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땅 그들의 노동에 1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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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이다. 여러 단편이 묶여 있는데, 배경은 농촌이고, 인물들은 농민들이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벗어나지 못하는 이라는 말보다는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땅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땅을 통해 생명은 지속된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땅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농민이 되지 않는다.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땅에서 벗어난 농민. 버거의 이 소설에서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대도시의 파리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이들이 살아야 할 장소는 땅을 일구며 사는 곳이다. 땅과 같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이들은 살고 죽는다. 죽음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병원으로 가는 도회지의 삶과는 다르게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죽음을 자신에게 친숙한 곳에서 맞이하고 싶어한다. 죽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오게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땅과 함께 사는 삶은 자연의 일부인 삶이다. 돈을 앞세우는 삶이 아니라 생존을 우선하는 삶이다.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기르는 가축을 도살하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렇게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여기에 어떤 수사는 필요없다.

 

이런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루시 카브롤의 세 가지 삶', '루시 카브롤의 두 번째 삶', '루시 카브롤의 세 번째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삶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 루시 카브롤, 소설에서는 별명으로 더 불리는데, 코카드리유라고 한다. 그녀의 삶을 보면 동생들에 의해 쫓겨나 살지만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간다. 그러고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루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들보다 작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이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농민(통칭 농민이라고 한다)들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회에서 비중이 더 작아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루시는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동생들에 의해 쫓겨난다. 쫓겨나지만 땅과 더불어 계속 살아간다. 땅에서 나는 것들이 루시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루시가 땅을 떠나려 할 때, 결혼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고 할 때 더이상 루시의 삶은 없다.

 

그런 삶을 위해서 루시는 돈을 모아놓지만, 돈은 도시의 속성, 자본의 속성이고, 땅과 유리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더이상 루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는 농민들이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더이상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루시의 세 번째 삶에서 환상적인, 귀신이 된 사람들이 등장해 집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이제 현실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삶은 환상 속에서 계속된다.

 

이렇게 존 버거의 '끈질긴 땅'은 땅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큼 존 버거의 소설은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모습이 지금은 많이 낯설지만 원초적인 우리들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노동에]라는 제목으로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2,3부가 남았다. 2,3부 역시 땅과 함께 살아가는 땅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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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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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여운이 남는다.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는 순간,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속에 여러 생각들이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작가, 특히 어슐러 르귄과 카프카가 생각난다. 생뚱맞게 왜 카프카?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에서 버려지는 사람, 세상이 변했다고, 이익이 남지 않는다고 이미 있던 관계들을 무시해버리는 사회. 그런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다.


우리는 당연히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세계로 갈 때 너무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서양의 유토피아는 좀 다르지만, 우리 동양에서 무릉도원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무릉도원에서 며칠 보내고 오면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는 몇 세대가 흘러가고 만다.


그래서 다시는 무릉도원을 찾아갈 수 없다. 그곳은 그곳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머나먼 우주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마련했다면? 그곳으로 이주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그곳까지 가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면? 우주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더 빠르고 더 값싼 방법이 발견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은 폐기되고, 그곳에 가는 길이 없을 때는 가차없이 그 노선을 가차없이 폐기하고 말 것이다. 마치 궁벽한 마을에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교통편을 없애는 일과 같이.


그렇다고 가지 않을까? 그곳에 가족이 있다면? 지금 속도로 빛의 속도로 가도 만날까 말까 한데,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래도 그곳으로 가려고 할까?


당연히 가려고 한다. 얼마가 걸리든 가지 못하든 상관없다.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소설에서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82쪽)


그렇다. 루카치가 창공의 별을 보고 길을 찾고 떠날 수 있던 시대는 아름다웠다고 했듯이, 비용과 효율을 넘어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가는 이의 모습. 안나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지만, 이윤 때문에 버려지는 모습에서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의 효용가치가 변하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데,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 그레고리 잠자는 죽음에 이르렀지만, 이 소설의 안나는 죽을지라도 그곳을 향해 가고자 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카프카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이제 우리는 효용을 위해서 사람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함을 안나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사람은 효용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임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SF소설이 바로 우리 현실을 빗대어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이 소설집 처음에 실린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도대체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여겼던 세상이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사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삶. 그런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이고, 그런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다. 르귄의 소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스펙트럼'이란 소설을 보면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외계인과 아직 조우하지 못했는데, 과연 우리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만날까?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외계 생명체와 만나는 장면을 그렸는데, 거기에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낯선 존재를 우리의 사고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점에 의문을 제시한다.


