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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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이렇게 영어로 표기를 하면 누구의 운동화인지 모른다. 그 시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L'. 그는 바로 '이한열'이다. 87민주화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최루탄에 희생된 학생. 86학번이라고 한다. 대학에 들어온 지 갓 일년이 지난 나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앞장서야만 했던 나이. 그렇게 당시의 학생들은 소위 386세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부연 최루탄이 일상생활이던 87년. 하지만 이 소설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운동화 이야기다. 낡아가는 이한열의 운동화.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이야기.

 

운동화 복원은 곧 이한열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고, 87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이한열의 운동화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국민의 힘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누더기가 되고, 사그라져버릴 것처럼 낡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 눈 앞에 있어야 한다. 늘 기억하라고. 그 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소설에서 복원가인 주인공은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데... 생명이 죽어가는 냄새를 맡게 된다.

 

그냥 놓아두거나 복원하지 못했을 경우 마치 생명체가 썩어가듯이 썩어가고 있는 운동화. 그런 냄새는 바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하나 운동화를 복원해 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냄새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서서히 표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내부로부터는 서서히 변화가 있겠지만, 변화는 어느 순간 확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이 소설에서 썩어가는 냄새가 어느 순간 사라졌듯이.

 

복원이 완성되어 가는 지점에서 냄새는 사라지고 만다. 냄새의 사라짐과 운동화의 복원. 썩어가는 민주주의의 회복...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우리가 잊고 있었던 87년 정신을 다시 되살리는 것 아닌가? 서서히 곪아가서 썩어가고 있었는데, 냄새가 우리나라 곳곳에 넘실대고 있었는데,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마치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듯이.

 

관심이 없으면 냄새조차 맡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까지 그 냄새를 무시하면 안 되지 않나. 어떻게든 냄새를 의식하면서 행동을 해야 한다.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정신을 살리는 것이고, 그 때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다시 우리에게 되살려 오게 하는 것, L의 운동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단지 운동화의 복원 얘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또는 잊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어쩌면 억지로, 이 소설의 또다른 인물은 이소연이라는 여인이 왼발과 오른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겨 아이를 집까지 억지로 끌고 왔듯이, 그렇게 87년 정신을 어거지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우리는 광장에 서게 되었는데... 신발의 짝이 맞지 않았음을,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었음을, L의 운동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비록 짝을 완전하게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L의 운동화 복원을 통해 87년 정신만은 잊지 않고, 계승해가고 있음을... 광장에 다시 서는 사람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87년 광장의 한 복판에서 주인을 잃었던 L의 운동화, 이제 다시 그 운동화들이 광장에서 주인을 찾아 함께 걷고 있다. 이 나라 곳곳을... 민주주의의 함성을 울리며.

 

L의 운동화. 지금 여기 다시 복원되어 우리들 발에 있다. 그렇게 L의 운동화는 우리와 함께 한다.

 

이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 요즘의 상황과 너무도 잘 맞는다. 우리가 다시 87년을 재현하게 될 줄이야. 다시 이렇게 L의 운동화처럼 끈을 단단하게 조여매게 될 줄이야. 아마 우리는 L의 운동화를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29년 전 87년 광장으로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2016년 광장으로 나를 불러내고 있다. 우리를 불러내고 있다. L의 운동화 복원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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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글 알베르 카뮈 전집 19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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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가가 아니라면 굳이 제대로 발표도 되지 않은 카뮈의 젊은 시절의 글들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사가도 아닌 나는 그럼에도 왜 읽는가. 그냥 읽고 싶기 때문이다. 카뮈란 사람의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에 대해서 맞춰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부연 공기들, 세상이 짙은 안개에 쌓여 있을 때,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왠지 그곳을 거닐고 싶은 욕구를 느끼듯이, 카뮈의 작품은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실체가 팍 잡히지 않는다. 그냥 안개 속에서 여기저기를 거닐며,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는 작품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카뮈란 사람에게서는 어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미술에서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연상된다.

 

그래서 더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다라고 딱 규정할 수 없으므로.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시절,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에 쓴 글들이다. 습작이라고 해도 좋고, 치기어린 감상들이 나열된 글들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 글들이 나중의 카뮈를 이루게 된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을 읽는데, 여기서 나온 글들이 나중에 카뮈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과 겉'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 속에 '아이러니'라는 부분에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그는 여러 글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읽을 만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글에서 읽은 카뮈의 집안 내력이 이 책에서도 살짝 살짝 나오고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

 

무엇보다 카뮈가 젊은 시절에 지녔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았다고나 할까...

