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맛이 조금 느껴진다. 방금 먹은 요플레의 달콤한 맛처럼.
오늘은 간만에 목욕탕에 다녀왔다. 시골 목욕탕은 달목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서 앉아있으면 다 아는 형님이고 아는 동생이고 아는 새댁이다. 나처럼 아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운이 좋으면 요플레를 공짜로 먹을 수가 있다. 달목욕을 끊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주 무언가로 한 턱을 낸다. 손주가 성적이 잘 나오는 경우에도 한 턱을 쏘기도 하고 서울에서 자식이 내려와서 용돈을 받은 경우에도 그러하다. 오늘도 누군가가 한 턱을 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중에 친한 멤버들끼리 찜질실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속에 그 이유는 나올 터이다. 나 같은 뜨내기는 그냥 속으로 축하만 하고 기분좋게 먹을 뿐이다. 하긴 나도 예전에 한 턱 냈던 적이 있다. 이유는 내가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왔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통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고 요플레를 목욕바구니 한 켠에 얌전히 놓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소한 그 무언가가 나를 스쳐갔다.
집에 와서 엄마방 컴터를 켠 후 요플레를 뜯었다. 숟가락이 없어서 국물 먹듯 후르륵 먹었다. 물론 뚜껑에 묻은 건 혀로 싹싹 핥아먹었다. 용기 바닥에 남아있는 요플레를 어찌 먹을까. 부엌에 나갈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는데 일어서기 싫다. 목욕을 한 노곤한 몸은 쉬어줘야 한다. 스윽 둘러보니 뻥튀기 과자가 보인다. 엄마가 컴퓨터로 맞고를 치면서 간식용으로 놔둔 모양이다. 묶은 매듭을 풀어 하나 입 안에 넣어보았다. 스르륵 녹는다. 맛있다. 한참을 먹다가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뻥튀기로 수저 모양을 만들어 요플레를 떠먹어보았다. 묘한 맛이다. 요플레도 익숙한 맛이고 뻥튀기도 익숙한 맛이었는데 둘의 조합은 묘한 맛이다. 어떤 묘한 그리움의 맛.
<화차>를 읽었다. 절판된 어떤 책을 중고로 주문하기 위해 금액을 맞추려다 같이 장바구니에 들어간 <영웅의 서>를 읽으면서 미미여사를 알게 되었고 특유의 어떤 밝음을 느꼈다. 거창한 서사로 사람을 유혹하지도, 세밀한 은유로 사람을 매혹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잘 읽힌다. 첫 장면은 영화처럼 그림이 그려진다. 주인공 혼마 슌스케는 전철을 타고 있고 전철 맨 앞 차량의 가운데 출입문 옆에 서 있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긴 우산을 짚고서. 그 우산은 마치 지팡이처럼 혼마를 지탱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빈 의자가 많다. 앉을 곳이 많은데 혼마는 왜 서 있는 걸까. 급히 내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앉기 귀찮아서일까. 그러나 실은 혼마는 물리치료를 받고 귀가중이다. 수사 과정 중에 다리에 총을 맞은 혼마는 물리치료 후 근무처인 수사과에 들렀으나 환대와 함께 귀가를 재촉받는 느낌을 받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굳이 전철 출입문에 서 있는 혼마의 마음을 엿보면서 나는 이 소설의 맛을 알았다.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고 있는 형사라는 직업이 필요했을 것이고 쉬고 있는 형사의 갑갑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철에서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있는 형사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까지는 생각이 쉬이 미친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미야베 미유키는 두 가지 장치를 쓴다. 우선 직접적으로 갑갑한 마음의 표현이다.
