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20
사이먼 스위프트 지음, 이부순 옮김 / 앨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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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도 않은 책이다. 그리고 아렌트 전기도 아니다. 이 책은.

 

아렌트의 저작들에 대한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개론서라기보다는 아렌트 이론을 자신의 틀을 가지고 해석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두껍지 않은 이유는, 제목에 있는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논문처럼 정교하게 아렌트의 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리매김하지 않고, 그냥 아렌트 저작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속에 자신의 관점을 집어넣고...

 

그래서 이 책은 아렌트의 저작을 다 읽은 사람이 읽으면 좋다. 자신의 생각과 비교할 수 있으므로.

 

아니면 거꾸로 아렌트의 저작을 읽으려고 생각한 사람이 읽어도 좋다. 아렌트의 저작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있으므로.

 

아렌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정신의 삶 등을 중심으로 각 장을 나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 문학작품까지도 곁들여서.

 

작은 책에 아렌트 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저자가 이해한 아렌트이기에, 우리 자신이 아렌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정하는데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야기 하기는 자유와 관련이 된다고 한다.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건으로부터 조금 떨어뜨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를 종합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여 자신의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하여 이야기 하기는 정치적인 활동이 되고, 자신의 삶을 남에게 드러내는 용기를 지녀야지만 가능하다. 여기에 또한 남을 인정한다는 약속과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기에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용서까지도 지녀야 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을 아렌트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렌트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아렌트를 한 번 정리하고자 하는 사람은 읽어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말

 

아렌트가 플라톤보다는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고 했는데, 즉 소크라테스는 사람들 사이에 내려와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지녔다면, 플라톤은 사람들을 떠나 사람들 외부에서 진리를 주입하려 했다고 그래서 아렌트는 소크라테스가 정치 활동을 하는 공적인 활동을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아렌트는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고 자신이 말하면서도 그 자신의 이론은 플라톤과 비슷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렌트가 과연 자기의 이론을 사람들 곁으로 가지고 내려와 그들과 함께 토론을 했던가? 설득을 하려 했던가?

 

아렌트는 플라톤의 철학자처럼, 자 이것이 진리다. 너희들은 우상밖에, 그림자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저작들이 우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해야 겨우 알듯한 이론으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그리스-로마 전통에 익숙해져 있는 서양 사람들도 이 아렌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알 수 있는데, 동양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아렌트는 소크라테스라기 보다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는,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플라톤과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렌트가 무국적자로 살다가 미국에서 국적을 얻었기에, 그런 무국적자 체험이 아렌트로 하여금 인간사회에서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이래 저래 아렌트는 나에게는 어려운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책을 읽어도 사실 정리가 안되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아렌트는 내 삶의 전체를 통해서 계속 반추해내야 하는 철학자인지도 모르겠다.

 

삶 전체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때는 아렌트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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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약속 푸른숲 필로소피아 14
한나 아렌트 지음,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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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철학자 아렌트. 그의 유고집이다. 그러므로 체계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렌트의 사고 전반을 알 수 는 책이므로 읽어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앞에서 번역자의 해설과 뒤에 있는 편집자의 해설이 그나마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하여간 상당히 고민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은 맞다. 그렇다고 읽기로 끝내서는 안된다. 읽기란 삶을 변화시키는 행위 아니던가.

 

그리고 읽기 자체가 아렌트의 말로 하면 정치 행위 아니던가.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읽기란 곧 대화이고, 이 대화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의 대화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 자신의 하나 속의 둘의 대화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은 사람, 또는 읽을 사람과의 대화이기도 하니, 읽기는 결국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의 관점과 비교하는 행위가 되고, 이러한 행위는 바로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132쪽)

 

단수의 인간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이기에 정치가 필요하고, 우리는 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나? 아렌트의 말을 또 인용하면 여기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판단 없이는 전혀 기능할 수 없는데, 정치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140-141쪽)

 

그렇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판단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아렌트는 '우리의 삶과 연관된 우리의 사적인 경험과 가족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남으로써만'(164쪽)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소위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아렌트의 지적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는 말 안해도 다 알겠고, 이들은 공적 영역을 사적 영역으로 바꾸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정치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치가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아렌트의 관점에서 올해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올해가 얼마나 중요한 해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무려 선거가 두 번이나 있는 해이고, 이 선거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면, 국회의원과 대통령이라는 소위 정치가를 뽑는데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해야지만 올바른 정치행위를 하게 된다고 본다. 우리가 정치 행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말하는 이러한 정치가를 선출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정치가란 정당체제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 인민들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또한 국가 내에서, 필요하다면 국가에 대항해서 인민의 이해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185쪽)

 

자. 이런 사람을 정치가로 뽑아야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들이 제대로 된 정치 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 행위를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바로 불편부당성이다. 불편부당성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편견을 극복하는, 그래서 우리의 의견으로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니고 행위함을 말한다.

