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부탁으로 자료를 찾기 위해 정수일 샘의 책을 뒤지던 중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화차>의 혼마 형사처럼 예전에 풀지 못했던 한 과거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http://blog.aladin.co.kr/772922133/5643960 )
교류의 역사적 배경이란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을 말한다. 문명 자체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모방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파, 수용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전파와 수용이 현실화되려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문명간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교류는 일정한 역사성을 띠고 특정 시대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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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누군가가 자꾸 내 글을 베껴요. 그냥 몰래 베끼면 차라리 나은데 댓글로 글이 좋다는 찬사를 늘어놓고선 며칠 뒤 자신의 글에 내 글을 슬그머니 갖다 붙이는 거에요. 마치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
지인은 그 일로 무척 힘들어했다. 지인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서 글을 빚는 듯한 착각이 들게끔 아주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글의 작은 조각이 자신과 무관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는 건, -게다가 전혀 다른 해석으로 -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 이후 나 역시 같은 경험을 한 번 했다. (오래전 일이다)나의 생각 속에서 오래 묵은 그 무엇이 글로 나왔는데 며칠 뒤 댓글을 달아준 누군가의 글에서 그 문장을 고스란히 봤다. 지인의 경우를 미리 봐서일까. 다행히 나는 힘들진 않았고 신기한 감정만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내 글을 가져간 걸까. 제 3자가 두 개의 글을 다 봤다면 분명 의아해할 그런 글을 저 사람은 왜 쓰는 걸까. 혹시 창조를 위한 모방, 차용 정도로 생각한 걸까. 그 사람의 글 속에 한 문장으로 들어있는 내 글 조각은 참으로 불쌍해보였다.
다시 생각을 바꿔 내 글로 시선을 돌렸다. 내 글은 순수하게 내 스스로의 생각만을 쓴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나 역시 누군가의 작품을 읽고,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것들이 쓰여진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정 정도의 숙성을 거친 후 내 나름의 것으로 바뀌어졌겠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천하의 저 랭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글 들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까. 문명의 전파로 인한 문명의 교류에 대한 영향을 해석하는 건 후대의 일이다.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 영향을 알아채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현상이 잦지 않았던 옛날과 달리 매일같이 전파, 교류가 일어나는 현대에는 그 후대의 간격이 점점 짧아져 몇 년 뒤가 될 수도, 몇 달 뒤가, 혹은 몇 일 뒤가 될 수도 있겠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출판물 시장에서의 문명의 전파 또한 마찬가지.
훌륭한 작품을 읽고난 후엔 내 글이 조금 달라지는 걸 느낀다. 내 속의 무언가가 감응하여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뒤라면 더욱더.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내 글을 다시 읽어봐도 비슷한 문구 등은 찾아볼 수도 없는데 내 글은 분명 바뀌어 있다. 단어 하나, 문구 하나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전반적인 글의 기조, 글의 흐름, 글을 써내려가는 힘 등이 바뀌어 있다. 문학 수업이나 그 비슷한 무엇 하나 해 본 것이 없어서 뭐라고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 생각도 바뀌고, 쓰는 글도 바뀌게 된다, 라고나 해야할까. 이렇게 생각하니 앞서의 그 사람이 조금 이해가 간다. 그 사람도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았던 걸까. 그래서 차용이라고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내 글의 조각도 여타의 훌륭한 작가들 글처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 힘을 가졌던 걸까.
그 사람이 자신의 글을 빛내기 위해 남의 글 일부분을 차용(도용)했는가, 내 글 조각이 좋아서 자신의 글의 빈 공간에 꼭 채워넣고 싶었는가, 내 글 조각으로 인해 그 사람의 글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하는 건 그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이웃의 글을 읽고 내 글에 생기는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일어난 '모방'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 (모방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과정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내가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나저나..정수일 샘은 정말 글을 잘 쓰신다. 앞뒤의 짜임에 한 치 흐트럼이 없다. 얼마나 치밀한 사유를 하시는 양반이신지,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