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페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휴직하지 말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순간 처음으로 따끔한 후회를 맛보았다. p.8
나는 저 '따끔한' 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가 휴직을 생각해보지만 또한 이런저런 갖가지 이유로 휴직을 하지 못할 터이다. 아니 자영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잠시 몇 달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는 올라오는 카드전표처럼 밀려온다. 반대로 혼마처럼 갑작스런 이유로 휴직을 하는 경우에도 역시나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쉬어보지 않았지만 쉬이 상상이되는 일이다. 일이란 건 쉬는 동안에 규칙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종류일 뿐 아니라 아예 내 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종류라는 사실이 저 '따끔한' 이란 표현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다 던져버리는 경우에 되려 강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어쨌든 혼마는 휴직을 후회하는 중이며 다친 다리의 더딘 회복에 갑갑해하면서 되려 반대의 행동을 한다.
찜찜한 기분 탓에 혼마는 아픈 다리에도 애써 서 있다. 전철에 서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듯이.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실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혼마는 아픈 다리로 서 있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당히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하는 말을 들을 염려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오래전 소년과에 근무하던 무렵 선도했던 아이 중 상습절도범 소녀가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지만, 솜씨가 좋은 아이였다. 친구의 밀고가 없었다면 아마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젊은이들 취향의 고급 브랜드 전문점에서 도둑질을 했지만, 훔친 옷을 입고 남들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과감하게 팔아치울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꼬리가 잡힐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대신 아무도 못 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번갈아 입어보았다. 이런저런 코디네이션을 궁리해보고, 옷뿐만 아니라 시계나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맞춰 패션잡지 모델처럼 꾸민 후 포즈를 취했다. 오로지 자기 방의 거울 앞에서만. 그러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을 염려도 없으니까. 정작 밖에 나갈 때는 늘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만 입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한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다 그렇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소녀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중략)
가메이리 역에 도착하자 승객 몇 명이 올라탔다. p.9
아무도 자기를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곳에서, 애써 아픈 다리에도 우산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혼마의 심정은 과거의 한 사건을 들려주면서 더 실감이 난다.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다. 과거는 현실로 불려져 나오면서 살아있는 시간으로 변한다. 본인이 직접 겪었든 타인의 경험을 들었건 간에 과거의 사건은 기억의 저 편에 언제까지라도 저장되어 있다 적절한 순간에 살아 펄떡이며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위안을 준다. 과거의 힘은 그런 것이다. 두번째 장치이다.
혼마는 자기가 보기에도 쓸데없는 고집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길어지는 휴직에의 불안함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무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과거는 그의 머리 속 영상으로 재연된다. 풋내기 형사 시절 그저 하나의 일화로 남아있던 그 과거는 불현듯 혼마에게 찾아들어 그를 위안한다.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습절도범 소녀의 마음까지 이해된다. 애써 훔친 옷가지들을 걸치고 거리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하는 간이 작은 소녀가 집 안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묘한 일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마의 마음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숨겨져 있었을 것이고 그 궁금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역시 혼마 자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 풀려버렸다. 과거는 이렇듯 스스로 그 해결점을 들이밀어 현실의 자신을 위로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의 시작에서 아주 멋지게 이 장치를 이용했다.
물론 이 장면은 뒤에 나올 소설의 줄거리를 위해서 또한 필요한 장치이다. 죽은 부인의 사촌의 아들의 약혼녀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맡게 되는 혼마 형사가 실종된 약혼녀를 찾는 과정에서 다시 나온다. 약혼녀는 왜 스스로 실종을 자처한 것일까. 삭막한 현대의 도시가 피붙이가 전혀 없는 약혼녀를 다시금 혼자되는 과정인 '실종'으로 밀어붙인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이 약혼녀의 실종을 찾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나온다.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카드빚을 빌려 이 고독은 가시화되며, 고독하지 않는 방법은 소설 중간중간에 별사탕처럼 흩뿌려져 있다. 별사탕을 얼마만큼 찾는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서.
엄마가 목욕탕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어보았다.
"아까 그 아줌마가 왜 한 턱을 쏘신거야?"
"으응. 오랜만에 와서 반갑다고. 반가운 턱을 낸거래."
요플레에서 났던 묘한 그리움의 정체를 왠지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