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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에도 비가 내렸지만 오늘 비가 또 내린다. 비가 자꾸자꾸 내렸으면 좋겠다. 출근길에 비가 왕창 내렸다. 약국 문을 열자마자 종이박스를 입구에 깔았다.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비오는 날엔 종이박스가 요긴하다. 엊저녁에 종이박스를 전부 내다놓지 않고 하나 남겨놨는데 선견지명이다.

 

'비오는 날은 우산장수, 양산장수(?) 이야기처럼 약국가는 한산하다.' 가 정설이다. 그러나 모든 정설엔 예외가 있듯이 오늘은 예외의 날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쁘기 시작해서 겨울이 다시 왔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조제실에서 약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님 두 분이 들어오셨고 나는 계속 약을 지었다. 수시로 들어오는 손님을 위해 귀는 늘 열어둔 채로 있었는데 조제 중에 이런 대화가 들렸다. "당굴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나요?" "아..당굴..요?  글쎄요..어디로 가야할까요..버스를 타고 가시나요? 버스 정류장은 말이죠. 저쪽 길로 주욱 올라가셔서는요.." 지나가는 할머니가 담배를 피기 위해 약국 앞에 서 있는 아들에게 길을 묻는 눈치다. 그러나 뭔가 해결이 잘 되지 않았는지 약을 지어 나와 보니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난처한 표정으로 서 계신다. 다른 여자분도 한 분 계셨는데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할아버지와 아들이 약을 받아서 간 뒤에도 다른 여자분은 계속 생각을 하셨고, 뭔가를 중얼거리신다. "손님, 뭐라구요?" "아. 네..아까 할머니가 얼핏 아주라고 이야기해서요. 아주는 당굴의 작은 마을 이름이거든요. 아주를 가려면 버스를 어디서 타야 될까.."

 

아. 이 사람들, 왜이렇게 착하지. 나는 순간 귀찮다는 생각을 했는데..반성의 의미로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본다.

 

"할머니, 지금 여기는 왜 오셨어요?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집에 가실거에요?"

"으응. 병원 댕겨왔지. 봐, 여기. 약도 탔는걸?  집에는 지금 안 가고 지금은 딸네 집에 갈거야. 근데 딸네 집이 어딘지는 몰라."

할머니가 보자기에서 주섬주섬 꺼낸 약봉투는 인근 약국 것이었다. 그 약국에서 제대로 묻지 못하고 길을 나선게다. 그 약국에 도로 할머니를 보내고픈 마음이 살짝( ") 들었지만 착한 주위사람들에 동화된 나는 직원과 다른 여자분과 의논을 계속 한다. 이때, 센스쟁이 직원이 아이디어를 낸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봅시다. 이제는 할머니 이름을 아니깐 병원에 전화를 걸어보자구요."

평소에 환자들이 약을 놔두고 가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환자 연락처가 필요한 경우 병원에 전화를 건다. 병원은 환자의 연락처를 무조건 기입하기에 우리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할머니의 경우, 본인의 연락처가 있을지 보호자의 연락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화해보기로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걸었다. 마침 친절한 원무과 직원이 받는다.

"아.. 그 할머니요. 그 할머니 약간 오락가락하시는데..잠깐만요. 연락처가..따님 연락처네요."

 

친절한 원무과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알려준 연락처로 우리직원이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약국입니다. 할머니가 저희 약국에서 약을 타신 후 길을 나서는데 지리를 모르시나봐요. 할머니가 따님에게 들렀다 집에 가신다는데 따님댁은 어디신가요?   ...  아..지금 도시병원에 계시다구요? 아..그러시군요. 그러면 할머니는 집은 어떻게..네..네..아..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직원이 할머니를 다독이며 말을 한다.

"할머니~ 따님은 지금 잠시 어디 다른데 볼 일이 있다나봐요. 오늘은 할머니가 그냥 집에 가시구요. 따님과는 내일 보기로 했지요? 따님이 택시를 보내준다고 하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렸다가 택시 오면 타고 가셔요~"

약을 탄 약국 말고 엉뚱한데서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피하고 딸의 걱정을 최소화시키려는 직원의 센스있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나저나 딸이 병원에 있다니. 어디가 아픈걸까.

 

약국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가 양손으로 꼬옥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는 야채와 작은 호박 두 덩이가 있었다. 오늘 딸내미 만나면 건네려고 담아온 호박은 참으로 예뻤다. 손자까지 두고서도 여전히 딸내미를 챙기는 할머니 얼굴을 오래도록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머니의 쭈글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려니 택시가 왔다. 택시 아저씨는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따님이 오늘 마침 볼일이 있으셨나봐요. 하하하. 제가 할머니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흰머리 할머니와 흰머리 택시 아저씨는 내리는 비속을 그렇게 떠났다. 누군가의 소망, 누군가의 마음을 담은 비가 계속 내린다. 비는 할머니의 호박밭에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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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7-05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의 호박밭에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네요 :)
비가 오면 꿀꿀하고 우울한데, 이 글을 읽으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오늘이네요.

달사르 2012-07-06 10:24   좋아요 0 | URL
오늘도 계속 비가 내리지여?
비가 오면 우울한건 어쩜 20대의 특권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좀더 깊이 슬퍼하고 좀더 많이 기뻐하는 그런 것들 말에요. ㅎㅎ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없는수다쟁이님은 비오면 괜히 물웅덩이 찾아서 여기저기서 첨벙거리고 다니고 막 그러지 않는가요? 아...제가 괜히 그래보고 싶어지네요. ^^

할머니의 호박밭에 단비가 내리면 호박이 더 맛있어질거 같아요!