 

불편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 판단이 나오고,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즉, 이전투구 판에 끼어들어 함께 진흙을 묻히며 뒹군다면 우리는 행위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하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과거를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과거와 미래 사이인 현재에 내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최소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정치판을 보고, 그 정치판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 그는 정치판에서 거리를 두고, 불편부당성의 관점에서 판단을 하고, 그 정치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순간의 행위를 영원으로 기록하고, 이야기로 전달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이건 엄청난 정치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적어도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지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수가 없다.

 

과거 747공약으로 대표되는 많은 공약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판단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올해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걸고 있는 수많은 공약들의 실현가능성,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될 테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정치 행위를 하게 된다.

 

정치,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무슨 무슨 정치 집단, 또는 정당에 가입한다고 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정치는, 이러한 행위들을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행위 속에 있다. 이 행위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때 정치는 바로 우리 곁에 있게 되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치적 인간'이 된다.

 

우리 정치적 인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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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정치철학 강의 푸른숲 필로소피아 9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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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렌트가 마지막으로 쓰고 싶었던 책이 "판단"이라고 한다. 사유-의지-판단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아렌트가 이 부분을 완성했다면 어떻게 썼을까? 아렌트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렌트 사후에 그가 남긴 자료들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다.

 

학생들과 함께 아렌트가 강의를 할 때 준비한 강의자료를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뒷부분에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대한 보론이 실려 있다.

 

사실, 아렌트도 어렵지만 칸트 또한 어려운 존재 아니던가?

 

칸트가 누군가? 우리에겐 "물자체"란 말을 만들어낸 사람으로만 기억되고 있지 않나? 인간은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나 하는 인식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도저히 인식불가능한 존재를 "물자체"라고 한 사람.

 

어쩌면 시계처럼 정확한 삶을 살았다는 일화로 더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그 놈의 정언명법인지, 가언명법인지 골머리를 썪이며 배웠던 사람이기도 한다. 난해함, 그 자체... 칸트는 나에게 물자체가 아니라 난해함 그 자체였다. 도대체, 이성과 오성이 어떻게 다른지, 여기에 감성이 나오고, 무관심, 취미 판단 등등

 

칸트의 삼부작이라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은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그런데 칸트의 정치철학이라니...

 

아렌트는 칸트의 정치철학을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두 저작 중에 중심이라고 하면 판단력 비판이겠고...

 

그래서 판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판단을 하기 위해선 나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해야 하고, 남을 생각한다면 그를 불러들이는 상상력이 작동해야 하고, 이 상상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면을 제거한 공적인 면이 작동해야 하기에, 반성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관심이다.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적인 관점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는 말, 무관심이다.

 

그래서 공적영역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준칙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칸트의 정치철학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겠는데...

 

무언가 확실히 정리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그래도 조금은 어, 그래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아마도 칸트의 삼부작을 읽은 사람은 이 책을 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몇몇 구절들이 마음 속에 와닿는 책이니....

 

관조, 반성능력, 재현능력, 상상력... 이것들 얼마나 정치에 필요한가? 특히 사적인 관점을 떠난 공적인 관점을 취하고 그것에 기대어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정치적 상황이라면, 우리는 행위하는 정치가들을 위해 판단하고 알려주는 사람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멋대로 읽어낸 아렌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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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삶 1 - 사유 푸른숲 필로소피아 12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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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신의 삶을 읽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상응한다고 하는데, 본래는 사유, 의지, 판단의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조건이 활동적 삶의 노동, 작업, 행위의 3부작이라면 이 책은 정신의 삶으로서 3부작인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렌트의 돌연한 사망으로 완성되지는 못했고, 그래서 3부인 판단은 쓰여지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아렌트의 유고 글들을 통해 판단을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은 사유에 대해서 쓰고 있다. 무엇이 인간을 사유하게 했는가라는 장을 보면, 아렌트는 우리가 사유하게 된 원인을 그리스, 로마 등을 통해 찾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경외로 인해서, 로마에서는 두려움에 의해서 사유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유는 이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이 기억될 뿐이다.

