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문학전집 2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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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읽었는데, 또 책도 있었는데, 물론 이 판은 아니었지만, 읽으면서 내용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소설이 별로 없다. 그냥 소설의 분위기만 느껴질 뿐이다.

 

역시 단편들에 대한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한 분위기는 남아 있다. 김소진의 소설들, 밝다기보다는 어두침침한 느낌, 무언가 칙칙한 느낌을 준다는 느낌만 남아 있는데, 역시 다시 읽으니 마찬가지다.

 

마치 기형도의 시집을 읽을 때처럼 어두운 분위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작가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이 기형도도 김소진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곁을 떠났어도 작품은 남아서 그들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이번에 읽은 김소진의 소설은 전집으로 나온 것 중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소설집이다. 많은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김소진의 약력을 알면 소설 속에서 김소진 개인사가 잘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대학생이 나온다. 이는 김소진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런 대학생 또는 기자라는 직업, 소설가나 시인이 된 인물이 꼭 나오고, 이 인물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로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여기에 이런 지식인 말고 아버지나 어머니 철원댁에 대한 서술에서는 공통된 점들이 나온다. 아버지는 월남한 사람, 전쟁 중에 포로로 거제도에서 남한을 선택한 사람, 어머니는 철원댁으로 불린다는, 억척스럽게 가족을 먹여 살리는 민중의 전형. 그리고 한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들.

 

결국 김소진의 작품은 지식인과 그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이 함께 나오는데,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지식인이다.

 

대학생 서술자, 기자 서술자 등등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된 인물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등장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민중들의 삶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층민중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은 상태, 이들에게는 정권만 바뀌었을 뿐인 모습.

 

민중들과 지식인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 마치 이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소설이 전집의 제목이 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시위하다 죽은 열사의 주검을 지키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서로가 같은 목적으로 한 자리에 있지만, 그들이 함께 하지 못하고 있음을, 함께 할 수 없음을 짧은 소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민중들은 이런 운동권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마는 관계, 도대체 민중에게 무엇이 열린 사회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민중의 적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만족하고 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극적인 변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 '혁명기념일'에 나오는 석주- 대부분은 자신들의 지향과 지금의 삶의 괴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해서 과거로, 이 과거에서 다시 또 다른 과거로 간다. 이런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성들을 주로 택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들이 중첩되면서 현재 인물의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이 지금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를 소설이 서술되면서 과거의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단편이라고 단순한 구성을 택한 것이 아니라, 김소진의 소설은 이렇게 짧은 소설 속에서 여러 층의 시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간들이 바로 인간 삶의 복잡성이고, 이것을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없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김소진 소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또 [새우리말 큰사전]을 독파했다는 작가의 이력답게 우리말들이 많이 나온다. 어쩌면 사라져 갈 우리말들이 김소진의 소설을 통해서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시간의 중첩, 우리말들의 향연, 이 속에서 지식인과 함께 있지만 함께 하지는 못하는 민중들, 그런 우리나라 80-90년대의 모습을 김소진의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소위 386이라고 하는 지식인들은 김소진의 소설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반추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간접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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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시선
마광수 지음 / 페이퍼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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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 그는 외설스런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작품의 외설성을 판단하는 것이 판사, 검사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대학교수직에서 해직되기도 하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다.

 

우연히 헌책방에 들렀을 때 어떤 사람이 "즐거운 사라"가 있느냐가 했고, 책방 주인은 귀한 책이라고 헌책이었음에도 그다지 싸지 않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제도권에서 막아도 책이 읽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의 소설들이 재판정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일반 사람들의 정서가 다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그런 그가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이 세상과의 불화를 스스로의 손으로 끝냈다.  대학을 정년 퇴직하자마자 스스로 삶을 끝낸 사람. 다른 세상에서는 글로 인해 억압을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낸 마지막 시집이다. 그의 시집에서 여러 시들을 본인이 골라 실었다고 한다. 한글로만 '시선'이라고 되어 있어, 시선집인지, 마광수가 바라보는 시선인지 헷갈렸는데, 출판사 소개들에 작가가 고른 시선집이라고 되어 있다.