다락방 2012-07-0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갑자기 알라딘에 좋은 페이퍼들이 우르르 올라와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게다가 이 페이퍼는 뭉클 하기까지 하네요. 제가 이래서 달사르님의 약국이야기 기다린다니깐요. 나중에 이거 다 모아서 [올리브 키터리지]같은 책 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약국 에세이라든가.

달사르 2012-07-06 12:09   좋아요 0 | URL
아기자기 알라딘마을이 된 거 같애요. 힛.

앗. 헤헤. <올리브 키터리지>는 책을 읽을 때나 안 읽을 때나,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게 하는 그 뭔가가 있는 거 같애요. 그런 감수성 있는 무언가가 내 속에도 생기게 해주세요~ 라고 종종 빌곤 한답니다. 헨리도 좋지만 저는 부인인 올리브의 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볼 때 정말 따뜻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다락방님과 제가 좋아하는 책이 겹치는게 <올리브 키터리지>여서 참 좋아요. ^^
다락방님의 말씀에 힘입어(!) 약국일기 종종 올려볼께요.

프레이야 2012-07-0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약국 이야기, 시리즈로 모아보세요. 몽글몽글해져요, 마음이요.
비는 할머니의 호박밭에도 내릴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첫 장 '약국'도 생각나구요.ㅎㅎ
오늘 여긴 아침에 시원하게 비 퍼붓더니 오후엔 말짱하니 개었어요.

달사르 2012-07-06 12:19   좋아요 0 | URL
네. 프레이야님 ^^ 약국일기 종종 올릴께요. 어떤 일 때문에 한동안 의기소침해서 일기 쓰다 말았는데요. 최근의 또다른 어떤 일 덕분에 다시 올려볼까해요. 일기를 쓰다보면 내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내가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보는지, 또 사람들은 나와 어떻게 다른지, 가 조금씩 드러나는 거 같애요.
올리브 키터리지의 첫 장, 너무 좋지여? 담에 프레이야님의 목소리가 담긴 올리브 키터리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어요. 저녁에 퇴근 후 틀어놓는 음악처럼, 음성으로 된 올리브를, 헨리를, 사람들을, 만나고 싶거든요. ^^

맞지여? 어제 오후 되니 말짱해졌어요. 근데 오늘 또 퍼붓네요. 대기 중으로 퍼지는 비 냄새. 참 좋아요.

자목련 2012-07-05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서 '비가 자꾸자꾸 내렸으면 좋겠다'란 문장이 좋아서, 얼른 왔는데.
언제나 그렇듯 달사르님의 페이퍼는 왜 이리 포근하고 달콤할까요.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좋아요.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비가 계속 내리면 좋겠어요. 전, 비오는 게 정말 좋아요..

달사르 2012-07-06 13:0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이 제 글을 되게 좋아하는 느낌을 종종 받아요. 헤헤헤헤헤.
저는 '되게'라는 표현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한때 친했던 동생 녀석이 '되게'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요. 서울놈 입에서 나오는 '되게'는 시골촌년의 억센 사투리와 달리 참 정겹더라구요. 박완서를 좋아하는 아이였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되게'라는 말을 들으면 박완서의 그 포근하고 달콤한 눈빛과 웃음이 연상되어요. 오늘은 자목련님의 포근하고 달콤하다는 표현에서 반대로 '되게'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

앗. 저도 자목련님(이랑 자목련님 글이랑) 되게 좋아합니다. 하하하. 참, 저도 비오는 거 정말 좋아요.

라로 2012-07-05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서나 약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는데 공부를 못했어서~~~.ㅋ 흐흐흐
좋은 직원분을 두신 것 같아요~~~. 함께 일하는 사람 좋은 사람 두신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달사르 2012-07-06 13:1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뤼야켈레벡님.
나비님이라고도 사람들이 부르던데요. 저는 뤼야켈레벡님이라고 부를께요. 이니셜을 그렇게 과감히 바꾸시는 모습이 저에겐 보기 좋았어요. 이름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은 다 허상이다! 라거나 아니면 새로운 내가 되고 싶어! 라거나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라거나 또는 기타의 여러 다른 이유들로!
그래서 왠지 멋지게 사실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답니다. ^^

ㅎㅎㅎㅎ 저도 사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요근래 한답니다. 실지로 제 친구 하나가 사서인데요. 직업을 일년간 서로 바꾸는 방법이 없을까..한동안 고심을 했답니다.^^
넵! 직원이 좋아서 막 어디가서 자랑하고 다닌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지내요~ 이럼서요. 한번 힘들게 교체를 하고난 뒤여서 좋은 사람과 같이 있는 복에 대해 저도 감탄을 하고 있어요.

탄하 2012-07-0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께서 따님을 만나셨다면 왠지 호박으로 수제비를 끓여주셨을 것만 같아요.
오늘처럼 비오는 날 어울리는 메뉴! 헤헤, 아마도 제가 수제비를 먹고 싶은 탓이겠죠?^^

시원~~하게 내리는 오늘의 비와 정말 잘 어울리는 정다운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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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비가 와서 그런지 인터넷 접속이...ㅠ.ㅠ
댓글저장이 안돼 몇 번 눌렀더니 그만 같은 댓글이 5개씩이나 올라갔어요.
컴터는 안 돌아 가는데 우격다짐으로 지우느라 땀이 삐질~^^;

달사르 2012-07-06 13:19   좋아요 0 | URL
하하. 분홍신님이 수제비를 좋아하시는군요!
비오는 날엔 수제비가 좋지요. 수제비 먹고 비오는 강가에 나가서 물수제비를 뜨면 왠지 몇 배로 잘 할 거 같애요. 분홍신님은 물수제비도 잘 뜨시나요? ^^

앗. 5개씩이나! 못봤네요, 못봤어. 5개 다 놔두셨으면 제각각의 답글을 5개 다 달았을텐데요. 히.
담에는 힘들게 지우지 말고 걍 냅둬요. 제가 힘닿는데로 답글을 죄다 다르게 달아볼께요. 헥헥.

