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해야 대학소설상인데, 이십대의 대학생(내지 졸업생)이 글을 얼마나 짜임새있게 쓰겠나. 신선함의 발견 만으로도 대단한거지. 그러니까 예비작가의 앞날을 보고 미리 작가를 뽑는 정도겠지.'라는 안이한 자세로 책을 폈다가 첫페이지부터 깜짝 놀랐다. 글이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첫 페이지를 보고 또 봤다. 몇 번을 봤는데도 좋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은유적 배경이 들어있지 않은데도, 사실적 세밀묘사만을 했는데도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어서 더 좋다.

 

짙은 안개에 달도 보이지 않는 밤. 먹빛 바다에 실금을 그으며 움직이는 작은 빛이 있다. 바다의 뒤척임에 부연 빛이 들썩인다. 빛은 파도를 따라 일렁일 뿐 그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도양 어딘가에 떠 있는 유조선 선미 마스트에서 나오고 있는 빛이다.            p.7

 

 

소설에서 시작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은 적이 있다. 도입에서 독자의 몰입을 유도해야 그 힘으로 소설의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소설을 읽게 된다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부연하고 싶다. 도입은 독자의 몰입 유도와 함께, 달밤에 커튼 뒤로 비쳐보이는 듯한 그림자의 불완전성도 또한 있어야 된다고. 작가가 부러 불친절하게 빠뜨리는 부분을 찾는 재미가 도입에 있어야 독자의 호기심이 증폭되니까. 물론 이런 부분은 개개인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이 다름이 또한 소설을 읽는 맛이기도 하겠다. 그럼 도입부에서 작가의 불친절한 부분, 그림자의 불완전성을 찾아보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먹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유조선 위. 시간적 배경은 짙은 안개와 달도 없는 깜깜한 밤. 서두에 필히 나옴직한 두 배경이다. 이 배경을 깔고 나니 어디선가 빛이 보인다. 이 빛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론 깜깜한 바다에 떠있는 유조선 위니까 당연히 유조선 마스트에서 나오겠다. 그러니까 작가는 <...작은 빛이 있다.> 에서 뒤의 두 문장을 빼버리고 마지막 문장으로 바로 넘어가 <인도양 어딘가에..유조선 선미 마스트에서 나오고 있는 빛이다> 라고 해도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문장을 일부러 넣었는데 이 부분이 바로 그림자의 불완전성에 해당된다.

 

이 소설은 해적소설이다.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하는 해적들 중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한국어선이 피랍되고 그 어선 위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엔 어선이 아니고 유조선이 나온다. 소재가 한국어선의 피랍이라는 정보를 미리 들은 독자는 이 부분에서 헷갈린다. 왜 배가 달라졌을까. 물론 이 소재를 미리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선물은 있다. 유조선에서 나오는 빛이 왜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걸까. 배가 고장났단 말인가. 무슨 사고라도 났단 말인가. 어떤 사고가 어떻게 났을까 등등. 작가는 그저 물 위에 뜬 배 위에서 빛이 비추는 배경을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배경 설명 말미가 아닌 중간에 두 문장을 삽입하면서 작가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독자 스스로가 호기심이 생기는 듯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삽입 문장은 두 부분이 맞겠다. 주 요지인 한 문장만을 삽입했다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에 대해 간파할 수도 있을텐데 짐짓, 무관해 보이는 듯 '바다의 뒤척임'이라는 배경을 삽입함으로서 뒷 문장까지도 짐짓 무관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실지로 무관해지지는 않고 무관함을 포장으로 한 관심 획득이다. 소위 말하는 밀당(밀고 당기기)이라고나 할까. 그럼으로서 소설은 도입부터 생생함을 획득하게 되어 이후의 전개가 박진감있게 펼쳐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유조선의 우현 녹등은 깨졌다. 좌현 홍등은 노파의 숨소리처럼 잦아들다 결국 숨이 멎었다. 선수등이 있어야 할 선수 마스트는 송두리째 부러져 밑동만 남았다. 홀로 남은 선미등이 비추는 것은 배의 뒤편뿐. 유조선의 반신은 암흑 속에 갇혀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유조선이 파도에 흔들린다.    p.7

 

이제 독자의 호기심에 대한 조금의 힌트가 나온다. 녹등은 깨지고 홍등은 숨이 멎었다. 선미등만 홀로 남아 배의 후미를 흐릿하게 비출 뿐이다. 아, 내 예상이 맞았어. 유조선이 지금 표류 중인거로구나. 왜 유조선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을까. 해적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등등의 생각들이 굴비 엮듯 나온다. 이제 주인공들이 등장할 시기다. 짜잔! 해적 등장!

