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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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두 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다소 모호한, 환상적인 소설을 읽은 기억으로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른 책.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나무 위의 남작"이라? 나무에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집어들었는데, 그 짐작이 맞았다. 어릴 시절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다.

 

그냥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이탈리아 어느 도시이니 시민혁명이라는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만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고 나무로 올라간 이래 내려오지 않은 '코지모'라는 형의 이야기를 동생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냥 나무 위에 사는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여기에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여러 사람들 이름도 나오고, 그 시대 상황도 나온다. 물론 구체적으로 그 시대 상황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무 위에서 어느 정도는 관조하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빗겨가지는 않는다. 귀족임에도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코지모, 그를 통해 시대의 변천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로 인해 우리는 그 시대 상황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께 된다.

 

시대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거의 60년에 이르는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 이런 전개 속에서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땅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정치체제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정치체제로 바뀌어도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코지모의 생활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늙어서 죽어갈 때 결국 기구의 밧줄에 매달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땅에서 나무로 올라가고 나중에는 하늘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나무를 보자. 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했다.

 

우리를 하늘과 연결해 주는 존재였으니. 그렇다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나무 위에서 살기로 결심한 코지모는 알게모르게 인간세상에서 나아가 하늘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려올 기회가 있을 때에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이는 다시는 땅에 발을 딛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그의 삶은 이미 이런 땅의 세계에서 떠났음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원하는 삶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힘들다는, 이상의 세계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소설에서 코지모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나무에서 내려온다. 이상은 꿈꿀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땅에 내려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땅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코지모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 그가 살던 곳에 나무는 베어지고 숲은 없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자연과 함께 공존하던 시대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나무가 사라진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 나무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살아갔던 코지모와 같은 인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그냥 나무 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흥미롭게 읽을 수도 있고,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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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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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바로 폭력의 시대다. 그런데 그 폭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를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일상을 살아가는데, 바로 그 일상이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자들도 집에서는 다정한 사람,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하듯이, 우리가 겪고 있는 폭력 역시 두려움과 공포로, 일상에서 벗어난 테러와 같은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모여 지금 이 시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말을 보자.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248-249쪽

 

그럼, 작가는 이런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총 7편의 소설이 한 제목으로 묶여 있는데, 각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이들이 맺는 관계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일상적이다. 그냥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관계일 뿐이다.

 

첫소설인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 나오는 주인공은 가족과 떨어져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근무한다. 이미 가족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 역시 가족과 떨어져 있다. 미스조라는 아버지의 옛애인과 만나지만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다. 이런 형식성은 바로 주인공과 함께 있는 샥샥이라는 고양이 인형에게서 잘 드러난다.

 

굳이 그에게는 생명이 있는 고양이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근무하는 곳에서도 감정의 교류는 없다. 감정의 교류는 낯설다. 미스조가 남긴 거북이를 통해 주인공은 그것을 깨닫는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33쪽)

 

이 얼마나 상냥한 폭력의 시대란 말인가. 사람들과 또다른 존재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줄은 없다는 말은. 그냥 자기 식대로 살다 소멸해 간다는 말은. 이는 나를 만들어가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발언이 아니던가. 그런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고는 있지만,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이 애를 낳고, 그 아이가 죽음의 순간에 처해 있음에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나,

 

돈많은 노인을 죽인 대가로 많은 돈을 받으려 했던 사람들 이야기, 그러나 실제로 죽였는지 또 돈의 출처는 어떤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안의 천사',

 

뚱뚱한 몸으로 돼지라는 별명을 지닌, 일본인과 한국인을 부모로 둔 아이가 북한 국적의 아이와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그러나 그들 역시 어긋날 뿐인 '영영, 여름',

 

나이든 여교사를 등장시켜 어긋나는, 무언가 자꾸 빗나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밤의 대관람차'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하지만 그 집을 얻기까지 미끌어지는 관계를 보여주는 부부와 그 집에 얽힌 사연을 보여주는 '서랍 속의 집'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지식인 엄마, 그리고 영어 유치원 보조 안나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주는 '안나'라는 소설.

 

이 모든 소설들에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되 다르게 살아갈 뿐이고,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을 상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만남에서는 어떤 칼들이 숨겨져 있다.

 

웃음이라는, 일상이라는 관계 속에 위장된 칼들, 그 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으로,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 관계들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갈수록 우리는 관계맺기를 포기하고 이런 '상냥한 폭력'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란, 절대적 개인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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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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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잘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연설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한 연설부터 나이들어서 한 연설까지 실려 있어서 마르케스의 인생사가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짤막한 글들의 모음이고,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알면 이 연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소설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글들도 있다.

 

여기에 그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글들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던 시절,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알려주는 글(스페인어 메시지로 채워질 열린 영혼)을 읽으면 그에게 더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노벨상 수상 연설인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을 읽으면 그가 생각하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다모클레스의 재앙'과 같은 시사적인 문제를 다룬 글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알 수도 있다.  

 

여러 글들 중에서 그가 '시를 위해 축배를'이라는 연설에서 시에 대해서 한 말을 인용한다.

 

  시는 부엌에서 병아리콩을 삶고, 전염병처럼 사랑을 퍼뜨리며, 거울 속에 반복된 이미지들을 비추는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힘입니다.

