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길을 나서고, 길 위에 오르며, 길을 찾아다니지 않을까.

낯선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 사람들은 '낯섬'이라는 이유로 먼 훗날의 그리움을 앞당긴다.

 

책표지다. 표지를 들추면 검은 속지가 나온다. 나는 책의 속지 색깔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김홍희는 검은 색을 택했다.  사진이 인화되기 전의 검은 방의 느낌. 세상에 나오기 전의 어머니 뱃 속 자궁의 느낌. 검은 색은 탄생 직전의 색깔, 여명 직전의 색깔이다. 표지를 들추려다보면 왼쪽도 같이 들리는데 살짝 들여다보면 표지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의미일까. 김홍희는 카메라의 셔터를 깜박이는 눈에 비유한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것이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찍는 척하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찍는다. (중략)

 

그것들은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언이 되어 떠돈다. 그러나 그 증언은 나는  거기 있었지만 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또 다른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p.21

 

 

 

김홍희의 몽골방랑은 몽골 소개가 아니다. 미리 당긴 그리움으로 그동안 제법 알게 된 몽골의 풍경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대한 소개도 없다. 유명한 곳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그가 보고 싶었던 건 발길 가는데로 가다보면 뭐가 나오나, 가 아니었을까. 길 위에는 사람이 있고 그리하여 사람을 알게 되고, 알아듣든지 말든지 간에 사람 말소리를 듣게 되고, 밥을 먹고, 자고, 말 보러 가며 낯섬을 곱씹는다. 여기서 말 보러 간다는 말은 몽골식의 화장실 가는 풍경을 지칭한다. 하지만 김홍희는 이 표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써먹지 않았다. 아마 일부러 안 써먹은 듯하다. '차이'를 느끼러 간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을 쓸 이유가 없었을까. 그는 그저 그곳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두루마리 휴지를 말아 몸 하나 감추기 버거운 작은 바위 뒤에 숨어 볼 일을 보는 그와 달리, 사방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휴지도 없이 일을 보는 몽골의 아이에게 부끄러워하면서.

 

 

 

카메라가 정면으로 그들의 얼굴을 겨누자 하던 일을 멈추고 약간 경직된 듯이 렌즈 속 깊은 곳으로 던진 눈빛은 무차별한 어떤 힘에 대한 반항이나 분노 같은 것이었다. 수바뜨라는 말놀이를 하며 내 주위를 맴돌앗고, 누이 아무라도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내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불쑥 카메라를 코앞에 들이댄 순간 둘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었던 것이다.

 

                                                                                                       p.60

 

 

 

 

몽골 특유의 집인 게르, 몽골 특유의 돌탑인 어워, 몽골식 사냥인 매 사냥도 김홍희에게는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주유소를 찍을 때와 같은 느낌인 듯하다. 특별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윽고 보편의 자리로 퇴락하고야 만다는 의미일까. 우리에겐 특별한 것이 그 나라 사람에겐 일상일 터이고 그렇다면 낯선 여행객에 불과한 타인인 우리가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미일까. 김홍희의 여행은 특정 장소조차 보편화시켜 여행 그 자체의 의미에 집중시킨다. 지구별을 여행하는 우리에게 특정 장소가 보편 장소이고, 보편 장소가 특정 장소와 같다는 걸 이미 안다는 듯이. 그는 특정 장소를 보편화시키는 신기한 마법을 부려 그곳의 사람들까지 보편적으로 만든다. 평생 만나볼 일 없는 사진 속 사람들이 보편화되어 내 시야에 들어온다. 김홍희가 그렇게 그들과 만났고 그 만남들은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나와 만난다. 그들과 나의 만남에 안면이 없어도 공히 느껴지는 이 무엇. 이 무엇의 정체가 무엇일까.

 

김홍희의 무심한 듯 보이는 방랑의 매력에 빠져 들 즈음에 신기루가 나왔다.신기루도 김홍희에게 보편의 자리일까. 괜히 궁금해진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이미 눈 감은 순간의 장면임을 눈치챈 김홍희에게 신기루 역시 가짜 장면이다. 한 장의 사진이 과거라는 시공의 논증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황량한 사막 위를 몇날 며칠을 달려 한 장의 사진을 구하겠다는 이 행위 역시 무의미하지 않은가.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신기루가 신기루이기 때문일까. 김홍희가 신기루가 신기루임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갈증과 허기를 느끼며 생라면을 씹고 목 마른 입에 물을 들이붓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김홍희는 이미 찍은 신기루 사진들을 돌려보았고 이미 지나쳐왔지만 사진기 안에 생생하게 찍혀있는 신기루를 보면서 자각했다. 한 정점의 순간이다.