그나저나, <초원..>은 진척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림을 좀 그려서 복사를 해야는데, 아침에 출근길에 매번 비가 내려서 몇일째 복사를 못하고 있어요. 비가 좀 그치면 조금씩 포스팅을 할까 합니닷.

transient-guest 2012-07-0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예쁜 영화속의 한 장면 같네요. 장마는 싫지만, 실내에서 비오는 바깥을 감상하는 운치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장마기간에 한국에 가본게 2004년이 마지막이네요. 아름다운 하루가 되셨을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7-06 13:40   좋아요 0 | URL
ㅎㅎ 시골약국이라서 좀더 정취가 있는 거 같애요. 저는 아직도 도시에서 살다온 흔적이 몸에 배여서 귀찮다, 간섭하지 마라, 등이 많은 편인데요. 그런 방어막을 손님들이 여지없이 녹이는 경험을 종종 해요. 계속 도시에 있었으면 아직까지도 모를 그 무엇들.

비오는 날에 실내에서 바깥을 보면 바깥의 나무잎들이 재잘재잘거리는 거 같애요. 그리운 사람이 근처에 있어 같이 차 한 잔 하면서 바깥을 보면 참 좋겠구나, 싶네요. 만약 눈 앞에 없다면 맞은편 빈 자리에 그리운 사람을 마음으로 앉혀놓아도 좋구요.

한국이 멀어서 매년 나오시진 못하지요? 2004년, 그리고 올해. 그 중간에 한 두번? 다음번은 언제 나오시려나~

감은빛 2012-07-1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가끔 팍팍한 도시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배려를 잃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달사르님 글에는 정말 이해심 많고 사려깊은 분들이 계시네요.
할머니의 따님께 전화를 걸었던 직원분은 정말 사려깊은 분이세요.

고맙습니다. 이 이야기 덕분에 저도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달사르 2012-07-14 16:53   좋아요 0 | URL
^^

잘 읽어주셔서 제가 되려 감사합니다.
직원과는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하면서, 사람들 간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기인하나..사람들 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등등에 대해 토론을 많이 합니다. 그런 와중에 나온 행동들이어서 더 좋았던 거 같애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한다는 기본이 깔려 있는 그런 환경 속에서의 행동들 말이지요. 감은빛님 댓글 읽고나니 직원에 대한 뿌듯함이 더 커지는 거 같아 기분이 좋네요. ^^

책읽는나무 2012-07-1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의 약국일기를 읽으면요.저희동네 약국의 풍경을 항상 떠올리면서 읽고 있거든요.
저희동네 약국에 여약사와 여직원이 있어요.처음엔 남자약사분이 계셨었는데 요즘엔 여자약사분이 계속 계시더라구요.
친절하고 예쁜 약사님 덕분에 약국 갈 재미가 있어요.
아마도 내가 더 우리동네 약국에 애착을 갖게 된건 아마도 달사르님 때문이구나~ 오늘 문득 깨달았군요.
그약사님을 달사르님과 동일시하고 있었어요.ㅎㅎ

심신이 힘들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았는데 마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듣게 된다면 병이 절로 나을 것같아요.
병원 간호사가 무뚝뚝하고,의사한테 잔소리 듣고 상한 마음을 전 약국에 가서 좀 달래는 편인데요.
님의 약국은 정말 찾아가고 싶군요.
약국이 어딥니까??^^;;

달사르 2012-07-16 20:54   좋아요 0 | URL
히힛. 기분 좋은 칭찬. ^^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미소 한 번 더, 상냥한 말 한 마디 더, 가 요리의 양념처럼 꼭 필요한 거 같애요.

방금도 손님이 제가 간만에 늦게까지 문 열고 있으니까..아..나는 계속 여기 오고픈데..집이 너무 멀어서 아무래도 다른 약국을....오늘은 지나가는 길에 문이 열려서..아..나는 계속 여기 오고픈데..라고 말씀해주셔서 기분이 참 좋았거든요. 그러면서 또, 감사하기도 했구요.

이렇듯 그냥 슥 스치는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담겨있는 걸 아니까, 저도 좀더 상냥해져야겠다. 좀더 조심해야겠다. 화는 조금만 덜 내야겠다..싶어지네요. 책읽는나무님 말씀 감사해요. ^^
 

늦은 점심을 먹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달력의 빨간 날에는 유독 아픈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평일에 쉴 수 없는 긴장된 몸이 주말에 풀려서일까. 주말에 아픈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애틋한 마음이 생긴다. 덕분에 오늘도 나는 평일보다 바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다.

 

 

여러 명의 손님이 왔다 갔다하는 동안에 약국 한 켠에 한 여자 분이 계속 서 있다.

"어떻게 오셨어요?"

조금 기다리겠단다. 다른 급한 사람들 먼저 약을 줘도 된단다. 감이 온다. 임신 테스트기나 콘돔, 질정, 기타 여성에게 필요한 용품을 원하는 눈치다. 약국의 모든 손님들이 나간 뒤 여자는 매대 앞으로 왔고 쓰던 모자을 벗고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도 뒤로 넘겼다.

"어머. 아시는 분이시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요새 통 안 보이셔서 안 그래도 궁금했더랬어요."

"저기..제가 급히 약이 필요해서 그러는데요...게보린을 좀.."

오랜간 처방전 손님으로 왕래가 있었고 손님의 약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흔쾌히 그러마, 라고 말을 했다.