 

 

 


 

 

 

일부분이 좋으면 아무래도 전체를 기대하게 된다. 이 작가, 글을  짜임새 있게 엮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걸까. 아니면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일까.  심사를 맡은 서영채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이십대의 대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솜씨있게 다루어낸다는 것 자체가 내겐 경이로웠다." 

 

공감한다. 작가는 서두의 이 치밀함을 끝까지 끌고 간다. 소설을 덮고나서야 나는 아! 라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참 시원한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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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멋지다..무척 똑똑한 글이에요!

달사르 2012-06-13 18:38   좋아요 0 | URL
히힛. 저렇게 멋진 부분 하나 발견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요.
하상훈 작가님(이제는 이렇게 호칭을 불러야겠지요. ^^ )의 건필을 바라는 마음이 뭉개뭉개 생기고 있어요. ^^

2012-06-13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3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탄하 2012-06-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돼~~~ 안돼~~~ 이래선 안돼~~~!
이렇게 멋지게 음미하시면 빠져들자나요.ㅠ.ㅠ
그렇잖아도 읽으려고 쟁여둔 소설이 태산인데, 마음을 요동치게 하시네요.
게다가 21세기 대한민국 대학생이 해적선이라..소재도 신선하고 대단합니다.
(작은 빛..안본 거야. 안본 거!)

달사르 2012-06-15 13:43   좋아요 0 | URL
ㅎㅎ 뒤에 읽어도 되는 소설류가 있고, 나왔을 때 바로 봐야되는 소설류가 있다면!

이 작가의 소설은 지금 보는 게 젤루 좋다고 생각되옵니닷. 왜냐면, 이 작가의 처녀작이니까요. 누군가의 처녀작을 신간의 계절에 보는 재미는 좀더 크다고 생각됩니당~
 

 

가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책과 관련된 이야기다. 아주 멋진 책을 발견했을 때, 책의 금액이 얼마인지 살펴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구매를 했나 살펴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역사류, 사전류, 연구류 쪽이어서 품절의 우려를 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랬다. 처음 책을 구매하고선 생각보다 많이 싼 가격에 놀랐다. 게다가 50% 할인 가격에 구매를 하는데 마음이 많이 쓰라렸다. 출판사 입장에서 얼마나 안 팔렸으면 50%로 내놓았을까. 분명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든 책이었을텐데 판매지수가 낮은 걸 보고 실망은 또 얼마나 했을까. 아니 이렇게 판매지수가 낮으면 출판사가 유지가 될까. 나도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아니될 수 없다.

 

이런 걱정을 일 이년 전에 했더랬다.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모두다 구매하리라. 작가 전작주의자가 아니라 출판자 전작주의자라도 되어주리라. 그런데 이 출판사에서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아직 이 출판사의 책을 서너권만 가지고 있는데 더이상 나오지 않고 기존의 책들은 중고시장을 뒤져야한다. 얼핏 출판사가 망했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믿고 싶지 않다.이런 훌륭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든 극복해낼꺼야, 라고 생각하고 싶다. 만약, 정말로 망한 거라면 어째,이런 일이..ㅠ.ㅠ  만약 사실이라면 무척 슬플 것 같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책을 내준 출판사에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이런 훌륭한 책을 내주는 출판사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ㅠ.ㅠ

 

좀더 분발해서 지인이 새로 차리는(?) 출판사에 도움이 되어야겠다. 지분도 요구하고!  (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다. ^^)

 

 

 

 

 

 

 

 

 

 

 

 

 

이 책은 세계의 종교에 대한 책이다. 인류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세계지도를 꼼꼼하게 보여준다. 비단 종교에 대해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 문물, 정치적 역학관계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데 가장 좋은 건 매 장마다 꼼꼼한 지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처음엔 종교에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구매했다. 비종교인이지만, 종교인들이 절실하게 믿는 종교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랄까. 종교 또한 역사적 내력이 있기 때문에 세계의 문화, 역사에 좀더 자세히 알려면 세계의 종교 또한 어느정도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랄까. 암튼, 그런 목적으로 구매를 한 책이었지만 요즘은 그런 용도보다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사용한다.