 

 

 

그것은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구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신기루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증명의 사진도 아니었다. 신기루를 보고 황홀경에 빠져 있던 과거 시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순간에 빠진 황홀경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흥은 더 증폭되어 현재 나에게로 전이되었다. 눈으로 보는 사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고스한히 찍고 전이시켰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선 짜릿한 교감이었다.

 

                                                                                                p.146

 

 

 

 

그리고..

머나먼 이국의 내가 같은 사진을 보면서 김홍희의 느낌을 교감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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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6-07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의 글이랑 발췌하신 글들이 너무 좋아서 꽤 천천히 곱씹으며 읽었어요.
그리고 한참 생각했죠. 이렇게 특별하지도 않고(말씀대로 특별한 것까지 보편화시키고), 때론 황량하기까지 한 사진들에 왜 제가 매료되었을까..하구요. 아마도 기대(의 몽골)->기대의 무너짐->공허->방랑의 지속->의지->구도자의 느낌..이런 흐름이 뭔가 마음을 정화시켰기에 그렇지 않았나 결론지어 봅니다.

이런, 제 페이퍼 쓰러 왔다가 달사르님 리뷰만 열심히 읽고 가네요.^^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달사르 2012-06-07 12:29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사진집은 처음 봤어요. 김홍희 님은 사진과 풍경, 그리고 그 사이의 사진가라는 기본설정에 대한 고민을 줄기차게 하시는 분 같애요.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는데요. 자신의 직업, 자신의 일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구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 말고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으며 그것을 갈망하고 또 그것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기 마련인데요. 김홍희 님은 자신에게 이미 존재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꾸준하게 생각하고 그것으로서 다시 세상을 비춰보는 그런 철학적 마인드가 보이더라구요. 분홍신님이 화살표로 언급하신 그런 마음과 김홍희님의 그런 마음의 접점이 있었기에 이 책이 분홍신님에게 좋았나봐요. 저에게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이분을 소개해준 분홍신님에게 고맙다는..(쑥스..) 알라딘의 페이퍼, 리뷰를 읽으며 이런 좋은 사람을 책으로, 사진으로 알게 되는 기쁨, 그리고 이것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벗의 존재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요? ^^
 

 

 

음악가에게 관심이 생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여타의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그 작품이 청자(혹은 독자)에게 어떤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작품을 접하고서는 과거의 자신과 조우를 한다든지,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든지, 혹은 아득한 그 무엇을 느낀다든지. 내가 무언가를 느꼈는데 그 대상에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무엇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니겠나.

 

 

선물받은 쇼팽 곡은 즉흥곡과 전주곡 모음이었다. 아, 즉흥환상곡도 있었다.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워낙에 유명한데다 조금이라도 피아노를 만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쳐봤음 직하겠다. 내게도 역시나 너무나 익숙한 곡이어서 옛 생각을 잠시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들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24개의 전주곡(프렐류드)들을 귀를 열어놓고 그냥 들었다. 몇 개쯤 들었을까. 갑자기 공기의 떨림이 생겼다. 어떤 한 음이 지속적으로 똑똑 떨어지면서 닫힌 창문임에도 어디선가 부는 바람이 느껴졌다. 의아한 생각에 창가를 기웃거려봤지만 열린 곳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원한 청아함이 느껴졌다. 다시 여기저기를 훑어보다가 그제서야 알았다. 오디오에서 들리는 소리의 청량함 덕분에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근무 중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집에 오자마자 집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니까 만화책 몇 권이더라..카이가 폴란드에서 열리는 쇼팽콩쿨에 나간 후의 일이니까 15권 전후겠구나..아..16권이다. 맞네. 이 부분. 내가 젤루 좋아하는 부분. 곡제목이 뭔지 알기도 전에 카이의 연주하는 장면만으로 감동받아 좋아했던 곡이었어. 이 곡을 연주하는 카이의 회상에 무척 공감이 되어 상상만으로도 멋졌고 슬펐고 눈물이 났었지. 음악은 귀로도 듣지만 마음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랄까.

 

빗방울이 듣는다. 맑은 호수에 한 방울 또르르, 코에 걸친 안경에 한 방울 또르륵, 연인의 머리 위에 툭툭, 하나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대지를 적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그리움은 바람결 따라 저멀리 쇼팽의 고향 지인들에게도 가닿는다. 그리움은 먼지의 냄새를 눅힌다.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아직 버티고 있구나. 요양하러 간 휴양지에서 연인(조르주 상드)을 기다리며 내리는 빗방울에 젖어들어 느꼈을 어떤 감흥.

