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낮은산 키큰나무 14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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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존재들을 감싸안는 이야기. 소설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소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사회복지사. 남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너무 과중에서 과로로 쓰러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남을 위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현실에서,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갈까. 우리는 가끔 자신의 상처에 가려진 남들의 상처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남들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고양이를 통해서,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여러 마리지만 이 중에서 모리와 크레마(나비), 마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에 사람으로는 연우, 연우 아빠, 은주가 중심이 되고.

 

결국 고양이들은 모두 연우네 집에 모이게 되는데, 이런 고양이들로 인해 닫혔던 연우의 마음이 열리게 된다. 연우가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 다른 존재들의 상처도 볼 수 있게 된다.

 

첫자식들을 잃고 연우네로 들어오게 된 모리는 친구가 된 고양이 또롱이를 이웃 개에게 잃게 된다. 또롱이를 유일한 말상대로 여기던 연우가 충격을 받고 더 마음을 닫게 되는 과정이 소설의 첫부분에 나온다.

 

엄마도 잃고, 사랑하던 고양이도 잃고, 아빠는 먹고 살기 바빠서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할 시간도 부족하고, 그렇게 닫힌 마음을 지닌 연우.

 

이런 연우의 행동이 모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모리 역시 또롱이를 잃은 슬픔과 연우 가족의 상처 속에서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온갖 질병에 걸리게 되는. 활동성을 잃게 되는 모리.

 

두번째 부분에서 은주와 크레마(나비)이야기가 펼쳐진다. 길고양이 수컷 나비... 철거를 반대하는 은주네를 만나게 되는데... 마음씨 좋은 은주가 주는 음식으로 은주와 나비는 마음을 열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거반대투쟁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아빠로 인해 은주네는 파탄나게 되는데...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한 순간에 내쫓는 재개발, 재개발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오히려 더 피해를 보는 원주민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한 가정이 파탄이 나는지... 은주네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나비는 시력을 잃게 되고, 연우네로 입양되게 된다. 크레마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마루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았던 집고양이. 그럼에도 가난 때문에 함께 살 수 없게 된 마루. 집고양이로 어미 없이 새끼 때부터 사람과 살았기에 고양이로서의 표현을 할 수 없는 마루.

 

이 마루가 연우네 집으로 입양되어 다른 고양이들과 지내는 과정.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소설에서 잘 전개되고 있다.

 

결국 새끼 고양이인 레오까지 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안고 상처를 받은 연우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연우가 차차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른 존재의 상처까지 볼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다른 존재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상처에 갇혀 지내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비록 상처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상처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지는 않게 된다.

 

소설은 그래서 상처를 바로보게 한다. 고양이들의 상처를 통해 연우의 상처를 치유하듯이, 우리 역시 소설을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상처들을 대면하게 된다. 그런 상처를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존재들의 상처들도 눈에 보이고 마음에 다가오게 된다.

 

여기서 공감이 시작된다. 공감이 시작되면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지내는 관계, 이것이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이제 상처는 서로가 함께 보듬고 나아가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 과정... 이 소설은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람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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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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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하면 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갈등이 잘 드러나야 하는데, 이 소설은 한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것도 과거 회상으로, 어떤 특이한 사건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주절주절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한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리한 소설. 그리고 비도덕적 소설. 아마도 도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또 소설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끝까지 읽지 않고 중간에 뭐 이 따위 소설이 다 있어 하면서 집어치울 것이다.

 

제목 그대로 "도둑일기"니까. 도둑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소설에서도 직접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이 책의 근본 주제이다.' (245쪽)

 

이것이다. 고아로 자란 주인공이 고아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수많은 도둑들과 동성애들을 만나 온 과정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소설.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은 소시민적 도덕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이 책은 너무도 비도덕적인, 청소년들을 타락으로 몰고가는 나쁜 소설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는 왜 이런 소설이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장 주네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 주네의 삶이 실제로 이랬다고 하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장 주네라고 할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환경을 만드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은 필요없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살아온 인물의 모습,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온, 어쩌면 그것을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온 한 인물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온다.

 

환경 탓을 하지도 않고, 사람 탓을 하지도 않는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냥 자신에게 필요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없으니 훔칠 뿐이고, 남자가 좋으니 남자를 사귈 뿐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배신할 따름이다. 진실한 관계? 그런 것은 없다.

 

그냥 필요에 의해 만나고 이용하고 헤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경찰도, 도둑도, 강도도 모두 똑같을 뿐이다.