 

몇 편을 찾아보니 다른 시집에 실려 있던 시들이 실려 있다. 그런데 참 친절하지 못하다. "시선"이란 제목으로 책을 냈고 8부로 나누어 시집을 냈는데, 그 시들이 어느 시집에 실려 있던 시들인지 아예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 발표된 시인지, 어느 시집에 실린 시인지, 이 시집의 순서가 시대순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시선집을 내면 좀 이런 점을 고려해서 냈으면 좋겠다. 적어도 한 작가의 작품 활동을 결산하는 시집 아닌가. 그런 시집에 출처를 밝혀주면 다른 시집들을 찾아 읽어볼 마음도 생기도 더 좋지 않은가.

 

시집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 사회와의 불화가 넘쳐난다. 그를 구속까지 몰고간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은 물론이지만, 성욕이 넘치는 것은 죽음과도 상통하니, 어쩌면 이 시집을 내면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자살자를 위하여'라는 시를 보면 그는 자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마라 /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마라 /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자살자를 위하여. 3연. 120-121쪽)

 

여기에서 그는 여차하면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끊을 마음이 있음을 비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이 세상을 버리겠다는 의미, 그것은 양심이 살아 있고, 비겁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스스로 생명을 책임 맡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얼마나 세상과 불화했으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세상의 통념에 반대되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만큼 그는 이 세상과 화해하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살기'라는 시를 이를 잘 알 수 있다. 청년들만 '헬조선'이 아니었던 거다.

 

'한국에서 살기는 너무나 힘들어 / 뭘 해도 안 되고 뭘 안 해도 안 돼 /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어' (한국에서 살기. 1연. 73쪽)

 

학자로서도 작가로서도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보다 더한 짓들을 하면서도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문학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회에서 그는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얼마나 사회에서 비난에 시달렸으면 '내가 죽은 뒤에는'이라는 시를 썼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그러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뿐'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85쪽)

 

어떻게 기억이 될까? 세계적으로 변태라고 이름난 사드 후작도 자신의 작품을 남겼고, 요즘에도 읽히고 있지 않은가.

 

마광수의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대를 앞서 나왔기에 외설 판정을 받고 그의 문학생활을 힘들게 했지만, 작품은 작품으로 읽혀야 하는데, 여기에 사회적인 잣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었으니 그가 견디기 힘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은 어려운 시가 하나도 없다. 그냥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천상병의 후기 시가 천진난만한 사람의 시선으로 쓰였다면, 그래서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마광수의 시들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윤리, 도덕으로 가린 욕망들을 그는 가차없이 드러낸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욕망을 발현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발현하고 있으면서도 마광수의 작품을 불편해 하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은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남들 모르게 비밀스럽게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성적인 일들을 그는 공개적으로 백주대낮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인륜이고, 본성은 천륜이라는 허균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마광수는 이런 천륜,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문학으로 드러냈을 뿐일 것이다.

 

그것이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문학을 문학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마광수의 이런 "시선"이란 시집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간되어 읽히고 있지 않은가.

 

이 시집에서 압권은 '내가 쓸 자서전에는'이다. 그가 살아온 삶들이 이 시에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 감정이 잘 담겨 있다. 마음이 쓸쓸해지는 시다. 이 전문은 찾아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니, 여기서 인용은 하지 않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저 세상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윤리, 도덕, 사회적 제도의 잣대로 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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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맘 2017-09-14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7-09-14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5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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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갈 수가 없다. 무슨 내용인지, 소설이 무슨 학술서인양 주가 많이 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양이나 남미의 문학,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라고 할까. 소설의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미로 속에서 나오지 못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오게 되는, 자신이 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들어가라고 하면 또다시 헤매게 되는 그런 미로이지만, 그것은 소설의 이해와는 다른 차원인데, 그런 소설들이라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읽다 놓았다, 다시 읽다, 또 놓았다, 읽다를 반복하는 것은 "픽션들"과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는 좀더 수월하게 읽는다.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이 소설집에서는 서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소설들이 있다.

 

그럼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설들도 있지만, "픽션들"을 읽어서인지 친숙한 느낌을 지니며 읽게 된다.