 

매 장마다 나오는 지도를 시간날 때마다 하나씩 훓어보면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다. 네이버 등에서 검색할 때 나오는 부분지도와는 비교를 할 수 없다. 타국 작가의 문학 작품 읽을 때면 매번 곤란을 겪는 것이 지도 부분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어쩌고 저쩌고..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어쩌고 저쩌고.. 다뉴브 강가를 따라 무엇을 할 때 어쩌고 저쩌고..이렇듯 생경한 지명이 나오면 난 더 진도를 못 나가는 것이다. 궁금하니까!   해서 매번 네이버에서 지도, 사전을 검색하고는 넘어가는데 부분만 나오는 지도로는 영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다른 무엇을 찾기 위해 문득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 무심결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면서 나는 휘파람을 불고야 말았는데, 이 책의 다른 용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종의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 나처럼 세계지도치(세계지도맹)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떠올랐다. 이 방법은 물론 나에게 가장 도움이 클 것이며 또 나의 이 방법을 기다리는 지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또 이 지도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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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2-06-1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아날로그 GPS를 (말이 안되지만서도) 생각하고 계신건지요?? ㅋㅋ

달사르 2012-06-10 11: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능력이 된다면 그랬으면도 싶네요! ㅎㅎ 실은 반반이에요. 아날로그 반, 컴터 활용 반. 다행히 조카에게 그런 장치들이 있어서요. (게다가 조카들이 저 닮아서 역사, 지도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조카들 공부에 활용이 되겠다, 싶은 야심찬 생각도 쬐금)

근데, GPS는 아니군요! 제 능력 부족 인정!!! ㅎㅎㅎ

탄하 2012-06-1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출판사 전작주의까지!
저도 꽤 좋아하는 출판사는 있지만 전작주의까지는 감히 생각 못해봤습니다.
이 책 보니까 정말 대단해 보이네요. 이런 책이 있는줄도 몰랐어요.
절판되고 출판사도 사라졌다니 아쉽네요.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때 쓰던 사회과부도를 아직 갖고있는지라^^;
지도 걱정은 없어 좋네요.

달사르 2012-06-12 12:27   좋아요 0 | URL
ㅎㅎ 권 수가 얼마 안 되서 가능한 이야기 이기도 하구요. 출판사 책이 좀 많이 팔렸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짠~하고 저 출판사에서 새로 책을 좀 내줬으면 하는데 어찌될지..

넵. 맞아염. 사회과부도는 여러모로 유용하기 때문에 졸업 후에도 갖고 있는게 좋더라구요. 저는 자취하면서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이사통에 잃어버려 못내 아쉽더라구요.
 

저녁밥이 배달되어 온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나와 직원은 먹지를 못하고 있었다. 넉달짜리 장기약 처방전을 들고오신 손님에다 단타로 오시는 손님들까지 저녁시간대에 몰린 날이었다. 열심히 약을 짓고 검수를 하며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왠 여자 손님이 굳은 얼굴로 들어오신다. 얼굴맹이지만 낯이 익은 사람이다. 아까 점심 시간에 오셔서 진을 빼놓고 간 사람인데다 목소리조차 특이해서 금방 기억이 났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대뜸 밀담을 나누자는 자세로 내 얼굴에 바싹 다가붙는다.

 

"종업원이 친척이신가요? "

"네? 왜 그러시죠?"

첫 마디에 이미 감을 잡았다. 무언가를 따지러 왔고, 나에게 일러바치러 온 것이다.

"종업원이 친척이 아니신가요?"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아까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오후 내도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요. 그래서 왔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셨습니까?"

"제가 거즈를 달라고 하고, 또 무엇을 달라고 하고 그랬는데요. 종업원이 몇 번 약국 매대 앞으로 왔다가 또 매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했어요.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힘이 드는지 저보고 글쎄, 필요한 게 있으면 한꺼번에 다 말씀하시면 제가 챙겨드릴께요..라고 하는 거 있지요. 종업원이 그런 말을 하면 되는 겁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다. 우리 약국은 공간이 협소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의 원칙으로 전문약, 일반약이 아닌 약은 모두 매대 밖으로 내놨다. 손님이 마음껏 고르고 또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비교도 하게끔 진열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슬쩍 현상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사소한 이유로 나의 원칙을 깨기가 싫어서 가게 오픈부터 아직까지 의약외품과 건강기능식품, 공산품 등은 매대 밖에 놔두고 있다. 처음엔 낯설어하고 어색해하던 손님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조제를 마치고 나와보면 자신들이 원하는 물품을 기다리는 동안 골라놓고 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냉장고에서 음료수 등도 미리 마시고 빈 병만 매대 위에 올려놓아 계산을 바로 하게끔 해놓는 센스쟁이들도 생겼다.