 

 

                                  

 

                                       

 

 

                                  빗방울전주곡

 

 

 

유투브에선 ben kim의 곡을 찾지 못해  alfredo perl 의 연주를 올린다. 이 사람 연주도 아주 느낌이 좋다.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이 매우 잘 보인다. 빗방울 소리는 왼손의 A플랫으로 설정이 되어있으며 때론 부드럽게 때론 아주 애절하게 터치를 하면서 빗방울의 굵기를 달리 나타낸다. 오른손의 멜로디 라인 사이사이에 들리는 A플랫음은 멜로디의 보조음(통상적으로 왼손이 담당하는)이 아니고 오히려 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너른 들판으로 확장시킨다. 만화 특유의 과장된 표현법이 통한다, 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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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6-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이 쾌적하고 좋은 밤에도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빗방울이든, 추억이든, 행복이든...잔잔히 젖어들게 되네요.//
A플랫 설명, 최곱니다! 손가락도 열심히 보며 감상했어요.
(혹시 맨 아래 동영상이 달사르님일까? 기대해봤지만 아니군요..ㅠ.ㅠ)

달사르 2012-06-01 2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연습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아래 동영상을 좀 열씨미 보고 있슴돠. 히히히.
그나저나 여행길에 이 음악을 아이폰에 좀 넣으려고 했더니만, 컴사장님의 복귀가 이제사 이뤄져서 재촉하기가 좀...아..컴맹의 비애..ㅠ.ㅠ
 

 

 

전작주의 하고픈 작가님 발견! 

 

        오에 겐자부로

 

일본에는 사소설이라는 게 있다. 개인의 사생활을 소설 형식으로 쓰는데 논픽션으로 쓴다. 이런 게 하나의 주류를 형성한다는 게 의아하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소설은 작가의 사생활이 알게 모르게 들어간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경우도 마찬가지. 오에 겐자부로는 얼핏 보면 사소설 같은 소설을 쓴다. 내가 읽은 그의 몇 안 되는 소설은 모두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었고, 자신의 아들, 부인, 자살한 처남, 어머니, 고향 배경 등이 고스란히 들어가지만 이들을 등장인물로 만들어내는 소설은 픽션이다. 실지의 주위인물들을 소재로 한 소설. 생각만으로 근사하다. 게다가 소설을 쓰는 그 과정을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테라피의 일종으로 사용하는 솔직함마저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첫 아들은 소아마비다. 세상의 모든 부모의 심정은 같다지만, 아프게 태어난 자식을 보고 얼마나 아팠을지. 테라피로서 소설을 쓰는 과정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었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도전을 했고,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고, 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했다. 평생의 친구이자 동시에 처남이 되는 사람이 자살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족들은 견뎠고, 이 견딤의 과정을 오에 겐자부로는 역시나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자신의 아픔의 치유와 더불어 세상에 존재하는 또다른 아픈 사람들에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진솔한 글은 그래서 진실된 힘을 얻게 되고 읽는 이는 소설을 읽는 재미와 더불어 자신의 아픔과 같은 주파수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건 잘났건 못났건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는 용기와 이를 소재로 등장인물들이 겪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모험담이다. 이는 마치 평행우주에서의 또다른 오에 겐자부로(혹은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주면서 동시에 힘내! 라고 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힘껏 오에 겐자부로에게(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보내게 된다.

 

그런데..

절판이 너무 많다..

 

 

죽은자의 사치

세븐틴

사육, 짓밟히는싹들

겨울골짜기

말하고 생각한다 쓰고 생각한다

2백년의 아이들

브라질풍의 포르투갈어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

히로시마 노트

절규

 

그리고..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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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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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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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딛고 사랑을 되찾은 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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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프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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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2-05-3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시장이 작아질수록 절판/품절이 빨라지는 것 같아요. 한국어 책으로 맘에 드는 것이 나오면 빨리 구입하려는 조바심마저 생기게 합니다. 미국에서 사면 값이 1.5-2배가 되어서 마구 사들이지는 못하기 때문에 주로 보관함과 장바구니를 무한왕복하는 책들이 생기게 되네요. 구하기 어려운 만큼, 하나씩 찾아서 빈 칸을 채워가는 재미가 쏠솔할 것 같네요.

달사르 2012-05-31 19:28   좋아요 0 | URL
아..책시장이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 거군요. 요샌 절판이 너무 잘 되는 거 같애요. 책 가짓수는 예전보다 늘었을텐데 품절, 절판에 걸려서 원하는 책 못 사면 얼마나 신경질이 나던지요..하긴 음반도 마찬가지긴 하더라구요. 조기에 절판될 음반류는 나오자마자 미리 사서 나중에 중고로 비싼 값에 팔려고 준비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참고로 저도 그런 의미로 DG 111을 사놨다는..( ") 물론 팔진 않았지만요.)
뭐 그런 분들 덕분에 절판된 음반이나 책을 구입할 수 있어 고마운 면도 있기도 해요.