"게보린이 다섯 통 필요하신 거지요? 그래요. 외상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늘 하는 말이지만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구요. 매번 덜 드시는 연습을 하셔야 되셔요. 자요. 여기 다섯 통."

"저기..제가 실은 이혼..을 해서요..빠른 시일에 갚아드리진..못해서요.."

여자 얼굴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네? 뭐라구요? 어머나. 그런 일이..요 몇 달 안 보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하시던 식당 접은 지가 고작 몇 달 전인데 그런 힘든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럼 지금은 어디 계시는 거에요? 위자료는 받았어요? 아이들은?"

쏟아지는 내 질문이 부담스러웠을텐데도 여자는 다행히 또박또박 대답을 죄다 해주었다.

"입은 옷 그대로 쫓겨나서 방은 근근히 구했어요. 끼던 반지 팔아서 원룸에 지금 살고 있어요. 아이들은..흑..남편이 아이들을 못 만나게 해요.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놨는지 전화를 하면 실실 피하면서 대답도 잘 않구요. 아..글쎄..내가 시어머니에게 욕을 했다면서 이혼을 하라는 거 있지요."

"네? 그럼..약을, 저기 그러니까, 약을 먹은 상태에서 욕을 한 거에요? 아니, 남편이 지금 애기 엄마 상태를 잘 알고 있잖아요. 부인이 좀 아프면 그걸 받아들이면서 같이 살아야지. 그렇게 몸도 약하고 정신도 아픈 상태에서 식당 해서 새끼들 먹여살린다고 그렇게 고생한 거 주위 사람들이 죄다 아는데 고작 욕 한 번 했다고 이혼하재요?"

"흑..나는 욕 한 거 기억도 안 나는데"

"아..그럼 당장 어떻게 살아요. 지금 일 할 형편도 아니시잖요."

"군청에 필요한 서류를 신청해놨어요."
"아..잘 하셨어요. 저기..그..생활보호대상자 신청하고 뭐더라. 암튼, 기타 등등 말이죠?"

"네. 신청해놨으니 담 달 중순이나 되면 연락이 온대요."

"그럼 당장은 뭐 먹고 살아요? 밥은 먹고 있어요?"

"나올 때 그냥 쫓겨나서 옷도 하나도 없고 신발도 슬리퍼 채로 나와버려서 여직 슬리퍼로 지내다가 최근에 부츠 하나 얻었어요."

여자는 입고 있는 츄리닝 옷과 맞지 않는 번쩍이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손은 거칠다 못해 봄 가뭄의 논두렁 마냥 쩍쩍 갈라져 있었다. 나는 급한 김에 우선 약국에 비치된 핸드 로션을 챙겼고, 조제실 뒤로 가서 약 봉투에 얼마간의 지폐를 넣었다.

"당장 이걸로 요기를 좀 하시구요. 게보린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오셔요. 그렇지만, 매번 하는 말이지만, 최대한 덜 드셔야 되요. 한꺼번에 여러 알 드시면 절대 안 되구요. 도저히 머리가 아파서 안 되겠다 싶을 때 그 때만 드셔야 되셔요."

 

 

여자는 울다가 갔다. 체질적으로 신경이 많이 약한 여자는 우리 약국에서 근 3년 간을 신경안정제를 처방 받아서 먹고 있었다. 하루도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데다 가끔씩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엔 몇 주 간 입원도 곧잘 하는지라 남편의 뒷바라지를 비롯해 가족의 이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남편과 같이 식당을 한다고 홍보 팜플렛을 들고 왔었다. 그것도 24 시간 영업하는 김밥나라 같은 식당을 말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배달도 다니고 음식도 만들며 열심인 모습을 보여서 나도 종종 음식을 시켜먹곤 했었다. 식당을 하면서 여자는 안정제 용량을 올렸고 부족한 경우엔 한 봉지를 더 먹기도 했다. 해서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안정제가 모자라게 된 여자는 DUR시스템이 생긴 올 7월 이후에는 안정제를 구할 수 없어 늘 전전긍긍했다. 그 와중에 두통은 여전했고, 게보린 이외의 진통제는 듣지 않는 여자는 게보린을 늘 5통씩 사서 먹었다. 초기에는 게보린을 많이 먹으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통 이상은 못 준다는 나와 실갱이도 꽤 했지만 내가 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사는 걸 아는지라, 언젠가부터 차라리 5통을 주면서 내가 체크하는 편을 택했다. 대신에 매번 잔소리를 빼먹지 않았는데, 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자는 게보린을 사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문을 닫는다는 말을 전해 주고는 여자는 몇 달 간이나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궁금해하던 차에 나타난 여자는 행복하지 않은 본인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남에게 들키기 싫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줘야만 했을 때, 여자는 얼마나 갈등이 심했을까. 그 마음고생을 생각하니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본인에게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남 앞에서 눈물 콧물 보이며 질질 짜고, 본인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그 모든 과정을 여자는 넘어선 것이다. 삶에 대한, 생명에 대한 욕구가 이기게 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여자의 그 용기가 보기 좋았다.

 

 

"때르릉"

여자 전화다.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여자는 말을 주춤거리며 이어간다.

"제가 아까는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요. 정말이지 흑..주신 돈은 제가 빨리 정신 차려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꼬옥 갚아드릴게요."