 

오늘 일은 이랬다. 손님이 지인의 전화를 기다려서 통화를 한 후 필요한 물품을 듣고서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달라고 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손님이 하나 달라고 하고는 가만 있는 거다. 필요한 것을 다 샀다고 생각한 직원은 매대 안으로 돌아와서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그제서야 또 다른 하나를 달라고 한다. 직원은 웃으면서 다시 매대 밖으로 나갔고 하나를 골라왔고 매대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두 세번을 반복하는데 내가 가만 보니 이건 똥개 훈련 시키는 꼴이다. 그래서 직원이 손님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 챙겨드릴께요. 라고 했는데 손님 입장에서 기분이 나쁜 거다. 그치만 직원은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고운데다 그 말을 할 때도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했었다. 나라면 아주 환대받는 기분에 몇 번이나 직원을 왔다갔다 한 것에 미안해했을텐데 손님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소위 자신이 '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달라고 하면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줄 것이지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건방지게 한꺼번에 말을 하라마라야. 내가 생각나면 말 하는 거고, 생각 안나면 생각 날 때까지 가만 있다가 말 하는 거지. 이런 '갑'의 생각을 가진 손님은 나에게 아까의 상황을 일러바치며 내게 직원의 험담을 공유하길 바랬고 직원교육을 잘 시키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손님이 무조건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손님, 저희 직원이 아까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하는 걸 저도 들었는데요.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신 거지요?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보면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하게 되지 않나요? 그리고 통화를 하셔서 필요한 물품을 다 전해들으셨는데 그걸 저희 직원에게 말만 하면 찾아줄텐데 하나 말하고 직원이 안에 들어가면 또 말해서 나오게 나고,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 손님이 왕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이 거리가 얼마나 멀다고 왔다갔다를 못해요. 그게 그렇게 힘이 들어요?"

"힘이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말하면 찾는 시간도 절약되고 합리적인데 한꺼번에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그것이 기분나쁘다고 하시면 저 역시 손님에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까 손님이 의자에 앉아계셨고 저는 조제손님을 보낸 뒤에 손님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봤었죠. 근데 손님은 전화받구요, 라는 냉랭한 목소리로 눈을 내리깔며 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씀하시고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손님이 왜 약국에 왔는지 의아해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전화를 받는다는 건지? 전화를 받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전화를 받아서 필요한 약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그 상황에서 제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손님이 말하기 귀찮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가만 있었는데 저희 직원이 친절하게 구매를 도와준 걸 가지고 그렇게 기분이 나쁘시다면 저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 부분이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저는 손님의 차가운 말투와 매서운 눈매가 무서웠습니다. "

 

손님이 당황해했다. 손님이 기분 나쁜 게 있다면 나 역시도 있다라고 하는 내 말이 역습이었나보다. 뭔가 다른 일로 기분이 나쁘던 터에 약국을 들어왔고, 아마 약 심부름을 하기가 귀찮았던 게지, 암튼, 약국에 들어와서 직원이 하는 친절한 말도 고깝게 들렸고, 집에 갔는데 자꾸만 기분이 나빠졌고, 감히 손님인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을 건네다니 괘씸했고, 약국 주인에게 일러바쳐서 직원 혼꾸멍을 내줘야겠다 싶어서 귀찮지만 약국을 다시 들렀는데 어라? 뭐 이런 주인이 다 있어? 손님이 '갑'인 걸 모르는 주인이네?

 

나는 한 마디를 더 했다.

"손님. 손님이 기분 나쁜 일이 그것이라면 저 또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거구요. 그런 사소한 일은 이제 성인이신데 본인 선에서 툴툴 털어버리셔야지요. 그런 사소한 걸로 기분 나빠하시면 사회생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다시 생각해보시면 저희 직원의 센스있는 발언인데 손님이 오해해서 들으신 걸 가지고 엄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손님은 똑부러진 내 말에 얼이 빠져서 더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나갔다. 혹 떼려다 혹 붙인 표정을 하고선. 그리고 조제실에서 직원이 나왔다. 직원은 내가 지은 장기약의 뒷정리를 마저 하고 나와서는 자기가 빵, 웃은 부분을 말해줬다.

"하하하. 저도 손님이 무서웠어요, 라니요. 약사님 덕분에 얼마나 웃었는지요. 그나저나 저 손님은 왜 저러시지요? 제가 그때 기분 나쁘게 말했다면 저도 나와서 따지거나 할텐데요, 저는 아주 기분좋게 말을 했는데 손님이 저러시니 화도 안 나요. 아마 날이 더워서 그런걸까요?"