우리가 문자언어로 생각을 정리하고 의사소통을 주로 하지만, 외계 생명체도 문자를 통해서 그런 활동을 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는 색채를 통해서 소통을 하는 외계 생명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만큼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자세로 다가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다른 소설들에서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라는 소설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SF소설이라는 특성으로 지금은 불가능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에서 차별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게 된다.


SF소설이 지닌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 미래의 가상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 결국은 현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따라서 SF소설이라고 해서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SF소설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상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하여 우리는 그 가상 공간에서 현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초엽의 소러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현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읽고 나서 깊은 여운을 주는 소설.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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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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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희 시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났는데, 고학력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을 보아도,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보아도 여학생이 많다. 그런데 정규직의 비율을 보면 여성의 비율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조금씩 비중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낮은 편이다.


이 소설에서 똑똑한 여학생들은 한국어 강사로 일한다. 비정규직 강사. 그들에게는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온갖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들에게는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더 강요된다.


그나마 대학강사라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수업을 계획할 권리도, 학생들을 재량껏 평가할 권리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매뉴얼대로만 해야 한다. 마치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이들은 거대한 기계를 이루는 한 부속품일 뿐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이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학교에서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교육 장사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베트남 학생들은 배움이 목적이기보다는 한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려 한다. 학교와 그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많은 수의 베트남 학생들이 등록을 하게 되고, 그들을 가르칠 강사가 필요해서 많은 수의 강사가 채용된다.


학생 수에 따라서 다음 학기 계약이 되느냐 한 되느냐가 걸려 있는, 그 많던 여학생이 언제 계약이 만료될 지 알 수 없는 시간 강사로 살아가게 된다. 박사과정을 밟은 한희조차도 책임강사라고 하지만 계약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육 장사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이 소설 [코리안 티처]다.


2. 여성을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한국인 강사들이 이 소설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그 많던 여학생들이 비정규직으로 삶을 이어가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여성이기도 하다. 몸으로서의 여성.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공유한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런 면에서는 동서양 학생들이 차이가 없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 차이보다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한다.


학생들은 강사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예쁘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공유한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선이가 그렇다. 


자신은 선의를 다해 가르치는데, 그들은 선이를 교사이기 전에 여자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꼭 외국인 학생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교사의 사진을 찍어 올리고 공유하는 사례가 많이 문제가 되었으니.


여성을 능력보다는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그것이 이 소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선이뿐이 아니라 그 점에서 벗어나려는 미주에게서도 그렇게 소비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 면에서 부작용으로 작동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생들과 친하고 잘 지내던 가은 역시 몸으로 소비되는 자신을 보면서 강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3.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선이로 시작해, 미주, 가은, 한희의 이야기로 봄학기, 여름학기, 가을학기, 겨울학기가 서술되고, 마지막에 겨울단기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학교에서 베트남 학생들이 집단으로 도망을 가니,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중국인 학생들을 단기로, 그것도 학교 측에서 비용을 거의 대주는 식으로 받으들여 전체 정원을 늘린다. 그러면서 다시 단기로 강사들을 채용하는데, 이때 처음에 등장했던 선이가 등장한다.


물론 결과는 행복하지 않다. 선이는 계약이 만료되었다가 단기에 다시 등장하고, 미주는 내용 증명을 받아 재계약이 안 될 처지에 있으며, 가은은 충격을 받고 강사직을 그만두었으며, 한희는 책임강사 직을 휴직하고 아이를 낳게되면서 다시 자기에게 주어졌던 가은의 자리로 갈 수 없게 된다. 단기 강사직을 다시 했던 선이가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던 폭죽으로 기숙사가 불타버리고 마니 선이는 다시 계약하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한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희는 한국어에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가, '한국어의 미래시제 교수법'이라는 글을 쓰려고 한다. 미래는 있어야 한다. 바로 한희에게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희는 영국으로 가자는 제이콥의 제안을 거절한다. 한국에서 자신은 버티겠다고 한다. 이제 한희에게 미래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와야만 하는 시제가 된다.