 

이 소설집에서 첫소설과 마지막 소설을 중심으로 내용을 이해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끝이지만 끝이자 처음인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구분이 되지 않는, 처음과 끝이 없는 소설. 첫소설 제목은 '죽지 않는 사람'이고 마지막 소설 제목은 '알레프'이다.

 

죽지 않는 사람, 그 주인공이 바로 호메로스이다.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쓴. 그렇다. 작가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영원히 산다. 유한한 생물로서의 목숨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아 유전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수가 없다.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런 작가는 '알레프'를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본 알레프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204쪽)이라고 하는데, '모든 언어는 상징들로 이루어진 알파벳이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하나의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겁에 질린 내 기억이 간신히 간직하고 있는 그 무한한 알레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208쪽)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209쪽)

 

이것이 작가이다. 첫소설에서는 작가의 시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마지막 작품에서는 공간적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한 공간에서 우주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본다. 그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한 공간에 지금까지의 우주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 그가 바로 작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작가의 목숨은 유한하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작가가 무한한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언어 또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시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일이다. 그 일이 성공했을 때 작가의 알레프는 작품으로 남는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죽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순환한다. 처음이 끝이 되고, 끝이 처음이 된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삶 자체가 바로 알레프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 삶에는 전 우주의 역사와 삶이 담겨 있다. 이 유한한 삶에 무한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 소설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하여 이 소설집을 읽으면 앞으로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커다른 원에서는 원이 직선이듯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행로를 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굳이 안과 밖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집의 제목인 '알레프'처럼, 우리 역시 우리 삶의 알레프를 볼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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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온 편지 삶창시선 49
김수열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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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읽으며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더이상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최근 시들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면 김수열의 이 시는 그 반대 방향이다.

 

결코 어렵지 않다. 그냥 읽으면 된다.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머리 속에 들어온다. 아니 머리보다는 먼저 마음에 들어온다.

 

시가 마음을 울리는 문학이라면 그에 충실한 것이 바로 김수열의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이다. 그래서 한 번이 아니라 자꾸 읽게 된다. 어느 부분을 펼쳐도 좋다.

 

마음 속에 들어오는데, '고부'(42쪽), '102살 할매도 여자다'(46쪽) 같은 시들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지만  4부에 있는 시들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아픈 상처, 아직도 아물지 않은 4.3의 아픈 상처를 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제주도에 살고 있다. 또 자신은 중심이 아닌 변방의 시인(102쪽)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는 출세라든지 명망이라든지 하는 것에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집에 실린 '예감, 바닷가 학교'와 같은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교사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따스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듯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도에 따스한 시선을 주고 있다. 얼마나 따스한지 가슴이 찡해지는 시가 있다. 바로 '천원식당 할머니'

 

천원식당 할머니

 

할머니 별이 되셨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암세포 당하지 못해

요양 위해 문 내린 지 얼마 만에

그 문 다시 열지 못하고

대인시장 천원식당 할머니

별이 되셨다

 

별이 되기 전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노점상 할머니들 끼니는 어찌 때우는지

난방도 안 되는 여관방에 살면서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천원 내고 한 끼 먹고 남은 음식을 들고 가

다음날 아침 때우는 아흔 넘긴 노인네 생각에

식당 문 열게 해달라 빌고 빌었다

 

방송에 나오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기저기 할머니 같은 어진 마음들

쌀이며 고추장이며 갓김치 보내오고

대인시장 이웃들

생닭이며 두부며 콩나물 두고 가고

누구는 천 원짜리 밥 먹고 오만 원짜리 슬쩍 넣고 가고

 

할머니는 세상이 이렇게 고마운데

아예 돈 안 받고 그냥 줄까 하다가

먹으면서 떳떳하라고

당신처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밥값 천 원 선불로 받으셨다

 

그 할머니 별이 되셨다

대인시장 밤하늘 참 환해지겠다

 

김수열, 물에서 온 편지, 삶창. 2017년. 44-45쪽.

 

말이 필요 없는 시다. 이렇게 따스한 사람들, 밝은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다.

 

그런데도 이들의 사랑을,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여 제도로 만들어야 할 모 정당의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을 보면 가관이다.