  저는 한 줄 한 줄 글을 쓸 때마다 항상, 그 성과가 크든 작든, 시라는 포착하기 힘든 정신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제 애정의 증거를 남기려고 노력합니다. 시가 지닌 예언적인 힘, 그리고 죽음이라는 숨죽인 힘에 맞서 거둔 영원한 승리 때문입니다. 34-35쪽

 

그의 작품에 이 말을 적용할 수 있겠다. 이런 말을 듣고 그의 작품을 읽으면 그의 작품에 대해서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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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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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다시 읽은 희곡이고, "계엄령"은 처음 읽은 희곡. 두 희곡의 공통점은 독재, 또는 전제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정의의 사람들"은 러시아를, "계엄령"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압제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희곡이라고 보면 되는데, 정의의 사람들에서는 테러로 권력을 휘두르는 한 개인을 암살하는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면, "계엄령"은 페스트라는 서양을 휩쓸었던 질병에 독재를 비유해서 전개하는 희곡이다.

 

"정의의 사람들"이나 "계엄령"이나 생각할 것이 많은데, 우선 폭력과 사랑의 문제다. 그리고 복종과 저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려움.

 

더 큰 사랑을 위해서 작은 사랑을 포기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당하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어떠해도 된다는 말로 전이가 될 수 있는데...

 

민중을 위한 사랑이 독재자를 위한 테러로 나타나는데, 테러를 하기 전에 이들이 고민하는 점, 우리 역시 고민해야 하고, 테러가 성공한 뒤에 대공비와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과연 테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어려운 문제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되는가라는 질문인데... 이것이 자칫 공리주의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이란 절대적이라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독재를 물리치기 위해서 한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나타나게끔 되어 있는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개인이 공고하게 그 구조를 지탱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도 할 수 있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희곡, 정의의 사람들에서는 이 질문에서 사회구조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그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인물인 대공을 암살할 생각, 그 암살에 대한 정당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과연 대공의 암살 이후 사회구조가 바뀌었는가? 이는 우리나라 박정희의 죽음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과 상통한다. 사람만 바뀔, 그것도 더 좋지 않은 쪽으로 바뀔 확률도 많다.

 

반면에 계엄령엔 이러한 테러는 나타나지 않는다.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 길, 여기서는 특정한 개인을 암살하는 테러가 나오지 않는다.

 

독재자에 대해 지니고 있는 두려움, 그 사회에 퍼져 있는 이념에 대한 두려움이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독재에 따르게 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지배층은 말할 것도 없고 민중들 역시 두려움에서 독재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냥 순응할 뿐이다. 그들이 말살정책을 펴도 두려움에 쌓인 민중들은 말살될 뿐이다.

 

이들이 말살되지 않기 위해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어있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 두려움을 없앤 깨어있는 그 사람이 독재자에게 자신의 온몸을 걸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랬을 때 남들도 깨달을 수 있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의의 사람들이 개인의 투쟁을 중심으로 개인을 제거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계엄령은 독재를 물리치는 개인을 주인공으로 하고는 있지만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도 독재를 물리칠 수 있음을, 어쩌면 우리나라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그런 희곡이다.

 

박정희와 박근혜에 비유할 수도 있는 이 두 희곡들, 독재, 전제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 수단과 목적에 관한 고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좋은 작품은 시대, 나라를 초월해 적용될 수 있다더니, 우리나라와 먼 시대, 먼 나라 이야기를 다룬 이 두 희곡이 우리나라 상황에 이렇게 적용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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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인 김승옥 - 김승옥의 문학과 예술에 바침
백문임 외 지음 / 앨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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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하면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이 떠오른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중고등학생에게 필독도서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 국어 시간 또는 문학 시간에 배웠던 작품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 작품들은 그의 20대 작품이고, 그 이후의 작품으로 유명한 작품은 별로 없다.

 

초기에 명작을 쓰고 그 이상의 작품을 쓰지 못한 작가, 그래서 김승옥은 내게는 잊혀진 작가였다. 그냥 아주 먼 오래 전 작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승옥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친구 사이라는 김지하처럼 여러 면에서 언론에 노출이 된다면 친숙한 작가로 인지하고 있겠지만, 김승옥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문득, 그가 쓰러졌다는 기사를 본 듯도 한데...

 

이 책을 통해서 김승옥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김승옥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를 인터뷰한 글도 실렸으니.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은 맞고, 언어를 잘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회복되어 가는 중이라고 하고, 이 책이 나온 2005년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다. 아마도 젊은시절의 김승옥은 되지 못할지라도 살아있음으로 그는 여전히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김승옥의 예술활동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고찰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김승옥 헌정논문집이라고 해도 될 책인데...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김승옥의 다른 면모들을 알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다.

 

소설가로 유명한 그가 먼저 시사만화가로 출발했다는 사실, 그는 '파고다 영감'이라는 4컷짜리 만화를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쓰지 않는 기간에 영화 감독으로 또 영화 각색자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70년대에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의 각색자가 바로 깁승옥이었고, 그가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책 제목처럼 만화, 소설, 영화의 장르에 참여한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모두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년에 쓰러져서 이들을 종합하는 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승옥은 1960년대의 소설 몇 편으로도 우리에게 중요한 작가로 남아있게 된다.

 

일제시대의 소설을 넘어서서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한, 새로운 감성을 선보인 작가 김승옥. 어떻게 김승옥의 독자층이 형성이 되었고, 이들은 왜 김승옥의 소설에 열광했는가부터 시작해서 김승옥의 변모를 다룬 글들이 실려 있다.

 

김승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이 책 한 권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안 르네상스적 예술가인 김승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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