미국에서 사면 그렇겠어요. 한국 나올 때 왕창 사셔서 나중에 미국 가서 하나씩 아껴서 보셔야겠어요. ㅋㅋ 저도 보관함과 장바구니엔 이미 몇백만원어치 들어있다는..구매도 못하면서 흐뭇하게 장바구니를 쳐다보다 이건 뭥미? 할 때도 있구 말이죠.

탄하 2012-06-0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판과 판매가 거의 반반이네요. 정말 의외군요.
절판된 책 없이 개정과 중복을 거듭하고 있는 하루키에 비하면 좀 심각하네요.
하루키껀 요즘엔 거의 안 읽을법한 <고독한 자유>까지 그대로 있는데 말입니다.
겐자부로는 (명성때문에) 이름만 알고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16인의 반란자>를 읽고 나니까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지더라구요.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무척 인상깊은 소신과 삶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겐자부로는 여기에다 표정마저 특별했어요. 뭐랄까, 미동도 않는 맑은 호수같은...

달사르 2012-06-01 20:56   좋아요 0 | URL
네. 하루키랑 비슷하게 생각하다 이번에 오에 겐자부로 책들을 수집하면서 크게 깨달았지요. 하루키 책도 빨랑 모아놔야겠다, 라고 말이죠. 주문하는 기쁨을 더 만끽하기위해 미리 주문해놓지 않고 아껴가면서 읽고픈 마음 들 때 그때 주문해야지..생각했다 큰 코 다칠 뻔 했어요!

겐자부로는 기성작가들과 다른 뭔가가 많이 있는 거 같애요. 하루키와 비슷하게소설 자체로 어느 나라에나 통할 보편성을 가진 것부터 일단 대단하구요. 아마 어린 시절부터 외국소설을 원서로 읽는 버릇해서 외국식 사고가 뇌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않나 싶어요. 외국말을 회화로는 그렇게 힘들어한다는데 책으로는 술술 읽어내니 말이죠. 그에 대해 더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데요. 분홍신님이 언급하신 '미동도 않는 맑은 호수'의 느낌, 저와 같네요. 저도 그 느낌이에요.

자연의 소리를 글로 풀어내는 작가, 라는 잠정 결론을 저는 내리고 있거든요.
 

 

 

책 읽는 맛이 조금 느껴진다. 방금 먹은 요플레의 달콤한 맛처럼.

 

 

오늘은 간만에 목욕탕에 다녀왔다. 시골 목욕탕은 달목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서 앉아있으면 다 아는 형님이고 아는 동생이고 아는 새댁이다. 나처럼 아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운이 좋으면 요플레를 공짜로 먹을 수가 있다. 달목욕을 끊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주 무언가로 한 턱을 낸다. 손주가 성적이 잘 나오는 경우에도 한 턱을 쏘기도 하고 서울에서 자식이 내려와서 용돈을 받은 경우에도 그러하다. 오늘도 누군가가 한 턱을 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중에 친한 멤버들끼리 찜질실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속에 그 이유는 나올 터이다. 나 같은 뜨내기는 그냥 속으로 축하만 하고 기분좋게 먹을 뿐이다. 하긴 나도 예전에 한 턱 냈던 적이 있다. 이유는 내가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왔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통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고 요플레를 목욕바구니 한 켠에 얌전히 놓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소한 그 무언가가 나를 스쳐갔다.

 

집에 와서 엄마방 컴터를 켠 후 요플레를 뜯었다. 숟가락이 없어서 국물 먹듯 후르륵 먹었다. 물론 뚜껑에 묻은 건 혀로 싹싹 핥아먹었다. 용기 바닥에 남아있는 요플레를 어찌 먹을까. 부엌에 나갈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는데 일어서기 싫다. 목욕을 한 노곤한 몸은 쉬어줘야 한다. 스윽 둘러보니 뻥튀기 과자가 보인다. 엄마가 컴퓨터로 맞고를 치면서 간식용으로 놔둔 모양이다. 묶은 매듭을 풀어 하나 입 안에 넣어보았다. 스르륵 녹는다. 맛있다. 한참을 먹다가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뻥튀기로 수저 모양을 만들어 요플레를 떠먹어보았다. 묘한 맛이다. 요플레도 익숙한 맛이고 뻥튀기도 익숙한 맛이었는데 둘의 조합은 묘한 맛이다. 어떤 묘한 그리움의 맛.