 

  예술은 죽음과 맞서 싸운다. 불멸의 획득을 위햐서 예술가는 헛된 자부심에, 그러나 올바른 희망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삶에서 멀어져야 하고 삶을 모른 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과도적이고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정지'가 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서 소멸한다. 삶이 연습해보고 시도해보는 (그것도 헛되이, 왜냐하면 삶은 스스로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뒤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것을 예술은 실현한다. 삶과 우리의 의식 사이에 여러 가지 예술적 인상들이 무리 지어 응결되어서는 일종의 스크린을 형성한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다행스러운 프리즘같은 것이니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해방감을 느낀다.

  삶을 초월하는 곳에, 삶의 합리적인 틀을 초월한 곳에 예술이 존재하고 합일이 존재한다. (153-154쪽)

 

이렇게 예술은 흐름을 정지시킨다. 정지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삶을 예술은 보여준다. 그리고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죽음으로 사라져도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카뮈가 이렇게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결과들이 그의 작품으로 나타났다고 보면 된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게 하는 카뮈의 젊은 시절의 글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 글들을 토대로 카뮈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 카뮈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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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호텔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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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결국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기억하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이 시집의 뒷표지에 실린 김종철의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문재의 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감수성이 뛰어나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사람, 그래서 자신과 남의 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신의 일인 것처럼 표현하는 사람, 그 표현을 통해 남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시를 통해서 남을 자신에게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그 시는 성공했다고 말하기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문재의 이 시집은 성공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시집의 제목 "제국호텔"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국에 침탈당하고, 생활은 물론 의식까지도 제국에 지배당하는 그런 상태를 보여준다고...

 

이 시집에서 '제국호텔'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시들은 이런 우리의 상태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보지 않으니, 시인이 우리더러 보라고 우리의 눈 앞에 그 상황을 펼쳐 보여준다. 안 보면 안 된다는 듯이.

 

컴퓨터 정보화시대, 초고속통신망시대, 스마트폰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지배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지구적 축제라는 월드컵에 갇혀, 그런 제국의 논리에 빠져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함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제국이 어떤 나라를 의미하는지는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나란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프런트에서 왼쪽으로 이십 미터를 가면 스타벅스 / 오른쪽으로 다시 백오십 미터를 더 가면 맥도널드다' ('제국호텔 -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57쪽)

 

제국에서는 우리가 꿈을 이루어도 그 꿈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제국에서 탈출해야, 제국을 없애야 비로소 꿈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 제국에서 / 이루어진 꿈은 꿈이 아니다 / 그대들은 꿈★은 늘 미루어지게 되어 있다' ('제국호텔-인도에서 소녀가 오다' 중 일부 56-57쪽)

 

그러니 제국의 환상 속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붉은 악마의 구호를 인용해서 현실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단지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계속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럼에도 이 시집에 이런 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있고 (농업박물관 소식, 지구의 가을, 식탁은 지구다),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감성을 일깨우는 시들도 많다.

 

그 중에 이 시 '파꽃'을 사람이 배우는 이유에 대입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파꽃

 

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12년 1판 5쇄. 93쪽.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야 한다. 자신이 비워져야 제대로 존재할 수 있다. 만약 파의 속이 꽉 차 있다면 그것은 이미 파가 아니다. 파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많이 배운 사람이 제 속을 비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제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었다면 차라리 안 배움만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우는 사람의 의무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우리는 배움을 채움으로 잘못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배움을 오로지 채움으로만 생각하는 세태에 물들어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가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다.

 

비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 파는 속을 비우지만 속을 비우기 위해서 자신은 꼿꼿하게 홀로 서야 한다. 꼿꼿하게 홀로 섬, 이것과 속이 빔이 함께 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파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우기나 채우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몸 자체, 항아리 그 자체이다. 몸은 튼튼해야 하고, 항라리는 단단해야 한다.'

 

그렇다. 바로 우리 자신들부터 바로 서야 한다. 바로 서는 공부. 바로 서는 몸. 그 다음이 바로 비우기다. 비운 다음, 채우기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인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게 바로 우리 눈 앞에, 우리 마음에.

