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개정판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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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집에는 6편이 실려 있다. 본래 7편인데 우여곡절 끝에 한 편이 삭제되고, 다시 출판되어 6편이 실려 있다. 작가란 이야기를 펼쳐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이 어떤 소재를 어디에서 취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그래도 여섯 편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히 감동적이다. 마음을 울리는 소설들이 많이 실렸는데, 한편 한편이 독립적이면서도 지금 우리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성성'과 관련된 소설들이 많았는데...


강화길 '음복',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장류진 '연수'가 그런 작품들이다. 


집안에서 오냐 오냐 귀함을 받고 자란 남편. 그 남편을 향한 적의를 절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남편.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시어머니 등등. 강화길 소설에서는 집안에서 누가 권력자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정 권력을 쥔 자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하고자 하는 말을 그냥 하면 될 뿐. 그 행동과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 한 집안의 제삿날에 펼쳐지는 강화길의 '음복'은 그점을 아내이자 며느리, 딸인 화자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서늘한 느낌을 받는데, 집안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민첩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직도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무딘 것이 자랑인 것처럼 말하는 남성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집안에서 권력자이기 때문이라는 것. 


강화길의 소설에서 나아가면 비혼을 주장하는 여성이 나오는 장류진의 '연수'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 집안에서 궂은 일을 다하면서도 눈치를 보는 사람으로 살아가느니 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사람. 그 사람의 눈에 비친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삶은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는 삶이다. 자신과 자식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즐기기보다는 자식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삶. 그런 삶을 거부하는 딸의 모습.


이런 모습은 '팬티'에 관한 일화로 강화된다. 팬티란 무엇인가. 가장 은밀한(?) 부위를 가리는 존재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반대로 다른 사람 대신 치우고 싶지도 않은 그런 존재 아니던가. 그런데 아내로서 남편의 팬티를 빨거나, 아이들의 팬티를 세탁해서 중고로 내놓은 그러한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화자가 나온다.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뒷받침하는 삶. 드러나지 않는 삶. 자신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에 대해서 그것이 특정한 성별에게만 부여된다는 부당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장류진 소설이다. 이런 일이 가정에서만 일어날까? 아니다.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그 점을 보여준다. 능력있는 강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 교수나 강사들과는 다른 반응을 받는 사람을 지켜보는 화자를 등장시켜서, 그들이 걸어온 길이 쉽지 않은 길이었음을, 그래서 그런 그들이 보여준 '희미한 빛으로도' 지금껏 많은 여성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그 빛은 '희미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낙태에 관한 소설인데, 쉽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많은 생각. 여성의 관점, 생명의 관점, 선택권의 관점, 그리고 행복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는 소설인데...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니, 더 많이 고민해 보고 생각해 봐야 겠다.


이런 경향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김초엽 '인지 공간',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다. 두 작품 다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장희원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라고 한글로 쓰면 우리는 대부분은 나와 너가 함께 하는 '우리'를 생각하는데, 괄호를 치고 동물들을 기르는 장소인 '축사(畜舍)'라고 썼다. 우리는 '우리(畜舍)'에 갇히길 거부하는데, 이것은 '우리(畜舍)'를 우리와는 다른 장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畜舍)'의 환대라니.. 반대로 우리가 환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환대받고 있다니...


이때 우리는 소위 '정상가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우리(畜舍)'는 그 틀을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보통 '정상가족'을 생각하는 우리를 환대하는 소수자의 삶을 사는 '우리(畜舍)'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의미가 있다.


