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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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주장하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주목받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는 노동자들. 식민지 시대 노동자만이 아니라 지금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체공녀 강주룡. 강주룡이라는 이름은 을밀대와 더불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을밀대 위에 올라가 자기 주장을 펼친 노동자. 그리고 그 강주룡이라는 이름과 지금 우리 시대의 김진숙이 겹쳐진다. 을밀대 위와 타워크레인 위.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다 얻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도 불법이라는,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소설은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간다. 간도에서의 삶, 결혼, 남편의 죽음, 조선으로 귀환, 다시 시집을 보내려는(딸을 팔려는) 가족으로부터 도망,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으로 살아가는 모습, 파업에 참여, 을밀대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냥 읽어도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질곡이 있음을 강주룡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 다음에 독립군에 참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강주룡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표현된 강주룡의 모습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니, 전쟁은 확실히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근대적,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이 전근대적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이 소설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데, 이 점은 강주룡이 평양에 와서 노동운동을 하게 될 때에 겪게 되는 일과도 겹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들이 콜론타이 저작을 읽고 토론을 한다. 정작 여기에 참석한 여성은 강주룡 혼자 뿐. 이때 강주룡이 그들에게 한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만하다. (201-202쪽)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독립운동을 하건, 노동운동을 하건 거기에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소설은 비켜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루면서 강주룡을 통해 지금 너희들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소설은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강주룡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강주룡의 외침이 허공 중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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