 

 

<화차>를 읽었다. 절판된 어떤 책을 중고로 주문하기 위해 금액을 맞추려다 같이 장바구니에 들어간 <영웅의 서>를 읽으면서 미미여사를 알게 되었고 특유의 어떤 밝음을 느꼈다. 거창한 서사로 사람을 유혹하지도, 세밀한 은유로 사람을 매혹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잘 읽힌다. 첫 장면은 영화처럼 그림이 그려진다. 주인공 혼마 슌스케는 전철을 타고 있고 전철 맨 앞 차량의 가운데 출입문 옆에 서 있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긴 우산을 짚고서. 그 우산은 마치 지팡이처럼 혼마를 지탱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빈 의자가 많다. 앉을 곳이 많은데 혼마는 왜 서 있는 걸까. 급히 내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앉기 귀찮아서일까. 그러나 실은 혼마는 물리치료를 받고 귀가중이다. 수사 과정 중에 다리에 총을 맞은 혼마는 물리치료 후 근무처인 수사과에 들렀으나 환대와 함께 귀가를 재촉받는 느낌을 받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굳이 전철 출입문에 서 있는 혼마의 마음을 엿보면서 나는 이 소설의 맛을 알았다.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고 있는 형사라는 직업이 필요했을 것이고 쉬고 있는 형사의 갑갑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철에서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있는 형사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까지는 생각이 쉬이 미친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미야베 미유키는 두 가지 장치를 쓴다. 우선 직접적으로 갑갑한 마음의 표현이다.

 

 

 

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페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휴직하지 말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순간 처음으로 따끔한 후회를 맛보았다.                                                                                  p.8

 

 

나는 저 '따끔한' 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가 휴직을 생각해보지만 또한 이런저런 갖가지 이유로 휴직을 하지 못할 터이다. 아니 자영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잠시 몇 달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는 올라오는 카드전표처럼 밀려온다. 반대로 혼마처럼 갑작스런 이유로 휴직을 하는 경우에도 역시나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쉬어보지 않았지만 쉬이 상상이되는 일이다. 일이란 건 쉬는 동안에 규칙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종류일 뿐 아니라 아예 내 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종류라는 사실이 저 '따끔한' 이란 표현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다 던져버리는 경우에 되려 강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어쨌든 혼마는 휴직을 후회하는 중이며 다친 다리의 더딘 회복에 갑갑해하면서 되려 반대의 행동을 한다.

 

찜찜한 기분 탓에 혼마는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 있다. 전철에 서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듯이.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실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혼마는 아픈 다리로 서 있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당히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하는 말을 들을 염려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오래전 소년과에 근무하던 무렵 선도했던 아이 중 상습절도범 소녀가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지만, 솜씨가 좋은 아이였다. 친구의 밀고가 없었다면 아마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젊은이들 취향의 고급 브랜드 전문점에서 도둑질을 했지만, 훔친 옷을 입고 남들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과감하게 팔아치울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꼬리가 잡힐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대신 아무도 못 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번갈아 입어보았다. 이런저런 코디네이션을 궁리해보고, 옷뿐만 아니라 시계나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맞춰 패션잡지 모델처럼 꾸민 후 포즈를 취했다. 오로지 자기 방의 거울 앞에서만. 그러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을 염려도 없으니까. 정작 밖에 나갈 때는 늘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만 입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한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다 그렇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소녀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중략)

 

가메이리 역에 도착하자 승객 몇 명이 올라탔다.                                             p.9

 

 

아무도 자기를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곳에서, 애써 아픈 다리에도 우산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혼마의 심정은 과거의 한 사건을 들려주면서 더 실감이 난다.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다. 과거는 현실로 불려져 나오면서 살아있는 시간으로 변한다. 본인이 직접 겪었든 타인의 경험을 들었건 간에 과거의 사건은 기억의 저 편에 언제까지라도 저장되어 있다 적절한 순간에 살아 펄떡이며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위안을 준다. 과거의 힘은 그런 것이다. 두번째 장치이다.

 

혼마는 자기가 보기에도 쓸데없는 고집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길어지는 휴직에의 불안함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무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과거는 그의 머리 속 영상으로 재연된다. 풋내기 형사 시절 그저 하나의 일화로 남아있던 그 과거는 불현듯 혼마에게 찾아들어 그를 위안한다.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습절도범 소녀의 마음까지 이해된다. 애써 훔친 옷가지들을 걸치고 거리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하는 간이 작은 소녀가 집 안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묘한 일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마의 마음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숨겨져 있었을 것이고 그 궁금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역시 혼마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 풀려버렸다. 과거는 이렇듯 스스로 그 해결점을 들이밀어 현실의 자신을 위로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의 시작에서 아주 멋지게 이 장치를 이용했다.