그러면서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갑'의 위치에 있던 거래처 때문에 분쟁 당사자도 아니고 그저 옆에 있기만 했던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졌고, 가만히 있던 자기가 이유도 없이 '사과'를 종용받았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의리의 아줌마인 직원은 그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사건을 일으킨 직원의 일에 대한 고자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했는데 정작 주위에서는 침묵했더란다. 사건을 일으킨 직원과 주위의 동료들 누구 하나 거들어주지 않았고 거래처가 무조건 '갑'이라는 사장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자초지종은 중요하지 않았고 '을'의 위치에 있는 직원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표라는 결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직원에게 상처였는데 예전에 얼핏 들은 이야기를 오늘 다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갑'이 갑다우려면 갑의 위치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지 된다고. 그래야지 약자인 '을'도 강자인 갑을 예우해준다고. '갑'이라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저렇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갑'에게 강하고 사회적 약자인 '을'에게 약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늙고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저 쉬기 위해서 약국을 들렀을 때, 덥지요..라고 말하며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건네는 일이 '갑'에게 이유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것 보다 훨씬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늦은 저녁을 직원과 둘이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녁밥은 참으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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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06-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멋져요 ^^

달사르 2012-06-09 20:34   좋아요 0 | URL
헤헤. 야클님. 소심한 브이.. v ^^

다락방 2012-06-0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멋져요 2
추천을 누르지 않을 수 없는 글이에요.

달사르 2012-06-09 20:35   좋아요 0 | URL
ㅎㅎ 추천을 누르는 다락방님의 아름다운 손가락 ^^

transient-guest 2012-06-08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아진 것 같아요. 인성교육의 부재의 효과가 나타나는...아니 만연한 시대같습니다. 멋지고 당찬 대응이 professional답습니다. 그나저나 그걸 따지러 다시 오다니, 그 손님도 나름 그 계통(?)에서는 알아줄 듯...ㅎㅎㅎ

달사르 2012-06-09 20:47   좋아요 0 | URL
요즘 들어 저렇게 가게에 와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요. 그래서 저도 그 원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어요. 그리고 대응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보구요. 만약 저 사람이 저에게 저런 식으로 화를 냈으면 제가 저렇게까지 강경하게는 안했을텐데요. 직원이라고 내려깔고 저렇게 말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제가 더 강경하게 한 것도 있어요. 이름하여, 내 직원은 내가 지킨다! 히히.

카스피 2012-06-0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속이 다 시원해 지는 글입니다.언젠가부터 우리는 고객은 왕이란 말을 종종하게되는데 그 덕분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역지사지로 손님또한 어떤이에게 을이 될수 있다는 점을 왜 모르는지...
물론 손님에 대한 서비스가 엉망인 곳은 당연히 응징(?)해댜 되겠지요^^

달사르 2012-06-09 21: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맞는 말씀이에요. 갑과 을의 위치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지요. 요새는 대부분의 직장이 서비스직이라 해도 무방하니 업무 중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을 순 없는 거 같애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최대한 고객(손님)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너무 아니올씨다의 경우엔 입 바른 소리를 하는 '용기'도 필요할 듯해요. ^^

하하. 응징(!) 부분은 저도 조심해야겠습니닷. ^^

BRINY 2012-06-0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님은 왕이다...저런 왕은 폭군일 뿐입니다.

달사르 2012-06-09 21: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RINY님.
저 손님을 보내놓고 다음날부터 계속 직원과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좀더 명확하게 하는 연습을 우리끼리 해보자, 이런 말도 나왔구요. 암튼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려구요. 저 손님의 경우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이상한데, 손님은 확실히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니 말에요. 예의를 지키는 손님만 내방하면 정말 좋은데 안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대응을 해야하니 우리가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도 우리만의 노하우를 좀더 연구해야겠다, 생각이 들더라구요.

폭군이라고 딱 잘라 말씀해주시니 무척 시원합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요. 헤헤.

paviana 2012-06-0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__)
멋지시네요. 그리고 직원분이 정말 부럽네요. 님같은 분이랑 같이 일할 수 있어서 아마 틀림없이 매일 매일이 즐거우실거에요. 세상에 달사르님같은 사장님들이 점점 늘기를 바랍니다.^^

달사르 2012-06-09 21:3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paviana님.
헤헤. 직원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제가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애요. 그리 말씀해주셔서 괜히 기분이 붕 뜨네요. ^^

마노아 2012-06-1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우리 교장샘께 해주고 싶은 말이군요. 갑다운 갑을 보고 싶어요...ㅜ.ㅜ

달사르 2012-06-11 12:22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메인화면 바뀌셨네요! 진정 갑다운 갑을 메인화면으루다. ^^

교장샘처럼 저런 지위에 있으면서 갑다운 갑이면 얼마나 우리가 존경해줄텐데 말입니다. 그지요. ㅠ.ㅠ

탄하 2012-06-12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싸, 쵝오!
세상의 모든 갑(답지 않은 갑)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달사르 2012-06-12 12:28   좋아요 0 | URL
우힛. 까칠 달사르가 마음에 드시나요? 히힛.
 

