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이 배달되어 온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나와 직원은 먹지를 못하고 있었다. 넉달짜리 장기약 처방전을 들고오신 손님에다 단타로 오시는 손님들까지 저녁시간대에 몰린 날이었다. 열심히 약을 짓고 검수를 하며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왠 여자 손님이 굳은 얼굴로 들어오신다. 얼굴맹이지만 낯이 익은 사람이다. 아까 점심 시간에 오셔서 진을 빼놓고 간 사람인데다 목소리조차 특이해서 금방 기억이 났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대뜸 밀담을 나누자는 자세로 내 얼굴에 바싹 다가붙는다.
"종업원이 친척이신가요? "
"네? 왜 그러시죠?"
첫 마디에 이미 감을 잡았다. 무언가를 따지러 왔고, 나에게 일러바치러 온 것이다.
"종업원이 친척이 아니신가요?"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아까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오후 내도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요. 그래서 왔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셨습니까?"
"제가 거즈를 달라고 하고, 또 무엇을 달라고 하고 그랬는데요. 종업원이 몇 번 약국 매대 앞으로 왔다가 또 매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했어요.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힘이 드는지 저보고 글쎄, 필요한 게 있으면 한꺼번에 다 말씀하시면 제가 챙겨드릴께요..라고 하는 거 있지요. 종업원이 그런 말을 하면 되는 겁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다. 우리 약국은 공간이 협소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의 원칙으로 전문약, 일반약이 아닌 약은 모두 매대 밖으로 내놨다. 손님이 마음껏 고르고 또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비교도 하게끔 진열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슬쩍 현상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사소한 이유로 나의 원칙을 깨기가 싫어서 가게 오픈부터 아직까지 의약외품과 건강기능식품, 공산품 등은 매대 밖에 놔두고 있다. 처음엔 낯설어하고 어색해하던 손님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조제를 마치고 나와보면 자신들이 원하는 물품을 기다리는 동안 골라놓고 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냉장고에서 음료수 등도 미리 마시고 빈 병만 매대 위에 올려놓아 계산을 바로 하게끔 해놓는 센스쟁이들도 생겼다.
오늘 일은 이랬다. 손님이 지인의 전화를 기다려서 통화를 한 후 필요한 물품을 듣고서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달라고 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손님이 하나 달라고 하고는 가만 있는 거다. 필요한 것을 다 샀다고 생각한 직원은 매대 안으로 돌아와서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그제서야 또 다른 하나를 달라고 한다. 직원은 웃으면서 다시 매대 밖으로 나갔고 하나를 골라왔고 매대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두 세번을 반복하는데 내가 가만 보니 이건 똥개 훈련 시키는 꼴이다. 그래서 직원이 손님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 챙겨드릴께요. 라고 했는데 손님 입장에서 기분이 나쁜 거다. 그치만 직원은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고운데다 그 말을 할 때도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했었다. 나라면 아주 환대받는 기분에 몇 번이나 직원을 왔다갔다 한 것에 미안해했을텐데 손님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소위 자신이 '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달라고 하면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줄 것이지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건방지게 한꺼번에 말을 하라마라야. 내가 생각나면 말 하는 거고, 생각 안나면 생각 날 때까지 가만 있다가 말 하는 거지. 이런 '갑'의 생각을 가진 손님은 나에게 아까의 상황을 일러바치며 내게 직원의 험담을 공유하길 바랬고 직원교육을 잘 시키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손님이 무조건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손님, 저희 직원이 아까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하는 걸 저도 들었는데요.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신 거지요?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보면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하게 되지 않나요? 그리고 통화를 하셔서 필요한 물품을 다 전해들으셨는데 그걸 저희 직원에게 말만 하면 찾아줄텐데 하나 말하고 직원이 안에 들어가면 또 말해서 나오게 나고,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 손님이 왕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이 거리가 얼마나 멀다고 왔다갔다를 못해요. 그게 그렇게 힘이 들어요?"