 

물론 이 장면은 뒤에 나올 소설의 줄거리를 위해서 또한 필요한 장치이다. 죽은 부인의 사촌의 아들의 약혼녀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맡게 되는 혼마 형사가 실종된 약혼녀를 찾는 과정에서 다시 나온다. 약혼녀는 왜 스스로 실종을 자처한 것일까. 삭막한 현대의 도시가 피붙이가 전혀 없는 약혼녀를 다시금 혼자되는 과정인 '실종'으로 밀어붙인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이 약혼녀의 실종을 찾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나온다.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카드빚을 빌려 이 고독은 가시화되며, 고독하지 않는 방법은 소설 중간중간에 별사탕처럼 흩뿌려져 있다. 별사탕을 얼마만큼 찾는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서.

 

 

엄마가 목욕탕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어보았다.

"아까 그 아줌마가 왜 한 턱을 쏘신거야?"

"으응. 오랜만에 와서 반갑다고. 반가운 턱을 낸거래."

 

요플레에서 났던 묘한 그리움의 정체를 왠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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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2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 이름처럼 책 속에 숨은 이야기 맞네요 ^^
책 속 주인공 뿐 아니라 책을 쓴 이의 심리까지 읽어내시는군요. 거기에 자신의 경험까지 섞어, 좋은 에세이 한편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달사르 2012-05-29 18:38   좋아요 0 | URL
^^ 리뷰 쪽으로 써보고 싶은데, 쓰다보면 이상하게 매번 에세이 류가 되는 거 같애요. 책 속의 숨은 이야기가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상상하면서 책을 읽으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도 좀더 잘 되더라구요. 히.

미미여사의 책은 그저 쉽게 읽고마는 베스트셀러 류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글 중간중간에 삶의 통찰이 엿보여서 기분좋게 읽고 있어염.

이진 2012-05-2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말에 동감해요. 저는 화차의 첫 부분을 읽으며 사실 지루하기까지 하다 생각했는데 달사르님께서는 아주 캐치를 잘하셨군요. 캐치를 잘했다기보다 나인님 말처럼 읽어내셨군요. ㅎㅎㅎㅎ
낮에 폰으로 목욕탕 부분을 읽으며 흐뭇했어요. 다 아는 형님이고, 다 아는 동생이고 하는 부분에서 딱 맞다,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ㅎㅎㅎ

달사르 2012-05-29 18: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책이란 게 신기해서 어떨 때는 저런 게 눈에 잘 들어오고 어떨 때는 눈을 씻고 봐도 하나도 안 보이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이번 휴일에 작정하고 읽었는데 예상외로 잘 읽혀서 무척 기분이 좋네요. 캐치란 단어, 아주 적절한데요. 히히.

ㅎㅎ 소이진 님도 얼핏 듣기로(읽기로)는 시골 어드매쯤 ( ") 계신다고 들었어요. ㅎㅎㅎㅎ 공감이 절로 되지여? ^^

자목련 2012-05-31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읽고 있어요. 요플레를 먹을 때마다, 달사르님이 생각나고 목욕탕이 생각날 것 같아요. 목욕탕이라는 말이, 정겹게 느껴져요. 요즘엔 시골에서도 목욕탕은 사라지고 찜찔방이나 불가마 같은 게 많아요.문득 벌개진 얼굴로,요구르트 하나를 먹으며, 고개 숙인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고 싶어요.

미미여사의 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는데,화자는 영화로도 평이 좋은 것 같아 궁금하네요.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인데, 비가 오면 더 좋겠어요.^^

달사르 2012-05-31 16:27   좋아요 0 | URL
음악 좋지여? ^^ 좋은 음악은 틀어놓지 않았을 때 귓가에 계속 남아 흥얼거려지는 거 같애요. 요녀석도 그런 종류 중 하나!
맞지여. 시골에도 목욕탕이 사라지는 추세지요. 제가 다른 지역에 잠시 있을 때도 같은 걸 느꼈거든요. 근데 이 고향 동네엔 여전히 목욕탕이 대세라서 참 이상타, 생각했거든요. 알고봤더니 어르신들이 목욕탕을 목욕개념이 아니라 친목도모 의미로다 달목욕을 끊고서 다니시더라구요. 무슨 계추 하듯이 말에요. 이게 어른들만 그러면 몇 년 지속되다 말 터인데 이 모임이 재미있는지 젊은 새댁들이 속속 가입해서는 무슨 동호회 하듯이 목욕탕들끼리 계파가 나뉘어서는 봄이면 꽃놀이도 다니고 무슨 행사도 많이 하고 그러더군요. 참 희한한 동네다..생각했는데 요새 들어서는 정감있는 동네다..로 바뀌고 있슴돠. ㅎ

맞지여. 목욕을 하든 찜질을 하든 벌개진 얼굴로 먹는 요구르트, 겁나게 맛있잖아요. 이런 일상적인 조용함이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긴 드나봐요. 하하하.