 

그런 삶에서 어떤 도덕을 발견하려고 하면 안 된다. 도덕적 설교를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게 그냥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란 말이 자꾸 떠오른다. 장 주네는 결국 감옥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기 시작함으로써 그는 도둑의 세계에서 문학, 문화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그가 이런 도둑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악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악의 세계를 절대악이라고 할 수 없음을, 오히려 그들의 삶에도 선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랑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배신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수치심을 느끼면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들은 그냥 악할 뿐이다.  선이 무엇인지,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운 사람들이 지닌 알량한 도덕심은 없다.

 

알량한 도덕심으로 무장한 배운 사람들, 그들은 도덕을 무기로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는가.

 

장 주네가 이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이 사회에서는 비록 '악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절대악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즉, 그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 함께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장 주네의 삶을 통해 보면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무언가 근원적인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을 그냥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장 주네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도둑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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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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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4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4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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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4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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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와, 이건 벨라스케스에 관한 소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으니... '달과 6펜스'가 고갱에 관한 소설이듯이,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은 벨라스케의 그림인 '시녀들'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니...

 

거장은 벨라스케스이고, 마르가리타는 공주이겠고, 그렇다면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겠지, 배경은 스페인일테고 하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다. 해설을 조금 보니 스페인이 배경인 화가 이야기는커녕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다. 거장은 화가가 아니라 그냥 거장이라고 불리며, 그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공주가 아니며 거장을 좋아하는 유부녀이다. 그뿐이다.

 

여기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다지 크지 않다. 마르가리타는 그래도 많이 나오는 편인데, 거장은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나온다. 그럼에도 그가 주인공인 이유는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가 그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소설과 또 소설 속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30년대에 구상되고 쓰여졌다고 할 수 있는 소련 소설에서 보기 힘든 환상적인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인 미하일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했으며, 이 소설은 그가 살아있을 때 나오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한참 지나서 그의 세번째 아내 덕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원고 역시 그가 아내에게 구술한 내용이라고 하고)

 

사회주의가 막 건설되고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 악마와 신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당시에 발간이 안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악마든 신이든 이들은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 인간이 지닌 양면인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 소비에트 사회의 양면성...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인물이 지닌 모습이다.

 

주인공은 볼란드라는 악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 악마다. 악마 하면 우리 인간을 유혹하고 해를 입히는 인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는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

 

그와 함께 다니는 다른 수행원들이 인간 사회에 못된 짓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사회가 지닌 모순들이 함께 드러난다. 그들의 악행이 모순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 어떻게 안 좋은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까발려진다.

 

사회주의적 인간, 이타적인 인간, 공동체를 사랑하는 인간, 그런 소비에트의 모습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주의가 정착, 발전되어 가야 할 시기인 1930년대 소련 사회는 오히려 사람들의 곤궁이 드러나고, 곤궁으로 인한 탐욕이 발현되는 사회, 또다른 특권층이 대두하고 있는 사회임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층이 나오고,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악마를 통해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세상에 자본주의의 반대 편에 선 사회주의에서 소비를 지향하는 군중들의 모습과 돈이라면 어떻게든 지니려고 덤비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을 떠난 사회는 선전과는 달리 더 힘든 사회임을... 악마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악마는 나중에 주인공들에게 평안을 준다. 세상에 악마의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 어떻게 가능할까?

 

소설의 말미에 신(예수로 추정되는)의 심부름꾼이 악마에게 와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라는 부탁을 한다. 악마 역시 수락하고. 이는 두 가지 면에서 평안을 얻게 되는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반대되게 한 빌라도가 평안을 얻는 것과, 그런 소설을 쓴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평안을 얻는 것.

 

방대한 분량이긴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빠르게 읽어갈 수 있다. 그만큼 이야기의 몰입도가 높다. 악마라는 환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을 마치 마술과 같이 전개해 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환상성 속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가 있으니...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신을 추방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은 추방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신을 추방했다면 악마 역시 추방했어야 하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추방당한 신을 다시 불러올 때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신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다만, 우리 현실에서 보이는 수많은 탐욕들이 바로 악마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악마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악마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그 궁리 속에서 우리에게 신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하여 이 소설을 악마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신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점을 '본디오 빌라도'이야기가 소설 속의 소설로 들어간 이야기일 것이다. 그를 고통으로 해방시켜주는 쪽으로 소설의 결말이 나니까.

 

이 소설은 악마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볼란드는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다고 했으니.. 탐욕에 가득차 있으면 그는 언제-어디서건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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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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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가 인간이 지닌 권리 중에 하나이고,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생각하면 꼭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다.