 

 

 

지인의 부탁으로 자료를 찾기 위해 정수일 샘의 책을 뒤지던 중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화차>의 혼마 형사처럼 예전에 풀지 못했던 한 과거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http://blog.aladin.co.kr/772922133/5643960 )

 

 

 

 

 

 

 

 

 

 

 

 

 

 

 

 

교류의 역사적 배경이란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을 말한다. 문명 자체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모방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파, 수용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전파와 수용이 현실화되려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문명간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교류는 일정한 역사성을 띠고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p.82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누군가가 자꾸 내 글을 베껴요. 그냥 몰래 베끼면 차라리 나은데 댓글로 글이 좋다는 찬사를 늘어놓고선 며칠 뒤 자신의 글에 내 글을 슬그머니 갖다 붙이는 거에요. 마치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

 

지인은 그 일로 무척 힘들어했다. 지인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서 글을 빚는 듯한 착각이 들게끔 아주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글의 작은 조각이 자신과 무관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는 건, -게다가 전혀 다른 해석으로 -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 이후 나 역시 같은 경험을 한 번 했다. (오래전 일이다)나의 생각 속에서 오래 묵은 그 무엇이 글로 나왔는데 며칠 뒤 댓글을 달아준 누군가의 글에서 그 문장을 고스란히 봤다. 지인의 경우를 미리 봐서일까. 다행히 나는 힘들진 않았고 신기한 감정만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내 글을 가져간 걸까. 제 3자가 두 개의 글을 다 봤다면 분명 의아해할 그런 글을 저 사람은 왜 쓰는 걸까. 혹시 창조를 위한 모방, 차용 정도로 생각한 걸까. 그 사람의 글 속에 한 문장으로 들어있는 내 글 조각은 참으로 불쌍해보였다.

 

 

 

다시 생각을 바꿔 내 글로 시선을 돌렸다. 내 글은 순수하게 내 스스로의 생각만을 쓴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나 역시 누군가의 작품을 읽고,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것들이 쓰여진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정 정도의 숙성을 거친 후 내 나름의 것으로 바뀌어졌겠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천하의 저 랭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글 들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까. 문명의 전파로 인한 문명의 교류에 대한 영향을 해석하는 건 후대의 일이다.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 영향을 알아채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현상이 잦지 않았던 옛날과 달리 매일같이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현대에는 그 후대의 간격이 점점 짧아져 몇 년 뒤가 될 수도, 몇 달 뒤가, 혹은 몇 일 뒤가 될 수도 있겠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출판물 시장에서의 문명의 전파 또한 마찬가지.

 

훌륭한 작품을 읽고난 후엔 내 글이 조금 달라지는 걸 느낀다. 내 속의 무언가가 감응하여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뒤라면 더욱더.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내 글을 다시 읽어봐도 비슷한 문구 등은 찾아볼 수도 없는데 내 글은 분명 바뀌어 있다. 단어 하나, 문구 하나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전반적인 글의 기조, 글의 흐름, 글을 써내려가는 힘 등이 바뀌어 있다. 문학 수업이나 그 비슷한 무엇 하나 해 본 것이 없어서 뭐라고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 생각도 바뀌고, 쓰는 글도 바뀌게 된다, 라고나 해야할까. 이렇게 생각하니 앞서의 그 사람이 조금 이해가 간다. 그 사람도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았던 걸까. 그래서 차용이라고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내 글의 조각도 여타의 훌륭한 작가들 글처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 힘을 가졌던 걸까.

 

 

그 사람이 자신의 글을 빛내기 위해 남의 글 일부분을 차용(도용)했는가, 내 글 조각이 좋아서 자신의 글의 빈 공간에 꼭 채워넣고 싶었는가, 내 글 조각으로 인해 그 사람의 글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하는 건 그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이웃의 글을 읽고 내 글에 생기는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일어난 '모방'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 (모방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과정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내가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나저나..정수일 샘은 정말 글을 잘 쓰신다. 앞뒤의 짜임에 한 치 흐트럼이 없다. 얼마나 치밀한 사유를 하시는 양반이신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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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6-0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간혹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요. 심지어는 제가 해 준 말을 나중에 제게 똑같이 해주더라구요. 그땐 술자리라 취해서 제가 그 말의 출처임을 잊었나 했더니 원래 그런 사람이더군요(이 사람이 제게 해 준 말을 나중에 A라는 사람에게서 또 들었는데, 결국 출처는 A였어요). 그래도 말이건, 글이건 어느 정도의 출처개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의 톤, 어조, 구성같은 경우는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실험해볼 수도 있고, 무의식중에 자기 글에 뭍어날 수 있겠지만 타인의 글 일부를 빌렸으면 적어도 '어떤 글을 보니 ~~라고 하더라' 정도는 써줘야 하지 않을까요?

