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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평점 :
'역설'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는 표현, 그것이 바로 역설이다. 문법에 맞지 않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잘 표현한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 지닌 역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특히 선(禪)에서 하는 말들은 대부분은 역설이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되어야만 한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로 해탈했다고 해서 해탈했는가?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집착에 불과하다. 언어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를 넘어서는 것,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일 수 있다.
'무문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관문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경계다. 경계에 있는 통로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문, 그것이 관문일 수 있다.
모든 종교에는 이런 관문이 있다. 대부분 초월종교에서는(강신주는 이 책에서 기독교를 초월종교라고 했다.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 신이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초월종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이 지닌 의지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없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관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들은 영세든, 세례든 어떤 격식을 통해 관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문이 없다. 문이 없어서 '무문(無門)'이다. 특정한 문이 없다는 말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문은 도처에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문이니까. 즉, 특정한 문이 없다는 말이지, 정말로 문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불교에서도 욕망의 세계와 해탈의 세계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욕망의 세계이고, 해탈의 세계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해탈의 세계로, 강신주의 말로 하면 주인이 되는 삶, 자유로운 삶을 사는 세계로 가는 문이 어디에 있는가 찾을 필요가 없다. 문은 내 곁에 있다. 아니 나에게도 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문이 있다. 다 문이다. 다 문이기 때문에 문이 없다. 그래서 무문(無門)이다.
모든 것이 문이라는 말은 내가 문을 찾으려고 하면 문을 찾을 수 있고, 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가 바로 문을 찾느냐 찾지 않느냐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냥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면(이것이 노예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애써 문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욕망대로 살아가면, 그 사람에게는 문이 필요없다. 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기와 저기라는 구분을 하지 않는 일차원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처에서 문을 보는 사람은 여기에 살아도 모든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미 욕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슨 도인인양 하지 않는다
도인인양 하는 행동 자체가 문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을 넘어섰다가 다시 그 문으로 돌아온 사람, 사람들에게 문을 알려주려는 사람, 그 사람은 도인인양 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마치 원효가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살았듯이.
이 책은 무문 스님이 쓴 '무문관'을 강신주가 자기 나름대로 배치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무문관'이다. '화두'에 대한 이야기다.
단지 불교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서양철학과 불교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가 초월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문을 넘어서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유로운 주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편을 읽으며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문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책을 읽고 그냥 언어에 매이면 거기서 끝이다. 문을 보여주었는데, 문만 보고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에 대해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읽으면서 생각하고,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을. 부처가 했다는 이 말 하나면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