"당장은 몸이 건강해지는 것부터 신경쓰시구요. 그래야 나중에 아이들도 다시 만나고 그러지요. 법에 호소하면 아이들을 만나는 방법이 생길 수도 있으니 빨리 나아야겠다, 그 부분만 신경 쓰셔요. 게보린은 정말 줄이시구요. 아셨죠? 가끔 약국에 놀러 오시구요. 게보린 필요할 때 말고 이야기 들어줄 사람 필요할 때도 들르시구요. 그리고, 밥부터 먼저 챙겨드시구요. "

한층 밝아진 여자 목소리를 뒤로 하며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다. 내가 그녀에게 하루 산타가 되었으면 좋겠다. 힘들었던 숱한 시간들 속에서 나에게 하루 산타가 되어준 또다른 그들처럼. 늦은 저녁 퇴근하기 직전, 가게를 살며시 나와 멀리서 가게를 들여다본다. 내 가게 불빛이 누군가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는 불빛이기를, 마음 속으로 작게 빌어본다. 까만 밤이어서 불빛은 더 환하다. 여자의 까만 밤 같은 마음 속에 불빛의 씨앗 역시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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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2-26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자분에게 달사르님은 어제 어떤 분이었을까요? 무슨 표현이 적당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만 말합니다.
요즘에도 자기 부인을 그냥 내쫓기도 하는지, 빈 손으로 쫓겨나기도 하는지, 자기 아이까지 두고요. 감정적인 저는 화부터 막 나는데, 같이 화내는건 아무 도움도 안되겠지요.
게보린이 아닌 다른 어떤 결심이 꼭 필요할텐데요 그 여자분이요...

달사르님, 오랜만이지요. 반가와요 ^^

달사르 2011-12-26 14:08   좋아요 0 | URL
히. hnine님. 저도 반가와요. 간만에 부끄럽게 글 한 편 올렸는데 이렇게 반겨주셔서 기분도 우쭐하구요. 헤헤.

네. 아무래도 저는 여자분의 약력이 더 걱정되는지라 다른 쪽에 신경이 덜 쓰였나봐요. 처방받은 약을 미리 다 먹어버려서 몇 일을 약을 못 먹어 손도 떨리고 정신도 불안해보여서 그게 더 신경쓰였거든요. 다음에 오면 또 조곤조곤 물어봐서 변화된 상황이며 등을 알아봐야겠어요. 참, 이혼 와중에 시아버님이 병원에서 별세하셨다는데 그것도 여자 때문이라면서, 남편이 여자에게 원한어린 말을 했다나봐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남 탓 하기가 쉬우니 심신이 미약한 부인의 탓으로 돌리나봐요. 그치만 또..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저 앞으로 여자분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쪽만 생각하려구요. 가정사에 이러저러한 구구절절한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구요.

다락방 2011-12-2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의 오랜만의 페이퍼는 산타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네요. 물론, 그 여자분의 삶을 읽노라니 안타깝지만, 제가 만약 달사르님의 약국에 약사로 있었다한들, 달사르님처럼 그분을 살갑게 대해줄 수 있었을까요? 전 아마 모르척 하거나 애써 무관심하려 했을 것 같아요. 달사르님은 그분께 산타보다 더한 존재인 것 같은데요.

그 여자분도 여자분이지만 저도 달사르님께 감사하고 싶어지네요. 이런 페이퍼를 읽노라니 말이지요.

달사르 2011-12-26 20:07   좋아요 0 | URL
쉬는 동안 다락방님 생각 많이 했어요. 헤. ^^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미지의 물질이 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락방님이 어떤 행동을 취했더라도 그 여자분은 다락방님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거에요. 그리고 그게 그 사람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는 거구요. 마음이 통한다는 건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

히힛. 이제 자주자주 알라딘에, 그리고 다락방님께 들를께요.

2011-12-26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6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1-12-2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일만에 새 글을 올리셨네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글을 올리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달사르님이 그분에게 `하루 산타`가 된 게 아니라
앞으로의 긴 시간의 삶의 산타가 되신 것 같아요. ㅋ

참, 세상일이란 이상하죠? 한쪽에선 은퇴남편 증후군 때문에 아내들이 남편들을 구박을 하고 있는데,
한쪽에선 이렇게 아내가 남편한테 쫓겨나고... 한 세계의 두 현상이랄까요.
어쨌든 그 여자분, 삶의 용기 잃지 마시고 꿋꿋하게 살아가시길 맘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달사르 2011-12-29 19:12   좋아요 0 | URL
아. 멋진 표현이에요. 한 세계의 두 현상! 21세기라는 공간적 세계에도 다른 세기의 현상은 겹치게 마련인가봐요. 요새 뉴스들을 봐도 21세기 같지 않은 일들이 왕왕 보이니까요. 여자분은 그 후로 약을 타 가시곤 아직 들르지 않고 있어요. 담에는 좀더 화사한 얼굴을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펙 님의 응원이 여자 분께 닿아서 희망 하나가 보태졌으면 합니다. ^^

음..세상의 일은 돌고 도나봐요. ^^ 산타도 돌고 돌아서 그 여자분이 또 누군가의 산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2-3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산타는 미인이 많던데 달사르 님이 산타가 되었군요.내용도 좋고 문장도 간결합니다.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모범사례로 보여줘도 되겠군요.

달사르 2012-01-02 16:09   좋아요 0 | URL
앗. 고마운 칭찬입니닷. 다음에 여건 되면 문예창작과 수업을 좀 듣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어서 더 기분 좋은데요? 하하하.

차좋아 2011-12-3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약국 우리 집앞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달사르님 하는 슈퍼도 좋을 거 같아요 가게가 무엇이든 주인이 달사르님 같은 분이라면요^^(외상 때문은 아니에요~ㅋ)

달사르 2012-01-02 16: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약국을 이고지고 이사를 갈까요? ㅎㅎㅎㅎ (외상이야 뭐 언제라도! 차좋아님 에게는 말이죠. 하하)

2012-01-01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2-01-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이 글을 읽었어요. 달사르님이 그분에게 진정 산타 클로스가 되어주셨네요. 그분의 용기를 보아주신 점도 참으로 따뜻해요. 울적했던 아침이 개이는 기분이에요.^^

달사르 2012-02-05 23:11   좋아요 0 | URL
으으윽. 간만에 블럭 들어오니 글이 저장도 안되어 막막 튕기네요.ㅠ.ㅠ 걍 올리지말까 하다가 인터넷과 씨름해서 겨우겨우 새 포스팅 하나 올립니닷.

