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부탁으로 자료를 찾기 위해 정수일 샘의 책을 뒤지던 중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화차>의 혼마 형사처럼 예전에 풀지 못했던 한 과거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http://blog.aladin.co.kr/772922133/5643960 )

 

 

 

 

 

 

 

 

 

 

 

 

 

 

 

 

교류의 역사적 배경이란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을 말한다. 문명 자체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모방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파, 수용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전파와 수용이 현실화되려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문명간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교류는 일정한 역사성을 띠고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p.82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누군가가 자꾸 내 글을 베껴요. 그냥 몰래 베끼면 차라리 나은데 댓글로 글이 좋다는 찬사를 늘어놓고선 며칠 뒤 자신의 글에 내 글을 슬그머니 갖다 붙이는 거에요. 마치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

 

지인은 그 일로 무척 힘들어했다. 지인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서 글을 빚는 듯한 착각이 들게끔 아주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글의 작은 조각이 자신과 무관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는 건, -게다가 전혀 다른 해석으로 -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 이후 나 역시 같은 경험을 한 번 했다. (오래전 일이다)나의 생각 속에서 오래 묵은 그 무엇이 글로 나왔는데 며칠 뒤 댓글을 달아준 누군가의 글에서 그 문장을 고스란히 봤다. 지인의 경우를 미리 봐서일까. 다행히 나는 힘들진 않았고 신기한 감정만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내 글을 가져간 걸까. 제 3자가 두 개의 글을 다 봤다면 분명 의아해할 그런 글을 저 사람은 왜 쓰는 걸까. 혹시 창조를 위한 모방, 차용 정도로 생각한 걸까. 그 사람의 글 속에 한 문장으로 들어있는 내 글 조각은 참으로 불쌍해보였다.

 

 

 

다시 생각을 바꿔 내 글로 시선을 돌렸다. 내 글은 순수하게 내 스스로의 생각만을 쓴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나 역시 누군가의 작품을 읽고,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것들이 쓰여진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정 정도의 숙성을 거친 후 내 나름의 것으로 바뀌어졌겠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천하의 저 랭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글 들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까. 문명의 전파로 인한 문명의 교류에 대한 영향을 해석하는 건 후대의 일이다.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 영향을 알아채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현상이 잦지 않았던 옛날과 달리 매일같이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현대에는 그 후대의 간격이 점점 짧아져 몇 년 뒤가 될 수도, 몇 달 뒤가, 혹은 몇 일 뒤가 될 수도 있겠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출판물 시장에서의 문명의 전파 또한 마찬가지.

 

훌륭한 작품을 읽고난 후엔 내 글이 조금 달라지는 걸 느낀다. 내 속의 무언가가 감응하여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뒤라면 더욱더.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내 글을 다시 읽어봐도 비슷한 문구 등은 찾아볼 수도 없는데 내 글은 분명 바뀌어 있다. 단어 하나, 문구 하나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전반적인 글의 기조, 글의 흐름, 글을 써내려가는 힘 등이 바뀌어 있다. 문학 수업이나 그 비슷한 무엇 하나 해 본 것이 없어서 뭐라고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 생각도 바뀌고, 쓰는 글도 바뀌게 된다, 라고나 해야할까. 이렇게 생각하니 앞서의 그 사람이 조금 이해가 간다. 그 사람도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았던 걸까. 그래서 차용이라고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내 글의 조각도 여타의 훌륭한 작가들 글처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 힘을 가졌던 걸까.

 

 

그 사람이 자신의 글을 빛내기 위해 남의 글 일부분을 차용(도용)했는가, 내 글 조각이 좋아서 자신의 글의 빈 공간에 꼭 채워넣고 싶었는가, 내 글 조각으로 인해 그 사람의 글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하는 건 그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이웃의 글을 읽고 내 글에 생기는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일어난 '모방'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 (모방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과정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내가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나저나..정수일 샘은 정말 글을 잘 쓰신다. 앞뒤의 짜임에 한 치 흐트럼이 없다. 얼마나 치밀한 사유를 하시는 양반이신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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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6-0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간혹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요. 심지어는 제가 해 준 말을 나중에 제게 똑같이 해주더라구요. 그땐 술자리라 취해서 제가 그 말의 출처임을 잊었나 했더니 원래 그런 사람이더군요(이 사람이 제게 해 준 말을 나중에 A라는 사람에게서 또 들었는데, 결국 출처는 A였어요). 그래도 말이건, 글이건 어느 정도의 출처개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의 톤, 어조, 구성같은 경우는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실험해볼 수도 있고, 무의식중에 자기 글에 뭍어날 수 있겠지만 타인의 글 일부를 빌렸으면 적어도 '어떤 글을 보니 ~~라고 하더라' 정도는 써줘야 하지 않을까요?