무엇이 '정상'인지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畜舍)'라는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면서 다른 '우리(畜舍)'들을 배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들이나 우리나 다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畜舍)'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김초엽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환상적인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등장인물이 '이브'라는 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생각하게도 한다. 제목 역시 '인지 공간'이다. 모두가 공동 지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개인 지식을 생각하는 '이브' 


그 '이브'는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아니 자격미달이라는 이유로. 또는 다른 생각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것은 공동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왜 우리가 모두 공동지식만을 지녀야 한다는, 인지 공간에서만 살아가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브'를 지켜보는 '제나'를 통해, 또 '이브'의 뒤를 이어 '인지 공간'을 떠나는 제나를 통해 어쩌면 개인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자리잡는 과정을 쓴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삶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개인을 생각하고,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식하고 개인으로서 살아가려는 모습이 이 소설에서 '이브와 제나'를 통해 표현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간략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 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은 한편 한편이 다양한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읽고 읽고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관련지어 많은 이야기를 하면 좋을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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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재미있게 있었던 기억이 리뷰를 통해 새록해지네요! 즐거운 하루되십시요!ㅎ

kinye91 2021-02-08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작가들 소설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요. 막시무스 님도 책과 함께 즐거운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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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데 거의 의식하지 않고 지낼 때가 행복할까? 아니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될 때가 행복할까?


이런 사람과의 관계를 공기와 사람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을까? 우리가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듯이, 공기는 우리 곁에 늘 있기 때문에 희박해지지 않는 한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좋을 때는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내 삶일 뿐이다. 내 삶일 뿐인 관계에서 그 사람이 문득 내게 의식이 되는 순간, 거리가 생긴다. 거리로 인해서 의식을 하게 되고,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 의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단순하게 도식으로 나타내면 '의식-의심->갈등->파탄'으로 가는 길과 '의식->의심->갈등->해소'로 가는 길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서 평생 상대를 의식 안 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랑이란 행위가 생각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면 사랑은 이미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외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존재와 잘 관계맺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런 의식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때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결실을 맺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나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의식이 의심으로, 의심이 결국 파탄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고, 파탄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의심을 묻어버리는 일도 많다.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작품들이 상대방을 의식하는데서 나아가 의심으로, 결국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황정은이 쓴 '상류엔 맹금류' 최은미가 쓴 '창 너머 겨울' 손보미 '산책'이 그런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상대를 의식하면서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그런 소설들. 이 소설들에서는 함께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무언가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는 듯한 모습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받아들인가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이들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에서 담을 쌓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러면서 상대가 모든 것을 보여주길 원한다. 세 소설 중에서 특히 손보미의 '산책'이 그런 느낌을 준다. 


반면에 조해진이 쓴 '빛의 호위' 윤이형의 '쿤의 여행' 최은영이 쓴 '쇼코의 미소'는 상대를 의식하지만 그 상대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다. 상대는 내 삶을 피폐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세 소설은 읽으면 새로운 삶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은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러한 의식으로 인한 파탄도, 또 해결도 함께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서는 관계의 두 방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한 쪽면만 나타날 수는 없기에, 우리들 삶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번 작품집이다.


다만,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게 나만의 철옹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계에 다른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함께 하되 다른 삶을, 다르되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소를 내 삶에 마련하는 것. 거기에 성공하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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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통해서 소설을 읽는 좋은 시각을 배웠네요! 잘 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한주 되십시요!

kinye91 2021-02-01 10: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 님, 좋은 한주 되십시오.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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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상집에는 다양한 내용의 소설이 실렸다. 어느 하나로 정리하기가 힘든, 또 일곱 편의 소설을 몇가지 주제로 나누기가 힘든 그런 소설들이다. 그러니 이 수상집에 있는 소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또는 어떤 공통점을 찾는 일은 포기하자.


젊은작가들이란 나름 기성세대를 뛰어넘으려는 실험을 하는 패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기존 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들이 젊은작가상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해 무언가 새로운 주제, 새로운 내용, 새로운 형식을 잘 드러난 작품들이 젊은작가상이라는 상을 수상했다고 봐야 하는데...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큰 느낌을 주지 못했는데 첫작품 김종옥이 쓴 '거리의 마술사'는 마음에 남았다. 왕따를 다룬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다름에도 종류가 있다. 찬사를 받는 다름과 멸시를 받는 다름. 그냥 나랑 다르네 하고 인정을 받는 다름. 이렇게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마지막 부류, 나랑 다르네 하는 범주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쌍둥이조차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아서 모르지만 복제인간이 나타난다고 해도, 복제인간과 세포(핵)를 제공한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어, 나랑 다르네. 이것은 배제가 아니라 인정이다. 함께 살아갈 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모습.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다수는 다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이 다를 때는 양 쪽으로 분화가 된다. 찬사와 멸시로.


