사상이었을텐데 말이다. 이를 강신주는 귀족계급이 공자의 사상을 지지했다는 데서 찾는다.

 

왕에게는 쓸모없고, 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사상이지만, 귀족계급들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또 언제든지 권력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상이기 때문이란다. 자신들이 예를 지켰다면 예를 지키지 않는 군주를 몰아낼 수 있는 근거, 그게 바로 공자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그렇게 예에 관한 논쟁이 많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국가주의의 확립으로 철저한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신분에 맞는 예를 구현하는 사회, 이를 공자의 사상에서 찾았기에 공자의 사상은 주류로 남을 수 있었다고 본다.

 

 

5. 우리는 이들의 사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

 

결국 관중에게서 시작된 국가주의의 탄생이 공자에게서 확립되었다고 나는 강신주의 책을 읽으면서 정리하였는데, 이 근거를 관중의 끝부분에서 강신주는 아나키즘을 언급하고 있으며, 공자의 사상을 귀족들의 예로 정리한데서 찾는다.

 

관중은 시혜라는 탈로 국가의 억압을 가리는데 성공했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자발적으로 국가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이는 공자의 예를 통해 더욱 확고하게 굳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최근 복지국가의 논의에 빠져, 국가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뒤로 미루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사회의 혼란을 이야기하면서 예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논의도 있는데...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철저한 성찰을 통해서만이 찾아질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관중과 공자를 통해서 재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관중 부분을 읽으면서 김수영의 푸른하늘을 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 이걸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목민에게 길들여지는 가축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국가권력이든, 예라는 올가미든.

 

른 하늘을 제압하는/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하늘을. 전문

 

 

이제 출간될 3권에서는 국가주의가 발현되는 모습을 손자와 오자를 통해서 이야기한다고 한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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