정수일님의 책은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달사르님께서 글까지 잘 쓰신다니까 갑자기 이 책이 마음 속에서 벌떡 일어서네요.^^

달사르 2012-06-07 11:10   좋아요 0 | URL
하하. 신기한 사람이네요. 자신만의 명확한 생각이 희박해서 저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저분도 분홍신님이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남아서 은연중 귀에 박혀 있었나봐요. 좋은 생각이니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을까요. "야. 너는 내가 해준 말을 니가 한 것처럼 포장해서 말하냐?" 했으면 당황했을까요? ^^
분홍신님이 들어주신 예를 생각해보니, 타인의 글 일부를 빌린다는 인식이 없이 자기 것인양 글을 가져갔을 개연성이 있군요. 나중에 발전가능성을 생각한다면 타인의 글을 타인의 글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물론 그 사람의 몫이긴 하지만) 가급적이면 지양해야겠어요.

앗. 분홍신님! 저도 초원..책 주목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정수일 샘이 내신 <오도릭의 동방기행>과 묶어서 주문할까. 초원..을 먼저 주문할까..고민하고 있었거든요. 히힛. 우리 초원..책 같이 읽어염. ^^

탄하 2012-06-12 23:11   좋아요 0 | URL
아, 어제 제가 여기 댓글단다하고 걍 갔네요.
정수일님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같이 읽으면 진짜 즐거울 것 같아요.
저는 7월쯤 읽을 생각인데 달사르님은 괜찮으신지...
아직 누구와 같은 책을 함께 읽어본 적은 없어서 은근 기대의 떨림이 이네요.^^

달사르 2012-06-13 13:17   좋아요 0 | URL
넵. 그래요. 저는 지금 수중에 이 책이 있답니닷. 지금은 비슷한 류의 다른 책을 읽고 있어염. 왠지 책끼리 연결이 될 듯하여 저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답니닷.

7월에 같이 읽읍시닷. ^^

transient-guest 2012-06-07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걸 봐요, 주로 나이든 선배들, 특히 젊을때 술 많이 마신분들ㅋㅋ, 제가 예전에 한 이야기를 다시 저한테 들려주더라구요...나이가 들면...-_-
좋은 문장이나 말이 소화가 되어 완전히 내것이 된 후에, 다시 나만의 것으로 나오면 표절/모방보다는 영향을 받은 창조가 되겠지만, 그대로 가져다가 - 인용이 아니라 - 베끼면서 자기의 글로 만들면 문대성이 되는 거죠..ㅎㅎ 기분이 나쁠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6-07 11:24   좋아요 0 | URL
앗. 문대성..ㅠ.ㅠ 그렇담..그건..아닌거로군요..ㅠ.ㅠ
암튼, 나도 그런 경우를 당했긴 하지만, 나도 타인의 글에서 그런 실수를 안 해야겠다고 생각되네요. 글을 베끼는게 실수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긴 하지만, 암튼.

ㅋㅋ 술 많이 마신분들. 이야기 하시니까 엄청 공감되는데요. 술이란게 나중엔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모르게 되잖아요. 술 이야기 나오니까 음악가 이야기가 또 안 나올 수 없는데요. 하루키의 재즈에세이 에서 소개해줘 알게 된 책인데요. 빌 크로의 <재즈우화>라는 책에서 정반대의 사례가 나와요. '레드 켈리와 강아지' 이야기라고 음악가들에게는 유명한 일화인가봐요. 베이스 주자 켈리가 어느날 근사한 파티에 초대되어 갔다가 얼큰하게 취해서 화장실을 찾다가요. 근처 책상에 부딪혀 잉크를 쏟았는데 바닥이 하얀 양탄자였다더군요.ㅠ.ㅠ 부리나케 도망간 켈리가 다음날 사과를 하려고 그 집을 다시 들렀고 응접실에서 안주인을 기다린답시고 의자에 앉았는데요. 뭐가 묵직한 느낌이 나서 일어났더니 안주인의 애완견의 목이 부러졌다더군요. 그래서 피아노 덮개 안에 숨기고 그길로 그집과 안녕~해 버렸대요. 근데 문제는!!

이 이야기가 원래 켈리가 친구 마이크 호비에게 들었던 이야기라는 거죠. 너무 재미있어서 호비에게 듣고선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면서 켈리가 그랬대..켈리가 그랬대..라고 헛소문이 나서는 장장 30년이나 회자되었다네요. 여기서 또 웃긴건요..몇 년 뒤에 예의 그 마이크 호비와 켈리가 만났는데 호비가 켈리에게 그랬다더군요.

"야. 강아지 깔아뭉갠게 너라며?" 라고 했다는..쩝..

transient-guest 2012-06-08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허걱이네요ㅋㅋ 알고보면 그런 경우가 꽤 많을 것 같아요. 내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사람들에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가 퍼져서, 꼭 내 이야기처럼 된다는거..ㅎㅎ 아.. 그리고 맞아요. 원초적인 베끼기는 절대로 실수로 나오지 않죠. 근데, 석박사/학사논문의 상당수가 표절이라고도 하니, 한심하죠?

달사르 2012-06-09 21:41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허걱이지요? 이야기라는 게 저런 속성이 있다면 카더라, 통신 역시 절반 정도만 수긍하고 넘어가야될 것 같애요.

아. 맞지여. 정말 고생해서 자신의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저 '표절'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미안해해야할지요. 논문을 표절할 정도로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냥 논문을 포기하는 게 나을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