정수일님의 책은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달사르님께서 글까지 잘 쓰신다니까 갑자기 이 책이 마음 속에서 벌떡 일어서네요.^^

달사르 2012-06-07 11:10   좋아요 0 | URL
하하. 신기한 사람이네요. 자신만의 명확한 생각이 희박해서 저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저분도 분홍신님이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남아서 은연중 귀에 박혀 있었나봐요. 좋은 생각이니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을까요. "야. 너는 내가 해준 말을 니가 한 것처럼 포장해서 말하냐?" 했으면 당황했을까요? ^^
분홍신님이 들어주신 예를 생각해보니, 타인의 글 일부를 빌린다는 인식이 없이 자기 것인양 글을 가져갔을 개연성이 있군요. 나중에 발전가능성을 생각한다면 타인의 글을 타인의 글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물론 그 사람의 몫이긴 하지만) 가급적이면 지양해야겠어요.

앗. 분홍신님! 저도 초원..책 주목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정수일 샘이 내신 <오도릭의 동방기행>과 묶어서 주문할까. 초원..을 먼저 주문할까..고민하고 있었거든요. 히힛. 우리 초원..책 같이 읽어염. ^^

탄하 2012-06-12 23:11   좋아요 0 | URL
아, 어제 제가 여기 댓글단다하고 걍 갔네요.
정수일님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같이 읽으면 진짜 즐거울 것 같아요.
저는 7월쯤 읽을 생각인데 달사르님은 괜찮으신지...
아직 누구와 같은 책을 함께 읽어본 적은 없어서 은근 기대의 떨림이 이네요.^^

달사르 2012-06-13 13:17   좋아요 0 | URL
넵. 그래요. 저는 지금 수중에 이 책이 있답니닷. 지금은 비슷한 류의 다른 책을 읽고 있어염. 왠지 책끼리 연결이 될 듯하여 저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답니닷.

7월에 같이 읽읍시닷. ^^

transient-guest 2012-06-07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걸 봐요, 주로 나이든 선배들, 특히 젊을때 술 많이 마신분들ㅋㅋ, 제가 예전에 한 이야기를 다시 저한테 들려주더라구요...나이가 들면...-_-
좋은 문장이나 말이 소화가 되어 완전히 내것이 된 후에, 다시 나만의 것으로 나오면 표절/모방보다는 영향을 받은 창조가 되겠지만, 그대로 가져다가 - 인용이 아니라 - 베끼면서 자기의 글로 만들면 문대성이 되는 거죠..ㅎㅎ 기분이 나쁠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6-07 11:24   좋아요 0 | URL
앗. 문대성..ㅠ.ㅠ 그렇담..그건..아닌거로군요..ㅠ.ㅠ
암튼, 나도 그런 경우를 당했긴 하지만, 나도 타인의 글에서 그런 실수를 안 해야겠다고 생각되네요. 글을 베끼는게 실수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긴 하지만, 암튼.

ㅋㅋ 술 많이 마신분들. 이야기 하시니까 엄청 공감되는데요. 술이란게 나중엔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모르게 되잖아요. 술 이야기 나오니까 음악가 이야기가 또 안 나올 수 없는데요. 하루키의 재즈에세이 에서 소개해줘 알게 된 책인데요. 빌 크로의 <재즈우화>라는 책에서 정반대의 사례가 나와요. '레드 켈리와 강아지' 이야기라고 음악가들에게는 유명한 일화인가봐요. 베이스 주자 켈리가 어느날 근사한 파티에 초대되어 갔다가 얼큰하게 취해서 화장실을 찾다가요. 근처 책상에 부딪혀 잉크를 쏟았는데 바닥이 하얀 양탄자였다더군요.ㅠ.ㅠ 부리나케 도망간 켈리가 다음날 사과를 하려고 그 집을 다시 들렀고 응접실에서 안주인을 기다린답시고 의자에 앉았는데요. 뭐가 묵직한 느낌이 나서 일어났더니 안주인의 애완견의 목이 부러졌다더군요. 그래서 피아노 덮개 안에 숨기고 그길로 그집과 안녕~해 버렸대요. 근데 문제는!!

이 이야기가 원래 켈리가 친구 마이크 호비에게 들었던 이야기라는 거죠. 너무 재미있어서 호비에게 듣고선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면서 켈리가 그랬대..켈리가 그랬대..라고 헛소문이 나서는 장장 30년이나 회자되었다네요. 여기서 또 웃긴건요..몇 년 뒤에 예의 그 마이크 호비와 켈리가 만났는데 호비가 켈리에게 그랬다더군요.

