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파이돈 니코마코스 윤리학 - 세계의사상 2
플라톤 외 / 을유문화사 / 1994년 11월
평점 :
절판


동성애에 관한 논란이 많고, 그에 대한 반대가 극심한 집단이 주로 기독교 단체던데, 가끔 다른 글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했다는 말이 인용되곤 한다.

 

본래 인간은 남성-남성(태양), 여성-여성(지구), 남성-여성(달)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 이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성이 세 가지 있었지요. 지금은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성이 있지만,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는 제 3의 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명칭만큼은 아직 남아 있지요. 즉 옛날에는 남여성, 즉 남성과 여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실물로도 있었고, 명칭으로도 있었습니다. ... 성에 세 가지가 있고 사람의 모양이 이러했던 까닭은, 남성이란 것이 맨 처음에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지구에서,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던 남여성은 달에서 태어난 때문이지요. ... 저들은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의 야심은 대단했습니다. 저들은 신들을 공격했습니다. (56쪽)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남성-남성이었던 존재는 남성을 원하고, 여성-여성이었던 존재는 여성을 원하고, 남여성이었던 존재는 서로 다른 성을 원한다고, 동성애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라고. 플라톤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란 의미는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사랑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한 발판으로 이 주장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논거가 동성애 찬성의 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더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뒤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유혹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육체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는 이미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것이다.

 

[향연]은 육체와 영혼, 이분법을 부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에는 육체적 사랑이 있고 정신적 사랑이 있다고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배웠다. 에로스와 아가페라고 배웠는데,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이 책은 하게 한다.

 

육체와 영혼의 사랑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다. 물론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육체는 사라질 것,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원함은 곧 생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생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는 행위는 사랑에 해당된다. 영원함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의 영원함만 추구하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라고 한다. 플라톤은

 

심령 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건 온갖 예지와 온갖 덕이에요. 모든 창조적 시인들, 그리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듣는 미술가와 공예가는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절제와 정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적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임신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고 생식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 자기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88-89쪽)

 

이런 덕에 대한 영원함으로 오면 그들의 사랑에는 육체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하면서 덕을, 예지를 영원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여기에 남성은 여성만을, 여성은 남성만을 이라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다. 이 사랑에 관한 설명을 소크라테스가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을 통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덕의 영원성에 육체적 차이를 생각하는 것은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혼이 통하고 그 통함으로 영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생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 생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랑에서 굳이 성별을 문제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와 영적인 교감을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관계를 맺든 맺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교감이고, 영혼의 생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일원론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하여간, 동성애를 육체에만 국한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또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본래 한 몸이었던 존재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 면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을 몸과 정신, 둘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볼 수 없음을 [향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 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활동과 법률에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것을을 배우는 것에로 나아가고, 그 배움의 끝에 이르러 진실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그리고 여기에서만, ..., 그가 어디에서 그의 삶을 살아가든 저 아름다움 자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9-90쪽)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로스란 무엇인가에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매개자인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에서 무한한 존재로 이끌어간다는 것. 그 단계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그것들을 거치며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분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또 아름다움은 성으로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향연]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 논거를 제기하는 글로 자주 인용되지만, [향연]은 그것을 넘어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간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사랑이든, 자비든,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 무한한 사랑을 알기 위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은 신의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한 단계일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향연]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여기에 관해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내 멋대로 읽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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