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불을 끄고 자려고 누으려는 순간, 침묵하던 세계가 기지개를 편다. 불을 환하게 켜고 있던 순간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던 지나가는 차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 건물 밖에 내어놓은 에어컨 실외기 소리, 개가 컹컹 짓는 소리, 황소 개구리의 육중한 울음 소리, 나뭇잎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그리고 온갖 작은 것들이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소리.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순간 들리기 시작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들을 느낀다. 따뜻한 소리, 차가운 소리, 공기를 잔뜩 머금은 소리, 속까지 시원해지는 소리를 구분하다가 스르르 눈이 감기면, 소리들은 내 귓가를 떠나 조용히 창문가에 머문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은 소리를 느낄 수는 있을까. 귀로 전해지는 파장이 귀에 있는 어떤 기관을 자극해서 소리를 만들어낼텐데, '농'에게도 그 파장이 조금은 전달되지 않을까. 하루의 일과를 마감하는 휴식의 시간에 듣는 밤의 소리가 익숙한 나에게 낮이고 밤이고 침묵의 세계에 사는 그들의 존재는 낯설다. 이 낯설음은 어떻게 익숙함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아'가 '농'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농'이고 한 명은 '아'다. 둘은 불알친구였고, '아'는 '농'을 늘 자신의 방식으로 챙겨줬다. '아'는 '농'에게 계속 이런저런 말을 했고, '농'은 '아'가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40년이 흘러 둘은 50대가 되었다. 어느날 둘은 수화통역사를 만났고 '아'는 통역사에게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이 친구는 제가 하는 말을 죄다 알아들어요.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왔어요. 그렇지 친구야."  '농'은 '아'에게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번 만남에서 통역사는 '농'만을 따로 만났고, 수화로 질문을 했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농'이 수화를 답을 했다. "무슨 말을 해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요. 나는 그 친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가족간에도 이런 일은 생긴다. '농'이 있는 가족 중에 '아'가 따로 수화를 배우지 않으면서도 '농'을 향해 계속 말을 하면 '농'이 알아듣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는 참 착해. 늘 웃고, 늘 말을 잘 알아듣고. 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통역사가 들어가면 여지없이 '농'의 수화는 달라진다. "예? 아니요. 제가 그들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요. 그냥 못 알아들으니까 웃기만 하는 거지요."  물론 손가락으로 뭘 하라고 가르키거나 하는 등의 대화가 필요 없는 식의 행동까지 못 알아듣지는 않을 것이다. 통역사가 말하는 건, 그런 일을 지시하는 거라던가 하는 것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가 가능한가, 이다. '아'가 '농'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를 하려면 손짓이나 몸짓, 눈빛 등의 자연수화로는 한계가 있고, 표준수화를 배워야 가능할 것 같다. 그랬을 때, '농'의 갑갑함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아'의 세상은 좀더 넓어질 것이다.

 

 

 