화차는 책이 느낌이 좋아서 영화가 저도 궁금해요. 아마 dvd로 볼 거 같애요. 자목련님도 한 번 보시어요.
 

 

 

 

땀이 났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땀이 흥건하게 났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동료. 그래, 한때 동료였던 녀석이다. 스무살 파릇하던 시절에 건반 치고 드럼 두드리며 돼지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시절의 동료. 나보다 한 살 어린데다 동향 출신이어서 좀더 정이 갔던 녀석이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녀석은 손에 익은 북과 꽹과리를 놓고 우리 팀에 들어왔고 우린 연습과 공연을 함께 했다. 한참을 연습하다가 시원하게 한 잔 마시는 맥주와 새우깡을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했다. 그때의 추억은 아직도 내 마음 한 켠에 소중하게 접혀져 있었고 한동안 펴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마주친 녀석 덕분에 기억들이 화들짝 불려나왔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아빠 가게 앞에서 잠시 노닥이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 친다. 왠 녀석이지,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오랜 옛 동료가 환히 웃고 있는게 아닌가. 내 가운을 훑어보고, 맞은 편의 내 가게를 돌아보더니 누나가 하는거야? 물어본다. 다음에 한번 들르겠다고 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녀석은 손님인듯 가게를 들어오더니 한다리를 꼬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 대뜸 요새 뭐하냐고 물어본다. 잔가지는 묻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다. 

 

"어..대금..배우는데. 같이 대금 배울래? 너와 대금, 은근히 어울려보여."

 

녀석은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파르르한 까까머리였으며, 얼굴은 여전히 촌놈이었고, 손은 투박하게 큼지막해서 그녀석 손에서 들리는 대금소리가 궁금했다.

 

"대금? 뭐 국악기는 이것저것 다 해봐서.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소리는 날 걸?"

 

가게 한 켠에 놔둔 대금을 꺼내어 녀석에게 건네줬다. 녀석은 그 소리 내기 힘들다는 대금을 그저 휘파람 불듯  휘~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을거라 예상하며 웃어줄 준비를 하던 나는 낮게 깔리는 맑은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직도  대금 구멍을 제대로 막지 못해 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나와 달리 그 녀석의 굵은 손마디는 사뿐하게 대금 구멍을 막았고 소리는 완벽하게 나왔다.

 

"와. 멋진데? 소리가 아주 좋아. 같이 대금 배우자."

 

"음..난, 그래도 아직까지 노래..하고픈데..실은, 얼마전에 가곡 부르는 모임에 갔던 적이 있거든? 근데 왠지 나와 안 맞아보여서 말았어. 이것저것 재보기나 하고 막상 시작하기가 좀 그러네. 그냥 누나랑 같이 밴드나 만들까? 여전히 신디 잘 치지? 신디는 있어? 난 요새도 가끔 생각해 보는데..내가 그때 음악을 중단한 게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어. 아직까지 이렇게 음악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뜨끈해져 오거든."

 

녀석이 가고난 뒤 주고 간 명함을 봤다. 도예가. 팀해체 후에도 몇 년간 작곡 공부를 더 하던 녀석은 이제 도예가가 되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간 개인 전시회도 열었고 제법 자리를 잡은 눈치다. 도자기를 굽는 손가락은 여전히 작곡의 꿈을 접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 애틋한 음악이 왠지 예뻐보였다.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스무살의 파릇한 나를 기억해주는 내 몸이라.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반갑다. 내가 나이가 좀더 들어 <은교>의 노시인 만큼 나이가 들어 스무살의 내 기억을 몸이 떠올려준다면, 그때는 혹시 서글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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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신디를 다루셨었군요! 와-
약국 문 닫고 밴드 연습하러 가는 달사르님도 근사한데, 달사르님은 다시 밴드할 생각 없으세요? 멋지다..

달사르 2012-05-09 19:28   좋아요 0 | URL
넵! ㅎㅎ 오래전 이야기!