찬사를 받는 다름은 뛰어남으로 인정받는다. 숭앙의 대상이 된다. 우상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다름으로 인해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다름을 자랑스러워 하며 지내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 다름을 부러워할 뿐이다.


김종옥 소설에서 이런 찬사를 받는 다름의 부류에 속하는 인물은 안나와 거리의 마술사다. 안나는 뛰어난 외모로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학생으로, 그 학교 아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생활을 하는 안나에게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무시도 못한다. 그냥 경이에 찬 눈으로 안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야말로 탤런트다. 재능이 많은 사람. 부러운 사람.


반면에 멸시를 받는 인물로 남우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남우를 영어로 'Rain Man'으로 낙서해 놓는 장면이 나온다. '레인 맨' 자폐를 앓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그런데 학생들은 이 '레인 맨'을 인정으로서가 아니라 무시를 넘어서는 멸시로 낙인 찍는다. 


남우는 학교에서도 특이한 걸음걸이와 다른 행동들로 학생들과 다르다고 인정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나랑 다르네 정도였다. 그러다 반대쪽 다름에 있는 안나와 짝이 되면서 정확하게 안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다름의 천칭이다. 하나는 찬사로서의 자리, 하나는 멸시로서의 자리.


결국 남우는 거리의 마술사를 흉내내지만 실패하고 만다. 남우의 다름은 거리의 마술사처럼 다른 사람의 찬사를 자아내지 못하고 죽음을 부르고 만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다름을 다르게 대한다.


자신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사람의 다름에는 찬사로, 자신보다 한참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다름에는 무시 또는 멸시로,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인정으로. 


소설은 그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지 '왕따'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관한 소설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사람들.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는 다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학교를 넘어서 직장에서도, 또 사회 전반에 걸쳐 다름으로 인한 '왕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왜 다름이 우리를 더 다양하게 풍요롭게 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다름에도 경계를 긋고 마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경계의 확장 아닐까? 멸시를 받는 다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나친 칭송을 받는 다름 역시 일반 삶에서 배제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대다수의 인정받는 다름 속에서 두 다름을 배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가 속해 있는 다름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야 한다. 경계를 점점 더 엷게 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그 경계들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게. 경계가 사라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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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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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내 세계를 잠시 잊기 위해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내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그냥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기 위해서 들어가기도 한다.


그만큼 소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열린 세계다. 비록 소설 속에서 닫힌 세계로 나타나더라도, 읽는 사람에게는 열린 세계다. 언제든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그런 세계. 특히 단편 소설은 그렇다. 


이번 젊은작가상 3회 수상작품집에서는 세 방향의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 먼저 따스한 세계다. 그냥 읽으면서 잔잔하다, 덤덤하다고 느끼는 그런 세계. 그럼에도 그 세계 속에서 위안을 느낀다.


김미월이 쓴 '프라자 호텔'과 황정은이 쓴 '양산 펴기'가 그렇다. 두 소설을 읽으면 그 잔잔함에, 그리고 어려운 현실을 잠시 잊고 무언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이 두 소설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따뜻한 세계, 인정과 위안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잠시 마음을 편하게 놓아두게 된다.


두번째 세계는 미로의 세계다. 길을 잃은 세계. 여기서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지만, 영원히 미로에 갇혀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김성중이 쓴 '국경시장'과 이영훈이 쓴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다. 현실에 없는 세상에 들어가 경험을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팔아 다른 물건을 산다는 설정은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을 잃은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국경시장의 인물들이 현실로 나오지 못하고 마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자신의 기억을 판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이니까. 물신에게 자신을 파는 행위는 결국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영훈 소설은 미로에 들어가지만 나온다.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배설을 한다. 미로 속에 갇힌 삶에서 그것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므로 이 인물에게는 새로운 길이 나타날 수 있다.