우리 나라의 농아 학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하다고 들었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농아학교의 교장실을 점거한 '농'의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 '농'의 주장은 단 하나였다. "수화를 할 줄 아는 선생님에게서 수업을 듣게 해달라. 우리도 공부를 하고 싶다." 그 농아학교는 특수학교 일진대 수화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은 한 분도 안 계셨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어야했다. 즉 구화를 배우라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농'이 어느정도는 귀가 들려야 한다. '농'이라고 모두 소리가 전혀 안 들리는 것은 아니고 소리가 아주 약하게라도 들리는 '농'도 있다. 이런 '농'은 귀에 보청기를 꽂으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나 크고도 공평하게 들려 연습이 되지 않은 사람은 보청기를 꽂고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소리에 파묻혀 정작 들어야 될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평상시에 우리 귀에 들리지 않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모두 똑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그중에 사람의 음성을 어떻게 구분하겠나. 두 사람이 양쪽 방향에서 동시에 나를 향해 대화를 건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가 먼저 약을 가져 가려는 조급함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이럴 때 나는 두 사람의 소리를 모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한 사람씩 이야기해세요, 라며 말을 다시 부탁하게 된다. 두 사람이 말을 해도 듣는 이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평소에 신경쓰지 않던 사물들의 소리가 모두 같은 강도로 이쪽저쪽에서 들린다면 소리를 듣기는 커녕,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럼 우리 '아'는 왜 사람의 소리를 잘 듣는 걸까. 그건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계속 그런 상황에 학습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퍼지는 많고 많은 소리 중, 필요한 소리, 사람의 소리를 골라서 듣는 능력이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밤에 불을 껐을 때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세상의 소음들이다. '농'은 그래서 소리가 겨우 들리는 사람의 경우도 보청기를 끼고서 사람의 말을 구분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의 목소리, 입 모양을 보며 자신도 조금씩 소리를 흉내내어 말을 배우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농'인 부부가 아이를 낳았고, '아'였다. 이들은 너무나 행복해했지만 이 시간은 잠시였고, '아'는 불완전한 귀를 가지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아이가 농아학교에 가서 제대로 수업만 배운다면, 아니 보청기만 제대로 낄 수만 있어도 아이는 정상인 처럼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엄마는 용납할 수 없었고, 집에 보청기가 보이는 족족 던지고 발로 밟아서 고장을 내버렸다. 우리 아이는 정상인데 이런 보청기가 대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결국 엄마의 고집 때문에 아이는 집에서는 보청기를 끼지 못하고, 학교에서 수업하는 잠시 동안만 겨우 보청기를 끼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보청기를 끼면서 들리는 많은 소리들 중 사람 말소리를 골라서 듣는 연습을 지난하게 해야만 제대로 정상인이 될 수 있었기에 아이는 결국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예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나아졌다지만 지금도 농아학교는 상황이 열악하다. 교사 중 수화가 가능한 사람이 2명인 곳도 있는데 그곳이 환경이 그나마 좋은 곳이다. 어떤 곳은 맹인 선생님이 수업을 하기도 하는데 그냥 등 돌리고 칠판 보고 수업 하시면 학생들은 선생님 입 모양도 못 보고 소리도 못 들으면서 그 시간을 통째로 견뎌내기도 한다. 그럼 수화는 어디서 배우는 걸까. 수화는 친구들에게서 배운다. 수화를 할 줄 아는 친구나 선배에게 배우고, 그 수화가 다시 후배에게 물려지는 식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수화 수업 첫 시간에 들은 나는 이 사실이 빨리 다른 사실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란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아이들이 귀에 보청기를 낀 상태에서 선생님이 구화를 차근차근 시범을 보여, 아이들이 우선 구화를 듣게 하고, 또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에 시간 할애를 많이 해주는 것.

선생님이 수화 자격증이 있는 분으로 한정해 농아 학교의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것.

수화를 배우는 '아'가 많아져 '농'이 은행 볼 일 볼 때, 병원 갈 때, 약국 갈 때 등 일상적인 볼 일을 볼 때 수화로써 대화 가능한 곳이 늘어나는 것.

 

 

추가.

제가 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지적해 주세요. 이제 알아가는 중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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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9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어쩌면 국가라는 기관'이 이런 기초적인 복지 시스템을 갖추지 않고서 국가의 품격 운운할까요. 암담하네요.
이러고도 과연 정치가들이 복지병 운운하는 게 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가난하다는 네팔이나 쿠바 보십시요. 1인당 쥐디피 한국에 비하면 콩알만하지만 복지 수준은 우리보다 100배 더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 교육 정책만큼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봄만 되면 보도블록 깔고
한강에 세빗둥둥섬 만드는 돈이면 충분하잖습니까... 참.. 어이가 없습니다.

달사르 2014-03-09 18:39   좋아요 0 | URL
이게 다 친일파를 제 때 청산하지 못해서..쿨럭..ㅠ.ㅠ

저는 정치나 경제를 잘 모르지만, 정치 혐오나 경제 혐오로 가지 않으려 노력을 해요. 원래 선거 때 투표를 잘 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투표도 잘 하고 말이죠. 정치가나 경제인의 최대 목표가 국민들의 무관심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복지도 뭐.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잘하려고 하다가 몇 년 지나면 흐지부지 되잖아요. 아이들 급식비 지원도 올해 죄다 짤렸던데요. 노인들 용돈 주는 것도 몇 년 내로 흐지부지 될 테고.
반면에 애초부터 조용한 사람들, 선거철 때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선심을 굳이 쓸 필요가 없으니 그들을 위한 복리후생은 계속 뒤로 뒤로, 언제까지나 뒤로 뒤로 밀리는 거지요.

그래서인지 네팔이나 쿠바가 가난하다는 생각도 요새는 들지도 않을 정도에요. 그들은 우리보다 정신건강부터 시작해서 만족도, 행복감 등 많은 것들이 부자지요.

2014-07-11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8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20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