밴드..이제 체력이 딸려서요. ㅎㅎ 제 주위에 보면 트럼펫 하시는 정형외과샘, 밴드에서 기타 치시는 소아과 샘, 첼로 배우는 약사친구 등등이 있는데요. 다들 체력이 좋으시더라구요. 낮에 그렇게 일하고 퇴근해서 또 뭔가를 열씨미 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저는 지금하는 대금도 벌써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ㅠ.ㅠ

2012-05-09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2-05-0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더워져서 가운을 들춰보니 땀에 젖어 가운이 축축하다. 간만에 몸이 흥건하도록 배인 땀이 반가웠다. 머리도 잊고 가슴도 잊은 음악에의 꿈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ㅡ>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예전 나이트 음악이 나오더군요 그때 저도 갑자기 더워지면서 땀에 젖는 똑같은 경험을..시끄럽고 어둡고 멍멍하던 곳에서 지새웠던 그 밤들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는;;;

달사르 2012-05-09 19:41   좋아요 0 | URL
ㅎ 신기하지요? 몸이 기억을 하는 옛일을 정신이 뒤늦게 기억하는 걸 체험하고나면, 정신 못지 않게 인간의 육체도 신비한 그 무엇인 있는 거 같애요.

신지님도 같은 경험을 하셨다니 반가운데요? 히힛.

신지 2012-05-0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이 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또 엉뚱하게 바보같은 댓글을 단 게 아닌지...

제가 대금소리를 알게 된 건 서편제였습니다. 그 후로 국악 cd도 자주 사고 일부로 찾아서 듣곤 하는데 그렇다고 배경지식을 찾아보거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직접 보고 싶다, 이런 욕구가 좀처럼 없어서 그점이 저로서는 좀 단점인데) 제가 그동안 느낀 거 하나는, 무사안일로 어영부영 시간 보낸 동안, 나중에 보면 '직접 해보는' 사람들은 차곡차곡 경험이 쌓여서 갑자기 몰라보게 성장해 있더라구요. 뭐든 배우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달사르 2012-05-09 19:52   좋아요 0 | URL
아. 서편제. 맞아요. 서편제 나오면서 국악붐이 좀 불었더랬어요. 저는 전설의 고향에서 대금소리를 알았던 거 같애요. 헤.

저도 국악에 대해 배워야겠다, 뭐 음악을 들어야겠다, 란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그냥 친구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다 어쩌다..^^ (그래서 그런지 열씨미 다니진 못해요..ㅠ.ㅠ 아..그나저나 손가락이 안 벌어져서 큰일이에요. 수시로 짬짬이 째는데도 어찌그리 안 벌어지는지..저는 중간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단하더라도 일단 시작했다, 는데 의의를 좀 두는 편이구요. 물론 제대로 못한 게 아깝긴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한 가지 정도는 하지 않겠나..생각하고 기대를 하는데요. 대금 이걸 좀 제대로 하고 싶은데..손가락이..ㅠ.ㅠ)

탄하 2012-05-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Mr.Children의 뮤비가 문득 생각났어요.
초로의 아저씨들이 젊은 시절 함께 밴드를 하던 추억으로 의기투합하던...
이 뮤비도 한 때 인기였는데,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다고 해도 삶 속에서
> 지금 움직이려 하고있어
>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 희망의 수만큼 실망은 늘어나겠지
> 그래도 내일 가슴은 떨릴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상상해 보는거야
(이게 가사 중 일부였죠)

대금을 배우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신디에 대금까지...꺄~~!
마침 동료분도 대금을 잘 하시니 함께 퓨전을 하셔도 좋을 것 같은걸요.
혹시 다시 꿈을 펼치게 되시면 그때 공연 티켓 한 장 꼭 보내주세요.^^

달사르 2012-05-09 20:09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하. 분홍신님. 제가 이거 보고 아이패드로 지금 검색하고 있어염. 왜냐면, 제가요. 아이패드 샀걸랑요? 에헤헤헤헤헤. 아이패드 사서 뭔갈 빨리 해야는데, 아이패드 배우기 책도 사놨는데, 워낙에 기계치라 뭘하지..뭘하지..하고 있었는데요. ㅎㅎ 유투브! 가 있었군요! 아이패드로 유투브 틀어봐야겠어염. 뉴아이패드! 진짜루 화면이 선명하고 좋은데요.

우헤헤헤. Mr.Children, 음악도 좋군요! 가사는 밴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진하게 와닿겠어요.

대금..빨랑 운지법을 터득해야는데 손가락이 안 벌어져요, 분홍신님. 흑..

탄하 2012-05-13 11:22   좋아요 0 | URL
오옷! 아이패드! 축하드려요!^^
말씀 속에 마구 상기된 느낌이 전달되 오네요.
그.래.셔. 이번 주말은 아이패드와 함께~!^^

달사르 2012-05-27 22:31   좋아요 0 | URL
^^ 아직도 아이패드 못 쓰고 있어요. 이제 누군가가 퇴원을 곧 하면, 조만간엔 반드시!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