마노아님 그간 잘 계셨어요? ^^ 메인 사진이 바뀌었군요!!
아.. 위 여자분과는 그 뒤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하아..일단 한숨부터..내쉬고..다음에 조곤조곤. ^^ (누군가의 산타 클로스가 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구요. 그리고, 뭐든..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 라는 생각도 같이요. ^^ )
 

늦게 집에 들어가다보니 포스팅이 자꾸 밀린다. 목요일 포스팅은 금요일에 적고, 금요일 포스팅은 일요일 짬짬이 적고, 이제 퇴근해서 일요일 포스팅을 적는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의 또랑또랑하고 높은 음성이 반기며 고개 숙여하는 인사를 받으니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으신 눈치다. 나이 든 약사의 동태같은 눈과 조용하게 아래로 쫙 깔아내린 목소리로만 인사를 받다가 저리도 상큼한 인사를 받으니, 손님들의 대응 또한 즉각적으로 달라진다. "아이구야, 엄마 일 도와주나보지?" "일요일에 놀지도 않고 일 도우는거야?" "용돈 두둑히 받아야겠는데?"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를 다 다루니까 처방전 입력도 곧잘 하는군. 저기 카드 계산도 할 줄 아는 것 좀 봐"  조카는 다른 말은 대꾸를 않고 '엄마'라는 용어는 꼭 '이모'라고 수정을 해준다. 이모 혼사길 막히는 걸 방지하려는 조카의 자상한 배려랄까.

오늘은 일요일. 아침부터 조카와 같이 출근했다. 2주 전 추석 날 아침에도 조카가 같이 나와주었다. 명절을 쇠러 가거나 주말에 쉬는 직원으로 인해 명절이나 일요일이면 파김치가 되는 이모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과감히 내어준거다. 올 봄까지만 해도 큰조카가 보조일을 해주었다. 3년을 도와주던 큰조카는 중 3이 되면서  더이상 시간을 빼기 힘들어했고, 초딩6학년이지만 3년 전부터 약국 일을 돕고 싶어했던 작은조카 녀석이 바톤터치를 했다. 선천적으로 타인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성향인데다 이모의 일에는 뭐든 마다않고 나서서 도와주고파 하는 기특한 녀석인지라 그동안은 겨우 허락맡은 게 폐문시 쎄콤을 켜는 일 정도였다. 그 일도 신명이 나서 하는 걸 보노라면 웃음이 피식 나오곤 했다. 하도 약국 일을 돕겠다고 하길래 키가 150 이 넘으면 사람들이 아이로 취급하지 않을테니 허락해주마, 라고 말을 했더니 조카는 수시로 키를 쟀고 우유를 대놓고 먹었다. 조카는 지금도 키가 150 이 되지 않는다. 한 2센치 정도가 모자란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큰소리로 인사하는 조카를 보면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기특해한다. 큰소리의 인사를 받는 것도 좋으시지만 어른의 일을 돕는 아이를 보는 것도 뿌듯하신 눈치다. 우리 어릴 때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일을 도왔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에 올인해서 학원순례를 하는데 나에겐 못마땅한 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놀거나 아니면 어른의 일을 도와가면서 사회를 조금씩 경험하는 게 좋은데 말이다. 언니와 나는 조카들에게 어른의 일을 도우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을 거친 큰조카는 우리의 의도대로 돈 벌기의 힘겨움을 경험했고, 돈을 절약하는 구두쇠가 되었으며, 사람들과의 대화법을 익혔으며, 무엇보다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작은조카도 그 과정을 겪으면서 누나의 뒤를 밟아서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의 인사가 제일 반가운 사람은 미장원 언니다. 조카가 다니는 단골 미장원 언니는 아이의 인사를 받자마자 나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이모가 보고 배워야겠네. 가게엔 자고로 이렇게 조카처럼 반기는 맛이 있어야지. 손님이 오든지 말든지 대충 하는 인사라니, 그게 뭐야. 이모가 조카 보고 배워! 손님이 오면 앞으로 조카처럼 생긋거리며 웃고 큰소리로 인사해. 알았어?"  "에이. 언니두. 언니두 가게 해서 잘 알면서. 하루종일 손님들 상대하다보면 우리도 지친단 말이지. 아는 안면에 그런 건 좀 봐주고 해야지. 아잉. 언니" 추석 때 들었던 미장원 언니의 뼈있는 잔소리다. 

오늘은 곰곰이 들어오는 손님들을 지켜보니 무표정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손님들이 조카의 인사를 받자마자 80%는 화색이 바뀔 정도로 활짝 웃으신다. 심지어 한 분은 "약국에 꼬마약사님이 계시네?" 하고 웃으시더니 계산을 하는 조카에게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끝까지 예우를 대해주었다. 아파서 찡그리며 들어오시던 한 분도 조카의 인사에 잠시 활짝 웃더니 다시 아픈지 다시 찡그리는 일을 계속하셨다. 내가 그동안 인사했을 때 손님들이 저리 웃던 적이 있었나? 고개가 모로 저어졌다. 새삼 인사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좀 어색하지만 나도 조카 따라 저렇게 밝게 웃어봐야지, 싶었다. 칙칙하던 약국에 밝은 무지개가 뜬 듯이 인사 하나로 환해지는 느낌이라면 조카의 인사를 얼마든지 따라 배울 일이다. 