 

나라에서 하는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한다. 재원을 확보하지 않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정책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도대체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나 보다. 이렇게 낮은 곳에서도 열심히, 성실히 마음을 열어가며 있는 것들 조금씩 내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할 일 아닌가.

 

저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정권을 비난하는 것, 그들의 직무유기다. 제발 이런 시를 읽고 정신차리길 바란다.

 

여기에 4.3에 관련된 많은 시들, 강정에 관련된 시들... 제주도는 아직도 과거 비극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슬픔이 치유되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반 갈등들이 해소되어야만 될 터인데...

 

'꿩사냥, 갈치'와 같은 시들을 보면 이런 비극에 마음이 섬뜩해 지기도 한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이념으로 인한 살상. 시인은 시를 통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지만 이렇듯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불러와 잊지 말아야 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최근에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어 제주도, 특히 효리네로 민박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들이 단순히 연예인이 운영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민박집이 있는 제주도라는 생각으로 가지 않고, 제주도에 녹아 있는 아픔들, 슬픔들도 느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을 통해서 사람들의 잔잔한 정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런 제주의 아픔, 슬픔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느낄 수 있고...

 

마음을 울리는 시...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시... 시를 읽으며 슬픔에 젖기도 하고, 웃음을 짓기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시를 읽는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 출판사, 고맙다. 이런 좋은 시집들이 삶창에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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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준 작품집 - 지만지 고전선집 282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현경준 지음, 윤송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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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준'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생소하다. 일제시대 얼마 되지 않는 소설가들을 적어도 이름은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경준이라는 이름은 그 생소한 이름에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헌책방에서 현경준 작품집이라는 책을 보고, 살짝 들춰보니 일제시대에 소설을 쓴 작가다. 일제 후반기에 리얼리즘 소설을 쓴 소설가, 한국전쟁 때 종군작가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비록 시대는 한참 지났지만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니 한 번 읽어보자고 골라 들었는데...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한 편은 "탁류" - 사실 "탁류"하면 채만식의 탁류를 떠올린다. 그만큼 채만식의 "탁류"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 다른 한 편은 "유맹(流氓)"이다. 

 

"탁류"는 짧은 단편으로 일제 말기 전향을 강요당하는 지식인들, 자신들의 위치를 읽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갈등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고, 친구들 가운데서도 변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 그럼에도 그 상황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자의식. 그렇게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짧막한 소설에 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으리라. 그렇다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부정할 수도 없었으리라.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고 생각하고 살기에는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왔으리라.

 

그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변화를 추구하기엔 일제는 너무도 강고하다는 생각을 하고, 서서히 변해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갈등도 했으리라.

 

그럼에도 굴복할 수 없다는 지식인의 자의식,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데...

 

채만식의 소설에서는 장편에서 순수하게 살고자 하는 주인공을 휩쓸어버리는 거친 세상을 "탁류"라는 제목으로 잘 표현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지식인'들을 휩쓸어가고 있는 모습을 '탁류'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 "유맹"이 읽을 만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친일이다 아니다 논란이 좀 되고 있다고 한다. 읽어보니 논란이 될 만하다.

 

만주의 어느 부락, 폐쇄된 부락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게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부락을 갱생하고자 하는 사람과 그 부락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서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이 부락의 구성원들을 분석한 앞의 내용을 보면 '중독자, 밀수업자, 도박상습범, 사기횡령범, 기타'로 되어 있다. 즉,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갱생시키려고 만든 부락이다. 수용소라고도 할 수 있는데... 수용소와 다른 점은 이들이 마을을 떠날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교화시키는 소장의 열정이 표현되어 있고, 그런 소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는 긍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순동이와 순녀 같은 인물을 보면, 일제시대 만주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긍정성을 덮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제가 이런 부랑자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감시하고 가두고 억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점은 이 소설의 긍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런 일제의 활동을 긍정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는, 왜 이들이 아편중독자가 되었는지, 이들을 왜 이렇게 가두고 있는지 등을 생각하면서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 참 암담한 시절, 그것도 더 암담한 만주국 시절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의미, 그 정도. 현경준 소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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