 

지구라는 거대한 틀 속에 갇혀 있거나,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거나 하는 것, 결국 우리의 자유는 한계지워진 자유일 수밖에 없다.

 

자유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틀 속에서의 자유고, 자유의지다.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 틀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틀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사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떤 사회는 제약이 심해 틀을 심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고, 어떤 시대는 이런 틀을 강하게 유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유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자유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삶,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비록 자유라는 것이 명백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계 속에서도 자유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이러한 자유를 잠시 구속하는 경우, 이것이 바로 수용소의 삶이다. 요즘은 교도소라고 하나...

 

장소의 제약, 행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수용소이다. 이런 수용소에서는 자유는 심하게 침해받는다. 그런 곳에서의 삶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수용소에서도 최소한 자유는 있다. 일탈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주어진 대로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를 거대한 수용소라고 보아도,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조건이 똑같아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입력과 출력이 일치하는 기계와 다른 점이다.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쓴 이유가 당시 소련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든, 아니면 우리의 삶이 이러한 수용소에 갇힌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썼든, 자유를 제약당한 삶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소설은 10년형을 언도받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를 이 소설에서는 이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다른 수용소 인물들은 슈호프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의 하루를 서술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에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 그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 수용소의 하루하루를 멀리서 보면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 그러나 그 하루하루 동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에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똑같은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비슷한 행위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멀러서 보면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텐데, 그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다 다른 일들이다.

 

결국 슈호프가 수용소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다고 하면, 우리들 대다수는 지구라는 좀더 큰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슈호프는 10년이라는 세월을 갇혀 있었지만, 우리는 길게는 100년 정도를 갇혀 지내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를 잃은 삶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유를 찾아 생활하는 슈호프의 모습,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슈호프의 모습을 확대한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될 테고, 이를 더 확대한다면 지구라는 틀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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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5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5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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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 시리즈로 알게 된 작가다. 말괄량이 삐삐, 얼마나 우리의 동심을 자극했던지. 드라마로 보면서 삐삐의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끼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키워갈 수 있었다고나 할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독립해서 살아가는 그런 삐삐의 모습에서 말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어린 시절에 읽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것이 1983년이라고 하니, 꽤 오래된 책임에도 말광량이 삐삐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이 노르웨이에서 한 강연의 원고를 읽으며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한강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소설. 어쩌면 이 소설에 나오는 형제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은 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읽게 되자마자 한 순간에 책의 끝부분에 도달했다. 세상에 이승에서 저승에 해당하는 낭기열라까지 가는데 순식간에 가듯이, 또 낭기열라에서 또다른 세상인 낭길리마로 가는데 순식간이듯이, 소설 역시 순식간에 읽힌다.

 

그만큼 흥미진진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독재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자꾸 떠올리게 하고, 벚나무 골짜기 사람들과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함께 교류하며 잘 살다가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을 억압하는 텡일이라는 독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자꾸만 우리나라가 겹치게 되기도 한다.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일, 두려운 일이다. 주인공인 동생 칼은 이런 두려움을 느낀다. 아니, 형인 요나탄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들은 나서야 했다. 특히 요나탄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맨 앞으로 나서야 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너무도 어린 나이 아닌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유를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에는. 그럼에도 요나탄이나 칼은 이런 생각으로 싸움에 나서게 된다. 아니 자신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230쪽)

 

그렇다. 사자왕 형제는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이들은 하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소년이 온다"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죽음 앞으로 다가간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소년인 동호 역시 마찬가지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다시 봤다. 도청에서 나갔다가 진압 전날 밤,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죽을 줄 알면서도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사람들. 남아야 했던 사람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주인공.

 

그렇다, 이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것,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죽어가는 것, 이들의 선택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용기다.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형제는 바로 이런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람다움의 기본은 무엇인가. 바로 자유 아니던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그 자유를 독재자가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해 침해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찾는 것. 되찾은 다음, 자신이 영웅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 아니던가.

 

사자왕 형제는 그래서 '낭기열라'에 남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낭길리마'다. 형제는 그곳에서 평온한 삶을,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그곳에는 독재자는 없으니까.

 

이 소설의 묘미는 우선 재미다. 재미있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칼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겪게 될 일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 떨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을 인정하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으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해보지도 않고 미리 주저앉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용기인지 알 수 있게 되니까.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그래야 쓰레기같은 하잘것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될 테니까.

 

한강 덕분에 좋은 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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