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오랫 동안 다루다 보면, 다루지 못하는 다른 것을 만나도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요즈음 발견한 기분 좋은  이론이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수학을 좋아했음에도 미적분의 그 많은 공식의 암기는 내게 힘든 일이었고 저절로 외워지는 몇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시험 칠 때 공식을 만들어서 쳤다. 그러니까 늘 내 암기는 80% 가량이었던 거다. 100%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왜 100%를 다 채워야 되는지 이해를 못했다고나 할까) 100%를 제대로 할 의지가 없는 적이 많았다.

 

작년 봄 즈음, 갑작스런 제안으로 시작한 공부는 많이 버거웠다. 돌아서면 외울 것 투성이였다. 매번 암기한 것을 테스트를 했는데 당장 한 주 전에 외웠던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다 못한 선생님은 암기하는 방법까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몇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암기하는 시늉만 하고 바빴다는 핑계를 대며 테스트 시간을 피했다. 다른 몇은 선생님 말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테스트해보지, 라는 생각 조차 없이 그저 암기력이 떨어지는 판국에 누군가가 제시한 방식을 일단 따라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매일 반복을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났다. 방학을 맞이한 요즈음, 양자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누군가는 기껏 외웠던 것조차 헷갈려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머리가 자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술술 나와버린다. 머리보다 입이,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다. 방학이라고 무작정 쉬는 것이 아니라, 다음 번 공부를 위해 기존의 못다 외운 것들을 죄다 암기해놔야하기에 요즘도 매일 동물이 입으로 자신의 털을 고르는 방식처럼, 입으로 점검을 한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운동하러 나가서, 자기전에, 그리고 중간중간에.

 

학창 시절에도 이렇게 열심히 해보지 않은 공부를 뒤늦은 나이에 하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제 옷인양 이미 내 몸에 붙어버렸나보다. 요즘엔 내친 김에 평소에 해보다 매번 실패한 것들을 하나씩 건드려본다. 먼저 외국어. 조만간 어디 나갈 계획이어서 외국어가 무척 절실한 상황이다. 학원도 실패, 인강도 실패, 개인 스터디도 실패, 이것저것 죄다 실패한 경력이 있는 나는 여전히 약국에 외국인이 오면 부담스럽다. 물론 바디 랭귀지로 다 소화를 해내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다. 언젠가 해외에 나갔을 때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많이 경험했다. 물건을 사는 것이나 길을 묻는 것 등이 아닌 사람이 사는 것에 관한 대화를 하고 싶었던 나는 그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일상사에 대해 듣고 싶었고, 그들의 언어로 나의 느낌을 이야기하며 교감을 나눠보고 싶었던 나는 (나에게는 어렵기만 한)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다. 그래도 80% 정도에서 늘 만족하는 게으른 성향 때문에 언어 구사를 못함으로 생기는 많은 아쉬움을 그냥 묻어두었다. 이번의 시도 역시 그럴 수도 있다, 라는 생각도 하지만, 실패는 두렵지 않다! 아자아자! 란 생각으로 재도전을 시작했다. 방식은 선생님에게 배웠던 방식 그대로. 계속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복기하고, 반복해서 상상하고, 반복해서 이해하다보니 조금은 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외국 말이 걸러져 우리 말로 번역되어 들리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의 느낌 그대로 단어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고나니 기존에 알았던 외국어 단어까지 새삼스럽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 이게 이런 느낌이었어? 애플이 사과로 번역되지 않고, 애플 그 느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시'를 이해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그 무엇에 대해 손으로 만지듯 느껴지는 그 감각 말이다.

 

한동안 '시'를 들춰보지 않았는데 이제 잃어버린 그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낙원에서 쫓겨난 듯 그 감각이 이제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먼길을 둘러서 그 감각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배운 것 같다. 공부에서 외국어로, 그리고 '시'로 넘어가는 길이 제법 반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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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1-3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달사르 2014-01-31 10: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떡국 맛있게 드셨습니까. ^^
설날 아침 출근길에 걷는데 날이 참 포근합니다. 벌써 봄 날씨 같애요. 놀러가기 좋은 날이에요.
명절에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식구들과 오붓한 시간 보내시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31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 시가 좋아지는 시기가 오더군요. 원래는 사춘기 때 와야 하는데 저는 늙어서 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달사르 2014-01-31 10:12   좋아요 0 | URL
저두요. ㅎㅎ
시는 젊은 시절에 읽는 거라고 하던데 말이죠. 주위에 문학 청년들이 여럿 있었는데 저는 그네들을 무슨 신기한 동물처럼 봤었죠. 남자가 시를 다 읽어. 신기해. 이러면서요. ㅋㅋ
늙어서라도 시가 이해되고 좋아지니 것두 좋네요. 저는 시라는 존재와는 상관없는, 그러니까 감성이 아주 무딘 사람인 줄 알았더니 조금은 감성이 있었나부다. ㅋㅋ 그러면서요.
곰발님 시 읽어내시는 능력엔 매번 감탄합니다. 최근의 그 '바닥'이란 시..그새 작가 이름 까먹음..ㅠ.ㅠ..(저질 암기력..ㅠ.ㅠ) 시도 좋고 해석도 참 좋아요. 퇴근길에 바닥을 보면서 걸어봐야겠어요. 하하하.

프레이야 2014-02-0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우는 건 싫어라하지만 그냥 외줘지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달사르님 오랜만, 반가워요. ^^

달사르 2014-02-02 13:38   좋아요 0 | URL
그지요. 외우는 거 힘들어요.
외우는 걸 잘 못해서 그런지 겨우겨우 외워놓은 게 나중까지 기억나면 그게 또 뿌듯하고 그런 건 있긴 해요.ㅎㅎ 프레이야 님, 저도 반가워요. 요새도 이쁜 목소리 계속 쓰시고 계시나요? ^^

레와 2014-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국어에 대한 잃어버린 감각이 돌아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좋아하던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애증으로 바뀌고 증오까지 넘어가버린 건 아닌지..
달사르님 글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랬죠. 그랬죠.

참, 안녕하세요! 저는 레와라고 합니다. ^^

달사르 2014-02-04 22: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레와님.
맞지여. 애정이 종종 애증으로, 그리고 증오로 바뀌기도 하지요.
외국어에 대한 감각이 애정하는 마음 만큼 쑥쑥 늘면 참 좋을텐데 이노무 외국어는 해도해도 안 느니 말에요.

해서, 요새는 뭐 걍 먼거리 연애하는 사람을 대하는 심정으루다 (잉?)
옆에 있으면 잘해주고, 옆에 없으면 바로 잊어버리고, 뭐 그렇게 말이죠.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하나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도 꽤 버겁단 말이죠. 쩝.

걍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말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