여기에 소설의 끝에 다시 가은이 등장한다. 지방의 다문화언어강사 면접 대기실에 있는 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에 열심히 살았고, 현재에도 충실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미래는 불확실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시제였다.


그렇게 끝나면 문정희 시 제목처럼 된다.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다. 갔는가로 끝나지 않고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겠다로 소설을 맺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한국어 강사들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삶과 교육으로 장사를 하는 대학의 행태들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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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6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로 뽑혀서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kinye91 2021-10-06 12:06   좋아요 2 | URL
이 소설 읽으면서 ‘82년생 김지영‘도 생각났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은데, 그것을 조금씩 깨뜨려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쥐덫 동서 미스터리 북스 3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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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추측하는 재미. 추리소설은 그러한 면에서 독자가 예상하는 결말을 넘어서야 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탐정과 범인이 머리 싸움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서 독자와 치열한 머리 싸움을 한다.

 

작품 곳곳에 단서를 심어놓아야 하지만, 그 단서를 독자들이 너무 쉽게 알아채서는 안 된다. 또한 결말이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야 하지만, 너무 벗어나서도 안 된다. 그러면 독자의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소설 속에 단서가 있고, 그 단서들이 결말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추리소설이 좋은 추리소설이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이 점에서 좋은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쥐덫'은 장편소설이 아니고 단편소설이다. 여러 소설이 한 권으로 묶여 있는데, 탐정도 세 명이 나온다. 포아로와 마플, 그리고 해리 퀸.

 

해리 퀸은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탐정인지 모르겠는데, 이 책 '연애를 탐정한다'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총 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는데, 해리 퀸이 나오는 소설은 이 중에 한 편이니, 그를 제외하자.

 

그렇다면 포아로와 마플이 남아 있는데, 둘의 추리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이런 기대를 지니고 이 책을 읽었는데, '쥐덫'에는 둘 다 나오지 않는다. 포아로도, 마플도 없다.

 

다만,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고립된 하숙집, 그곳에서 범인은 누구인가? 하숙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의심가는 사람을 추측하면서 읽어가는데... 범인은?

 

그런 재미가 있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 되는데, 결말을 보면 납득이 된다. 이것이 좋은 추리소설의 조건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집에서 미소를 짓게 하는 추리는 마플의 추리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찾아내는 솜씨. 그런 과정을 읽어가면서 주의력, 집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포아로 역시 아주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으면 추리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지만,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생각하게 해서 좋다.

 

여기에 인과응보라는 말과 돈에 현혹되어 살인을 저지르지만, 결과는 돈도 자신의 명예도, 또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음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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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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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주장하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주목받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는 노동자들. 식민지 시대 노동자만이 아니라 지금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체공녀 강주룡. 강주룡이라는 이름은 을밀대와 더불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을밀대 위에 올라가 자기 주장을 펼친 노동자. 그리고 그 강주룡이라는 이름과 지금 우리 시대의 김진숙이 겹쳐진다. 을밀대 위와 타워크레인 위.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다 얻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도 불법이라는,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소설은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간다. 간도에서의 삶, 결혼, 남편의 죽음, 조선으로 귀환, 다시 시집을 보내려는(딸을 팔려는) 가족으로부터 도망,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으로 살아가는 모습, 파업에 참여, 을밀대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냥 읽어도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질곡이 있음을 강주룡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 다음에 독립군에 참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강주룡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표현된 강주룡의 모습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니, 전쟁은 확실히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근대적,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이 전근대적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이 소설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데, 이 점은 강주룡이 평양에 와서 노동운동을 하게 될 때에 겪게 되는 일과도 겹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들이 콜론타이 저작을 읽고 토론을 한다. 정작 여기에 참석한 여성은 강주룡 혼자 뿐. 이때 강주룡이 그들에게 한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만하다. (201-202쪽)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독립운동을 하건, 노동운동을 하건 거기에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소설은 비켜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루면서 강주룡을 통해 지금 너희들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소설은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강주룡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강주룡의 외침이 허공 중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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