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과 요리를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 세 번째 부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서 잘하려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헬렌 자신이 세 번째 부류다. 그들 부부의 삶 자체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실천가적 삶이다. 그러니 헬렌이 자신을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자. 이 책은 육신에 영양을 공금하기 위해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는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는 말은 그들 부부가 실천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헬렌 니어링이 주장하는 소박한 밥상이란 채식 위주의 제철 재료를 가지고 최소한의 조리기법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 적게 먹고, 단순하게 먹는 것이다.

주부가 요리를 하느라고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간단하고 소박하게 먹고 시간

을 아껴 개인의 발전을 위해 시간을 쓰라는 말은 반복되는 부엌일에 지친 주부들을 위로하

기에 충분하다.

 

헬렌 자신이 윤리적 소비 개념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실천한 생활 자체가 윤리적 소

비다. 즉 탄소가스 배출의 주범이 되는 수입 재료 안쓰기, 제로 거리를 실천한다. 자급자족

생활화, 비윤리적인 육식 거부 등은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게 한다.

 

굽기, 튀기기를 생략하면 냄비와 팬을 끝없이 닦아야하는 고역도 줄어든다. 접시나 그릇 하

나로 먹자. 음식 준비뿐 아니라 불필요한 도구와 그릇의 사용도 과감히 줄이자.(28쪽)는 주장은 주방 세제를 쓸때 마다 죄책감이 드는 주부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제안이다. 이렇듯 그녀가 말하는 견고함을 추구하자는 것은 실천가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드는 음식은 각종 조리료를 넣어 “맛”을 낸 것 보다는 당연히 “영양가가 우선이다.(28쪽)”

 

영양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나아가 생식을 주장한다. “조리는 파괴하는 것이요, 재로 만드는 것이다. 음식을 조리하면 정말로 음식이 죽게 될 수 있다.(37)

생식은 수행자들의 수행법중 하나다.

 

그러나 가족, 특히 어린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주부가 헬렌이 주장하는 섭생법을 얼마나 따

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고 그녀가 앞뒤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음식을 먹는 방식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상대적이다. 매사에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세상에 가능한 최소의 피해를 끼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다.(70쪽)”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의 경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입품이 아니라 협동조합 제품을 사용하는 것. 적게

먹는 것, 커피를 줄여 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생각은 있어도 실천은 어렵다. 헬렌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들 부부가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을 인간의 노예로 만든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해서 동물의 노예가 된다. 목축업자, 우유 짜는 이, 양치기, 목동, 농부, 도살자 모두 가축의 시중을 드는 일에 관련된 노동을 한다. 키우고 돌보는 데 쓰는 시간과 노력을 더 나은 인간을 키우고 돌보는 데

쓰면 좋으련만.(71쪽)“ 이라고 안타까워 하는데 이는 윤리적 소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그렇게 주장한 바 있다.

 

조금 더 들여다 보면 그녀는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쓰지 말 것. 재료 자체의 풍미를 즐길 것, 소금 후추 양을 줄이거나 거의 사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재료 자체의 염분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빵은 먹지 말고, 과일과 야채를 먹고 이것만으로도 수분 섭취는 충분하니 물도 더 먹을 필요가 없다.

 

헬렌의 밥상을 따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가족의 동의다. 가족 모두 소박한 밥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기 아이를 둔 부모는 더 고민이 많다.

야채와 과일을 일년 내내 공급하기 위해 과일 나무와 채소 밭이 있어야 한다. 나만의 텃밭

이 있어야 가능한 생활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어려운 점이 더 많다.

야채와 과일 값이 비싸다. 견과류도 값이 비싸다. 오히려 고기 값이 싸서 가난한 도시 서

민들은 값비싼 채소, 과일, 견과류를 먹는 대신 고기를 먹는 일이 생긴다.

음식 종류가 다르다. 쌀이 주식인 우리 식단은 익히고 찌고 무치는 음식이다.

 

그러나 나물 반찬을 할 때 화학 조미료를 넣어 똑같은 맛을 내지 않고 최소한의 소금과 기

름만으로 나물 맛을 살리는 조리법은 응용 가능하다.

기본은 같다는 것. 즉 모든 음식은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 그것은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면서 재료 자체가 가진 생명력을 살리는 것과 같다.

자연 상태에 가까운 재료를 먹는 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조리 과정을 거치면 거칠 수

록 원료의 맛은 떨어지고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백미 보다 잡곡을 먹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우리 식단의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요리 전문가 임지호는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든다. 헬렌이 요리를 못하고 싫

어 하는 사람이라면 임지호는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다. 그가 재료를 얻는 방식은 헬렌과

닮았다. 사는 곳 주변에 있는 다양한 풀(이끼 조차)이 음식의 재료가 된다. 못 먹는 것이

없다. 거리가 거의 없는 음식이다.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도 같다. 조미료는 하지 않는다.

나물 삶은 물로 밑물을 하는 것도 같다. 최소한의 양념을 하고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에

충실한다. (그의 책 <방랑식객>, 문학동네, 2011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다. 생선도 먹는다. 즉 임지호는 모든 것이 음식의 재료다. 그 음식

을 먹는 사람이 원하면 그 재료를 사용하되 살아있는 영양을 고스란히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전문 요리가로서 임지호와 실천가로서의 헬렌은 같은 입장이면서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누구의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제철 음식,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다는 것, 최소한의 조리 단계,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살아있는 음식, 그러나 임지호는 음식은 보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진심으로 먹는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음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같다는 것.

생활에서 우리가 할 일은 헬렌의 말처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각자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과 남을 먹이기 위해 만드는 음식은 질과 양이 다르다.

나 혼자 먹는다면 찬 물에 밥 말아 먹는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가족을 먹이려고 음식을 만들 때는 들이는 정성이 다르다.

헬렌 니어링에게 성장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좀 더 혁명가적 실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먹으려고 소박한 밥상을 차릴 수는 있으나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거나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

 

정재승은 최근 진중권과 함께 쓴 책 <크로스 2>에서 ‘육식’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복잡한 미각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자연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은 유일한 미식가다.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왕성한 식욕과 잡식 능력은 그 자체로 유일하며 위대하다는 얘기다. ...지난 3만 년간 느리면서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은 잡식 동물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육식을 포함한 인간의 미각은 인정 받아야 하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런데 육식이 공공의 적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인간이 동물의 눈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 생긴 기업형 축산업의 폐해를 말한다. 육식은 건강하지 못한 식재료가 아니라 육식고기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헬렌의 밥상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다.

 

다시 정재승의 말을 옮기면서, 나도 그처럼 ‘언젠가의’ 희망사항으로 또박또박 읽어본다.

“도시에 사는 인간은 점점 음식사슬이 긴, 그래서 세상에 의존도가 높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음식 사슬이 짧은 식사생활을 꿈꿔본다. 내가 재배한 것을 먹고, 직접 사냥한 무언가를 요리하고, 채집해 얻은 것으로 식사를 하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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