"야. 강아지 깔아뭉갠게 너라며?" 라고 했다는..쩝..

transient-guest 2012-06-08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허걱이네요ㅋㅋ 알고보면 그런 경우가 꽤 많을 것 같아요. 내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사람들에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가 퍼져서, 꼭 내 이야기처럼 된다는거..ㅎㅎ 아.. 그리고 맞아요. 원초적인 베끼기는 절대로 실수로 나오지 않죠. 근데, 석박사/학사논문의 상당수가 표절이라고도 하니, 한심하죠?

달사르 2012-06-09 21:41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허걱이지요? 이야기라는 게 저런 속성이 있다면 카더라, 통신 역시 절반 정도만 수긍하고 넘어가야될 것 같애요.

아. 맞지여. 정말 고생해서 자신의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저 '표절'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미안해해야할지요. 논문을 표절할 정도로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냥 논문을 포기하는 게 나을텐데 말이죠.
 

 

 

길을 떠났다.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간이역에서 환승기차를 기다릴 때의 풍경은 미리부터 눈이 시려오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각자 제 갈 길을 떠날 사람들이 잠시 모여있는 간이역엔 그 흔한 자판기도 없다. 전봇대처럼 우뚝 솟은 기둥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차량 번호판 앞에 서 있었지만, 그러나 기차는 한참 일찍 정지했고 우린 우리 번호판의 차량을 찾아서 뛰어야 했다.

환승기차 안은 고즈넉해서 기차바퀴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리 뒷좌석엔 엄마와 아기가 타고 있었고 엄마는 아기에게 조용조용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우린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낯선 역에 내린 우리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다. 하늘에 박힌 해는 열기를 지상에 고스란히 뱉었고 우리는 통구이라도 좋다며 역 밖을 나왔다. 생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의 어깨를 스치며 거리를, 거리를 걸어다녔다. 교차로 한 귀퉁이가 훤해서 쳐다보니 공원이다. 공원 입구는 산을 깍아내려 절벽처럼 되어 있었고, 꼭대기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니 한 눈에 들어온다. 개략의 위치를 잡은 우리는 내려와서 다시 걸었다. 가보마, 했던 곳을 가던 중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지명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을 물어보려는 나를 친구가 제지한다.

 

"묻지 마"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한 쪽은 도로가 넓게 뚫렸고 높은 아파트가 줄을 지은 신도시였고 반대쪽은 오래된 허름한 집들이 단층으로 모여있는 옛집들이었다. 우린 옛집들 거리로 걸었고 조금 걸으니 나즈막한 구릉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친구가 먼저 그 길로 들어섰고 나도 따라 걸었다. 지도팻말이 있었고 지도상으로 목적지는 아주 멀어 보였고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되는 듯했다. 목적지를 포기하고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얕은 구릉지에 드문드문 무덤들. 여러군데서 올라올 수 있게 만들어놓은 나무계단들. 구릉지 바깥쪽으로 구릉지를 보호하듯 밀집해있는 대나무들. 어린 죽순은 대나무 숲을 벗어나 나무계단 근처까지 진입을 해서 낯선 객의 시선을 끌었다. 조금 걷다가 보니 잘하면 이 길이 목적지와 연결될 수도 있겠다, 란 생각이 들었고 우린 모험을 계속 하기로 했다. 구릉지 여기저기엔 마을 청년들이 앉아서 쉬기도 했고, 어른들이 죽순을 캐기도 했으며, 노인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작은 돌길을 걸으며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물었으면 이 길을 못 찾았을 거야."

 

옛날 선조들이 걸었음 직한 옛길을 걸으며 나는 묻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금 갑갑하더라도, 시간에게 기다림을 주는 것이 어쩜 새로운 길로  인도해주는 삶의 비밀스런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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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2-06-07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여행 좋지요~ 전 아주 옛날에 워싱턴 DC에서 뉴욕의 Penn Station으로 가는 밤차를 타고 이모댁에 간적이 몇 번인가 있어요. 식당차에 앉아서 책도보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나름 낭만을 만끽했었던 것 같아요, 겉멋에..ㅋ 나중에 기회가 됨 한국 기차여행, 그리고 미국의 대륙간 기차여행 (2박3일이라고 하네요)을 하려고 합니다. 근데, 길은 좀 물어서 찾아다녀야 해요 전...ㅋㅋ

달사르 2012-06-07 12:15   좋아요 0 | URL
ㅎㅎ 버스와 달리 기차는 정말 낭만이 있는 거 같애요. 기차간에서 보는 책과 기차간에서 마시는 맥주, 기차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선 어떤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애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존재들이 특별함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바로 기차여행의 묘미같애요. 이모댁이 뉴욕이시네요. 이모댁 가는 길. 왠지 하나의 수필 제목 같애요.

대륙간 기차여행은 생각만으로 두근거립니다! 저도 이담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꿈꾸고 있긴 합니다만, 체력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