"힘이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말하면 찾는 시간도 절약되고 합리적인데 한꺼번에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그것이 기분나쁘다고 하시면 저 역시 손님에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까 손님이 의자에 앉아계셨고 저는 조제손님을 보낸 뒤에 손님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봤었죠. 근데 손님은 전화받구요, 라는 냉랭한 목소리로 눈을 내리깔며 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씀하시고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손님이 왜 약국에 왔는지 의아해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전화를 받는다는 건지? 전화를 받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전화를 받아서 필요한 약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그 상황에서 제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손님이 말하기 귀찮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가만 있었는데 저희 직원이 친절하게 구매를 도와준 걸 가지고 그렇게 기분이 나쁘시다면 저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 부분이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저는 손님의 차가운 말투와 매서운 눈매가 무서웠습니다. "
손님이 당황해했다. 손님이 기분 나쁜 게 있다면 나 역시도 있다라고 하는 내 말이 역습이었나보다. 뭔가 다른 일로 기분이 나쁘던 터에 약국을 들어왔고, 아마 약 심부름을 하기가 귀찮았던 게지, 암튼, 약국에 들어와서 직원이 하는 친절한 말도 고깝게 들렸고, 집에 갔는데 자꾸만 기분이 나빠졌고, 감히 손님인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을 건네다니 괘씸했고, 약국 주인에게 일러바쳐서 직원 혼꾸멍을 내줘야겠다 싶어서 귀찮지만 약국을 다시 들렀는데 어라? 뭐 이런 주인이 다 있어? 손님이 '갑'인 걸 모르는 주인이네?
나는 한 마디를 더 했다.
"손님. 손님이 기분 나쁜 일이 그것이라면 저 또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거구요. 그런 사소한 일은 이제 성인이신데 본인 선에서 툴툴 털어버리셔야지요. 그런 사소한 걸로 기분 나빠하시면 사회생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다시 생각해보시면 저희 직원의 센스있는 발언인데 손님이 오해해서 들으신 걸 가지고 엄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손님은 똑부러진 내 말에 얼이 빠져서 더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나갔다. 혹 떼려다 혹 붙인 표정을 하고선. 그리고 조제실에서 직원이 나왔다. 직원은 내가 지은 장기약의 뒷정리를 마저 하고 나와서는 자기가 빵, 웃은 부분을 말해줬다.
"하하하. 저도 손님이 무서웠어요, 라니요. 약사님 덕분에 얼마나 웃었는지요. 그나저나 저 손님은 왜 저러시지요? 제가 그때 기분 나쁘게 말했다면 저도 나와서 따지거나 할텐데요, 저는 아주 기분좋게 말을 했는데 손님이 저러시니 화도 안 나요. 아마 날이 더워서 그런걸까요?"
그러면서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갑'의 위치에 있던 거래처 때문에 분쟁 당사자도 아니고 그저 옆에 있기만 했던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졌고, 가만히 있던 자기가 이유도 없이 '사과'를 종용받았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의리의 아줌마인 직원은 그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사건을 일으킨 직원의 일에 대한 고자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했는데 정작 주위에서는 침묵했더란다. 사건을 일으킨 직원과 주위의 동료들 누구 하나 거들어주지 않았고 거래처가 무조건 '갑'이라는 사장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자초지종은 중요하지 않았고 '을'의 위치에 있는 직원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표라는 결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직원에게 상처였는데 예전에 얼핏 들은 이야기를 오늘 다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갑'이 갑다우려면 갑의 위치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지 된다고. 그래야지 약자인 '을'도 강자인 갑을 예우해준다고. '갑'이라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저렇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갑'에게 강하고 사회적 약자인 '을'에게 약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늙고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저 쉬기 위해서 약국을 들렀을 때, 덥지요..라고 말하며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건네는 일이 '갑'에게 이유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것 보다 훨씬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늦은 저녁을 직원과 둘이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녁밥은 참으로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