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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어쩌면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가 인간이 지닌 권리 중에 하나이고,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생각하면 꼭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다.
지구라는 거대한 틀 속에 갇혀 있거나,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거나 하는 것, 결국 우리의 자유는 한계지워진 자유일 수밖에 없다.
자유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틀 속에서의 자유고, 자유의지다.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 틀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틀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사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떤 사회는 제약이 심해 틀을 심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고, 어떤 시대는 이런 틀을 강하게 유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유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자유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삶,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비록 자유라는 것이 명백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계 속에서도 자유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이러한 자유를 잠시 구속하는 경우, 이것이 바로 수용소의 삶이다. 요즘은 교도소라고 하나...
장소의 제약, 행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수용소이다. 이런 수용소에서는 자유는 심하게 침해받는다. 그런 곳에서의 삶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수용소에서도 최소한 자유는 있다. 일탈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주어진 대로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를 거대한 수용소라고 보아도,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조건이 똑같아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입력과 출력이 일치하는 기계와 다른 점이다.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쓴 이유가 당시 소련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든, 아니면 우리의 삶이 이러한 수용소에 갇힌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썼든, 자유를 제약당한 삶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소설은 10년형을 언도받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를 이 소설에서는 이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다른 수용소 인물들은 슈호프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의 하루를 서술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에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 그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 수용소의 하루하루를 멀리서 보면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 그러나 그 하루하루 동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에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똑같은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비슷한 행위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멀러서 보면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텐데, 그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다 다른 일들이다.
결국 슈호프가 수용소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다고 하면, 우리들 대다수는 지구라는 좀더 큰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슈호프는 10년이라는 세월을 갇혀 있었지만, 우리는 길게는 100년 정도를 갇혀 지내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를 잃은 삶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유를 찾아 생활하는 슈호프의 모습,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슈호프의 모습을 확대한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될 테고, 이를 더 확대한다면 지구라는 틀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