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을 생각한다. '어느 쪽'이라는 말.
이 말을 읽는 순간,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떠올렸다. 나는 상대방을 볼 수 없는데, 상대는 나를 볼 수 있으면서, 나에게 넌 어느 쪽이냐고 물을 때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대답을 하는 쪽이 아니라면 죽을 수 있는 상황. 그런 극한의 상황. 그것은 바로 전쟁 때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쪽?'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하면 양 쪽에서 모두 핍박을 받을 수 있다. 세상에 중립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런데 전쟁 때도 아닌데 "어느 쪽?"이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편 가르기를 통해 다른 편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배제는 민주주의가 반하는 행동이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라고 묻더라도,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행동할 수도 있지 않나, 이것에 대해서 우리 이야기하자. 더 좋은 생각, 행동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해야 그것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빅이슈]란 잡지에 '어느 쪽'이라고 묻는 답에 편집자는 현명한 답을 하고 있다. 우문현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어느 쪽'이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 질문에는 이미 배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가 포함되지 않고, 함께함이 포함된 '어느 쪽'은 좋은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정작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편집자의 말을 인용한다. 현명한 답이다.
'저는 추위 속에서 판매원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 잡지를 구매해준 당신의 편입니다. 빅이슈가 어려우니 얼마 안 되지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해준 필자, 작은 도움이라도 판매원에게 주고 싶다고 빅돔을 자처한 배우의 편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여의도에 달려가고, 주말마다 광장으로 달려나가고, 더위와 추위 때문에 열악한 쪽방에서 홈리스가 혼자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살피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8쪽)
빅이슈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현명한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를 이보다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빅이슈는 이번 호에도 집에서 쉽게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단체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고, 우리가 함께해야 할 자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추운 겨울날을 보내야 하는 홈리스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문화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한 쪽으로 몰아가지 않고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곳을 두루두루 살피고

있다. 이보다 더 '어느 쪽'인지를 잘 보여주는 잡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따스한 시선이 무도한 행동을 막는 행동을 부르고, 그런 행동들이 다른 실천들을 불러 서로가 손에 손을 잡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쪽, 그런 편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질문을 멈춰야 한다. 아니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기에 서로의 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질문에 내포된 의미를 바꿔야 한다. 자신이 편견에 빠져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하는 '어느 쪽'
다른 '어느 쪽'의 주장을, 나 또는 우리 행동을 참고하고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질문으로... 상대를 배제하는 질문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하려는 질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