 

이문재의 시집, "제국호텔" 그 역할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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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 이성복 대담
이성복 지음 / 열화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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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성추문이 끊이지 않고 불거지고 있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이런 성추문들이 쉬쉬 감추어져 있었다가 어떤 계기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그간 성에 관해서 관대하게 대했던 풍토도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문인들이란 본래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이런 풍토에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인의 삶이 기행적이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냐 하면 그건 아니다. 문인들의 기행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인들의 기행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 나와서 그의 기행이 말 그대로 사회적 일탈행위로 처벌받지 않고 기행으로 인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예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문인들의 기행이 좋은 작품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문인은 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경험을 다 해봐야 한다고 못된 행위까지 강요(?)했다고도 하는데... 그런 행위와 좋은 글은 상관관계가 없음을 이성복의 이 책을 읽고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성복은 이런 기행과는 거리가 멀게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시는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범으로 존재했고, 숱하게 많은 시인지망생들에게 읽히고 외워지고 베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시세계에 관해서 대담을 한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1983년 대담으로 시작으로 2014년 대담이 마지막으로 실려 있다. 그렇게 가진 대담들을 이성복 자신이 약간 손보아 엮어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성복의 시세계를 조감할 수 있으며, 최근 불거진 문단의 성추문에 경각심을 불어넣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작은 제목이 '사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대담 중에 그의 말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젊어지려면 끊임없이 자기 반성이 필요하죠. ...  문학의 본질은 정신의 젊음에 있어요. 문학은 젊음에 의해 태어나고, 젊음을 유지하게 해요. 그러려면 항상 낮은 곳에 있어야 해요." (123쪽)

 

낮은 곳에 있다는 것, 그것은 막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는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구분하지 않고 자신에게 온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낮아진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우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우려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으면 비울 수가 없게 된다. 오로지 채우려고만 한다. 그렇게 채우려고만 하는 행위, 그것이 곧 추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그의 말에서 요즘 문단 성추문을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이 시를 쓰는 이유가 인생 때문인데, 그 사람들은 반대로 가는 것 같아. 시를 위해서 인생을 사는 듯한 느낌이 들어." (171쪽)

 

그 사람들이 성추문을 일으킨 문인들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시를 위해서 인생을 사는 듯한 사람들을 확대하면 성추문을 일으킨 문인들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마치, 그런 일이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는 듯한 말을 하는 사람들. 전혀 아닌데...

 

시란 무엇인가? 결국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성복에게 시는 곧 '윤리'다. 윤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추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의 시에서 비루하고 비참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은 인생의 참 의미를 찾기 위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런 삶을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현실의 끝까지 가게 하는 시, 그런 시를 이성복은 쓰고자 한다.

 

"시인은 사람들 멱살을 잡아서 그들이 자꾸 안 보려 하는 걸 억지로 보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204쪽)

 

여기에 어떻게 추문이 끼어들겠는가. 오히려 인생에 대한 통찰, 윤리만이 작동할 뿐이다. 이런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시를 쓸 사람, 그가 바로 이성복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이성복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거의 30년에 걸친 대담들이 실려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다. 따라서 대담 연도 순으로 배치된 이 책의 글들을 읽으며 이성복의 시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성복의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의 시는 낮은 곳에서 세상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보면, 그 그릇에 담긴 그의 시는 어둠과 같다. 어둡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도록 경계선을 보여준 책이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이성복에게서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들어보면...

 

"예술가란 대속자(代贖者), 아픈 사람보다 더 아파하고, 아픈 사람 자신도 모르는 아픔을 대신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277쪽)

 

세상은 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인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 만한지도 모른다. 소수의 일탈자들을 보기보다는 이런 시인들을 찾아 그들을 우리 곁으로 불러오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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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2016.봄 - 1호, 사건들
파란 편집부 엮음 / 파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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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보다 2권을 먼저 읽고, 1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들의 시론이 2권이었다면, 창간호라고 할 수 있는 1권은 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날짜를 중심으로 고찰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김소월부터 2000년대 시인들까지, 우리나라 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날짜, 사건을 중심으로 그것이 왜 사건이 되는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시의 역사를 안다는 것보다는, 시가 현실에서 떨어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또는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 역할을 하는 것이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이라면, 한용운이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한 1925년은 우리나라에서 자유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건이라고 하고... 이런 식으로 이상의 시가 우리 시에 미친 영향, 그리고 해방 후에는 김수영부터 '창비' 그리고 80년 광주에 대한 시인들의 응전, 노동현장을 시에 들여와 우리에게 충격을 준 박노해의 시, 2000년대 소위 미래파라 이름지어진 젊은 시인들의 등장을 고무한 잡지까지...

 

약 80년의 세월을 날짜를 중심으로 시인에게 영향을 준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인 지금, 시인에게 영향을 준 사건들, 그 사건들이 우리나라 시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 그리고 그 사건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까지 다루고 있는 이번 호는, 마치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대략 이런 의미였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나간 것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조망하고, 그것을 다시 현재에 들여오고 있으니... 이 사건들이 그냥 과거의 사건들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시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시가 어떻게 현실에 대응해 왔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 '사건들'이란 주제에서 알게 된다.

 

더불어 시인들의 시 세 편씩이 실려 있으니... 그 시들을 감상할 수도 있으니... 더욱 좋고. 다음 3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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