세번째 세계는 닫힌 세계.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쌓고 사는 세계다. 손보미가 쓴 '폭우'와 김이설이 쓴 '부고' 그리고 정소현이 쓴 '너를 닮은 사람'은 함께 하지만 결코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닫혀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설정이나, 갈등이 있을 때 문을 닫고 나가는 행위(폭우),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일을 추진하는 모습(부고), 나에게 보이는 나의 또다른 모습을 부정하고자 하는 행위(너를 닮은 사람)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이번 작품집은 서로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정리할 수 없다고. 이보다 훨씬 많은 세계가 있다고. 당신은 소설을 통해서 어떤 세계를 경험하고 있냐고.


아니, 소설의 세계를 통해 당신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2012년에 나온 소설집이지만, 이 소설집에 나온 세상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들은 여전히 소설을 통해서 수많은 세계를 들락거리고 있다. 나는 어떤 세계에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은가?


소설을 통해서 더 많은 세계를 만나는 일은 내 세계를 더 다양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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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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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0년 전에 수상한 작품들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계속 존재한다. 소설은 당대 현실에 존재하기도 하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야 소설이라는 이름을 계속 지닐 수 있게 된다.


7명의 작가가 선정되었고, 작품도, 작가의 말도, 해설도 모두 7개다. 그러니 이 작품집에는 심사경위와 심사평까지 합쳐 23개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이다.


젊은작가상 답게 작가에게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젊은 비평가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있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요즘 누가 평론을 읽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작품집을 읽다보면 평론 부분을 읽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이해한 작품과 평론가들이 말하는 부분에서 어떤 교집합이 나오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교집합을 토대로 합집합으로 나아간다. 하여튼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김애란이 쓴 '물속 골리앗'은 홍수라는 재난을 당한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난으로서의 홍수는 예전부터 늘 전해오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그것을 비튼다. 재난으로서의 홍수는 징벌로서 의미를 지닌다. 인간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징벌.


그렇다면 홍수는 그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 자들을 징계해야 한다. 그것이 옛이야기에서 전해주는 재난으로서의 홍수다. 징벌로서의 홍수. 그러나 현대사회에 들어서 홍수는 힘있는 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들을 징계하지 못한다. 오히려 힘이 없는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 빠진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재개발되는 아파트. 이주비용이 턱없이 적어 이주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족. 설상가상으로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표류. 


열심히 살아왔지만 오히려 홍수의 피해는 무고한 가족을 덮친다. 현대 재난은 이렇게 불평등하게 다가온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소년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그 희망이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속 골리앗이라고 하지만, 거꾸로 우리에게 골리앗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이 최후로 올라가는 곳이다. 홍수로 골리앗의 중간부분까지 잠겨있다는 것은, 이미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골리앗에 올라 주장을 하듯이, 소년은 골리앗에 오른다. 우리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장소. 그곳이 바로 골리앗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한없이 힘든 과정 속에서 그래도 살아남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밑에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골리앗 위에 있는 사람과 연대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골리앗 위에 있는 사람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위에서 자신과 함께 하려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견딘다. 소설에서 소년이 "누군가 올 거야."라고 조그맣게 속삭였듯이.


비슷한 의미의 작품이 정용준이 쓴 '떠떠떠, 떠'이지 않을까 싶다. 말을 더듬어 거의 하지 못하는 남자와 기면증으로 툭하면 쓰러지는 여자. 이들 역시 사회에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자리를 잘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럼에도 이들은 살기 위해서 탈을 쓴다. 사자와 탈과 팬더의 탈, 그리고 서로 의지한다. 한 쪽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내면서 견뎌내는 것.


결국 사랑이란 상대의 단점을 고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려는 것, 아니 단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단점도 함께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이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가 또다른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다섯 편의 소설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이 두 편의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전세계가 재난을 당하고 있는 이 때,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에게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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