 

현상세계와 나 사이의 간격을 인정하고, 이 간격을 메꾸려는 노력이 바로 사유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사유는 행위와 뗄레야 뗄 수 없게 되고, 이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기에 우리는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특히 언어의 발현 중에서도 은유에 집중하고 있는데, 은유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이게 만드는 언어능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유없음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중간에 언급되어 있는데, 무사유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기존의 규정을 지키려는 모습만이 나타나기에, 그 규정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를 하지 않기에 사람들을 쉽게 광기로 이끌 수 있다는 말들이 문제적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은 상당히 철학적이다.

 

소크라테스부터 니체, 하이데거 등을 알아야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칸트와 헤겔은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하고.

 

방대한 서양철학의 흐름이 머리 속에 들어있을 때 아렌트의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에 대학 강의 자료였다는 점이 일반인들이 읽기엔 무리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역시 잘 이해하면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에 대해서, 사유에 대해서, 의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판단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한다. 사유없음이 얼마나 세상을 안 좋게 만드는지 이미 겪었기에, 의지는 이미 다른 대상을 전제하고 있기에 우리는 정신의 삶을 추구하는 아렌트의 고민을 공유해야 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왜 우리는 사유를 해야 하는가. 이 사유가 의지와 판단과 어떻게 관련이 되며, 내 의지와 판단은 공적인 삶과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유가 나와 또다른 나와의 대화라면, 그래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 정신은 죽은 것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그 사유를 하는 발판, 아니 사유에 대한 발판이 바로 이 책이리라.    

 

 

덧글

 

불행하게도 이 책, 품절이라고 나온다. 아렌트 읽기가 열풍이라고 하더니,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으니, 인문학적인 공부를 하기 힘든 세상인가 보다. 사유를 세상이 방해하고 있는지...그래도 헌책으로 구할 수 있다.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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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 -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 푸른숲 필로소피아 13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 푸른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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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이 책은 아렌트의 글 8편이 소개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이 혼합되어 있는데, 아렌트는 과거를 이야기해도, 미래를 이야기해도 결국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인 현재를 중시하고 있다.

 

무한한 미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행위의 순간이 시작되는 점이 바로 현재이며, 이 현재는 인간이 지닌 필멸성으로부터 인간을 무한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결국 현재는 과거를 통해 결정되지도 않고, 미래로부터 규정당하지 않으며, 이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서 자신의 사유와 행위로 인해 무한을 향해 뻗어나가는 시간-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를 사유를 통해서 또는 행위를 통해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워낙 철학적인 내용이고, 서양의 문화,철학 전통이 이 글들에 녹아 있어서 읽기가 녹록치 않은 책이다. 아렌트의 글들이 대부분 쉽지 않듯이 이 글들도 쉽지 않은데, 서문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아렌트의 독특한 현재관이. 카프카를 인용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그 부분이.

 

권위, 자유, 교육, 문화를 다루고 있는 글들은 그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읽다보면 연결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현재 교육의 위기를 말하며, 권위의 상실을 한탄하고, 문화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우리 현실에서 이 글들을 곱씹을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교육은 세계를 판단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아렌트의 말, 그리고 권위란 강제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라는 말, 그렇지만 이 권위는 과거에 기대고(로마의 경우), 외부에 의존한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떤 것에 기대어야 제대로 권위가 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법도, 전통도 많이 상실되었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권위를 찾으려는 노력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권위가 부정이 되었을 때는 아렌트의 말대로 정치행위를 할수밖에 없는데, 이 정치행위를 하는 장소가 공공영역이라면, 우리는 학교라는 공공영역에서 또하나의 규범, 권위를 만들어가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행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자신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타인과 만남을 가진다는 사실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이런 용기야 말로 행위의 기본 요소라는 생각...

 

권위, 문화, 교육이 위기에 처한 우리 현실에서 이러한 용기를 가지고 행위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럴 때 자유가, 즉 시작으로서의 자유를 우리가 갖추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렌트는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그를 자유라고 보았고, 인류의 행위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필멸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기에, 우리는 이들을 명심하고 용기있게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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