저녁 즈음에 만우 아저씨가 들렀다. 언젠가 술 자시고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혼자 자빠져서 무릎을 까여서 내가 치료를 해준 뒤로 나와는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로 편하게 지내는 아저씨다. 아저씨가 무얼 사셨고 조카가 계산을 하는데 개구장이 아저씨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야야. 그 돈을 그리 넣으면 안되지" "네? 그럼 어디 넣어요? " "어허~ 조금씩 삥땅도 치고 그래야지. 조금씩 니 호주머니에다가 넣기도 해" 해맑게 웃으며 장난치는 만우 아저씨의 장난을 이해 못하는 조카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따 마,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건 잘 모른다니까. 나중에 좀더 자라면 그런 것도 하겠지. 이모도 그랬으니까. 그런 거 할 때까지 주말마다 이모 일 도와주면 차암 좋겠구만. 하하하" 

하루종일 큰소리로 명랑하게 인사하던 조카는 저녁 먹고부터는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톤이 낮게 깔린다. 자고나서 목소리가 쉬어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 나처럼 낮아지는 톤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짜식. 봐라 봐. 하루종일 그래 인사하다보면 지친다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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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9-2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국에 꼬마지기님이 아주 당찬걸요. 아파서 오신 분들의 얼굴 표정이 환해지는 이유를 알겠어요. 우리 동네엔 여러 약국이 있는데 병원에서 가장 먼 약국이 가장 바빠요. 약사 분이 젊기도 하지만 항상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거든요. 다른 약국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는데 무뚝뚝해요...ㅜ.ㅜ

달사르 2011-09-25 23:08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어릴 적에는 왜 약국에 가면 약 주는 사람들이 무뚝뚝할까..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알겠더라구요 그만큼 사람 상대를 오래했고 또 매번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해야되니까 좀 지치는 것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도 있고 말이죠. ㅎㅎ 저는 이번에 조카의 모습을 보고 좀 반성! 했어요. 저도 지금보다는 좀더 많이 웃어야겠다, 생각했죠. 에헴. 내가 손님이라면, 마노아님네 동네에 젊은 약사 분처럼 항상 웃는 가게에 저도 가고 싶으니까요. ^^

꼬마요정 2011-09-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월요일 아침부터 밝고 명랑하게 인사드려요~~ 너무 기분 좋은 글입니다. 꼬마약사님의 밝은 목소리가 막 상상이 됩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터줏대감 약국이 있어요. 아저씨가 좀 실없는 농담도 하시고 목소리도 쩌렁쩌렁 하시고 간섭도 하시고 그러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해요. 아픈 사람들에겐 밝고 왁자한 게 득이 되는가 봅니다.^^

달사르 2011-09-26 20: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꼬마요정님이시군요~

저희 꼬맹이 인사처럼 꼬마요정님 인사도 밝고 명랑하시군요. ^^ 터줏대감 약국! 좋은 별명입니다. 아저씨가 터줏대감처럼 동네를 지키고 계시는군요. 터줏대감들이 역할을 잘하고 분위기가 좋은 동네는 왠지 살고 싶어지잖아요. 좋은 동네에 사시는군요. 맞아요. 때로는 밝고 왁자한 틈에 있기만 해도 아픈 게 가시는 느낌도 드니까요.

pjy 2011-09-2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특한 조카에 기회를 주는 멋진 이모! 그럼요, 혼사길이 막히면 안되죠^^;

달사르 2011-09-26 20:21   좋아요 0 | URL
ㅋㄷㅋㄷ 조카의 저 기특함에 보답을 해야는데 말이죠. ^^;

노이에자이트 2011-09-2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놀거나 어른들 일을 돕지 못하게 된 것은 다 그 부모들이 못하게 하기 때문이죠.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하라고 닦달질을 해대니까요.방학 때도 제대로 못쉬고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서너개씩 다니는 학생들...다 부모들이 시키니까 그런 겁니다.사실 지금의 학부모들 거의 상당수는 5공화국 무렵 청소년기를 보내며 학원을 못다니게 하는 정책 덕에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느슨하게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그래놓고도 자기 자식들을 이렇게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달사르 2011-09-26 20:28   좋아요 0 | URL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라. 너는 무조건 공부만 해라..에유..참 슬픈 말 중 하나 같아요. 뭐라고 뭐라고 길게 막 적었다가 걍..말았어요. ㅠ.ㅠ 이 와중에도 자기의 소신대로 공부 이외의 것에 눈 돌리며 자신의 목표를 찾아가는 아이들을 이뻐라 해얄지, 걱정의 눈으로 봐야될지, 친한 지인들의 고민에 이런 것도 있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09-27 17:29   좋아요 0 | URL
길게 적으려던 글의 내용은 부모의 욕심때문에 희생당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될 것 같군요.왠지 기대됩니다.너무 민감한 주제라서 좀 망설여지나요?

달사르 2011-09-27 22:41   좋아요 0 | URL
하하. 작은조카녀석이 라면을 끓였다고 이모 드시러오세요~ 하고 부르네요. 침이 꼴깍.

음...아무래도 그런 내용이 들어가는 듯도 해요. 어쨌든 학생들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 좀더 욕심이 있어서 본인이 하고픈 걸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또 주장하는 그런 색깔이 분명한게 좋겠다, 란 생각은 있어요. 그게 공부하고 배치되면 공부를 좀 덜하더라도 말이죠.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한다. 조금 내리다가 그치는 듯하더니 갑자기 소나기로 변해서는 길 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소나기가 내리길래 약국문을 활짝 열어놨다. 아스팔트에 흥건한 빗물을 가르며 자동차들이 경쾌하게 스쳐 지나간다. 갑자기 여학생 둘이서 손을 잡고 약국을 뛰어들어온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었을까. 깜찍한 반바지에 시원한 티셔츠를 걸쳤는데 옷에 뭐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1회용 밴드 하나 주시구요. 그리고 소독약도..저기, 그런데 돈이..모자라서.." 

한 아이의 손에는 1000원짜리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의 행색이 이상해서 매대 밖으로 나가봤더니 아이들은 빗속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반바지 엉덩이부분이 죄다 젖어있었고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 엉망이었다. 무릎은 깨져서 핏물이랑 흙이랑 엉겨서 줄줄 흐르고 있었고 팔꿈치랑 손바닥에도 군데군데 상처가 보였다. 

"얘들아. 우선 저기 밖에 수돗가에 가서 씻고 보자. 이리 따라와" 

수돗물을 틀더니 아이들이 서로 씻겨준다. 나도 거들어서 아이들 종아리를 씻겨주다보니 멀쩡해보이는 다리에도 흙이 죄다 묻어있어 흙투성이였다. 까진 무릎에 흐르는 물을 갖다대니 시원한지 아이들이 슬며시 웃는다. 어..처방손님이 들어오신다. 두 사람의 약을 짓고 다시 나와보니 아이들이 다 씻고 엉거주춤 서 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많이들 다친거냐고 물었더니 급작스레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뛰다가 넘어졌단다. 에고..둘이서 손 잡고 뛰다가 같이 넘어졌구나..

"자, 여기 수건. 핏물 묻어도 되니 뽀송뽀송하게 다들 닦고, 여기 의자에 앉아. 의자 젖어도 괜찮으니 앉아도 돼." 

외상을 해도 되니 빨리 낫는 메디폼을 할래, 대신 이건 비싼데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있겠니? 라고 물으니 아이들이 난감해한다. 그럼 집에 연고는 있어? 아..있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상처면을 소독할 과산화수소랑, 밴드랑만 사가자. 그래서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임시로 상처를 감싸는거야. 집에 가서는 연고를 바르고 다시 밴드를 붙여. 알았지? 과산화수소를 상처면에 부으니 아이들이 따겁다고 신음을 하면서도 잘 참는다. 그래, 너희들은 용감한 아이들이니 잘 참는구나. 탈지면으로 상처면을 다시 닦아내고 밴드를 붙였다. 절반쯤 붙이다가 생각하니 냉장고에 샘플용으로 놔둔 상처연고가 생각났다. 아! 마침 연고가 있구나. 안되겠다. 연고를 다시 바르자. 붙였던 밴드를 살짝 떼어내니 아이들이 또 신음을 한다. 그래, 잘 참는구나. 연고를 발랐으니 금방 나을거야. 연고 위에 밴드를 다시 붙여줬다.  

"자, 이제 다 했다. 너희는 지금 1000원 있구, 밴드가 대형, 일반형, 두 통을 썼으니 2000원이야. 집에 과산화수소는 있니? 그럼 이건 가져가지 말고 계산도 하지 말자. 총 2000원에 너희가 1000원을 냈으니, 이제 외상은 1000원만 남은거야. 다음에 1000원 갚으러 오면 돼. 알았지? " 

아이들이 아주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간다. 용기있게 약국을 들어설 때와는 달리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나간다. 아이들이 나간 자리를 보니 바닥은 아이들에게서 뚝뚝 떨어진 빗물이 흥건했고, 의자 위에는 물이 섞인 진흙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다음에 외상값을 갚으러올 때 아이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어이, 사이좋고 용감한 아이들, 왔어?" 라고 말을 해줘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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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8-1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에피소드를 흘려보내지 않고 포착하시는 달사르님~ ^^

달사르 2011-08-14 16:00   좋아요 0 | URL
넹. 아이들이 너무 깜찍해서 막 글로 옮기고 싶어지더라구요. hnine님 댓글을 읽으니 제가 왠지 예리한 눈을 가진 것 같애서 뿌듯해집니당~

마노아 2011-08-1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이야기네요. 돈이 모자라도 일단 약국문을 두드릴 용기가 있는 아이들도 대견하고요, 그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달사르님도 참 멋지네요.^^

달사르 2011-08-14 16:02   좋아요 0 | URL
아. 안녕하세요. 마노아님. 최근에 마노아님 블럭을 들렀더랬어요. 볼 것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미처 댓글은 달지 못했나봐요. 먼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요! ^^

그렇지요? 돈이 없어도 약국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은..어릴 때 읽은 사탕가게 아저씨와 아이, 이야기를 연상시켜서 늘 뿌듯해요. 음..그리고, 저를 멋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히.

마노아 2011-08-14 23:26   좋아요 0 | URL
아악, '이해의 선물'이요! 제가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며칠 전에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서 마주치니 넘흐 반가워요.(>_<)

달사르 2011-08-16 15:58   좋아요 0 | URL
이힛. 이 소설의 제목이 '이해의 선물' 이었군요!! 와우~
약국에서는 종종 이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때마다 이 소설을 떠올리면서 나도 저렇게 멋진 아저씨처럼 행동해야지..생각한답니다. 저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까지 혼자 생각하면서 막 뿌듯해하구요. ㅎ
마노아님 덕분에 좋아하던 소설의 제목을 알게 되었네요. 저도 넘흐넘흐 반가워요. ^^ 히힛.

2011-08-14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마비다. 비 오늘 날은 늘 기분이 좋았다.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혀줘서 좋았고, 침울한 기분에는 동반자가 되주어서 좋았다. 젖을락 말락 가랑비는 간질거려서 좋았고, 억수같은 장대비는 시원해서 좋았고, 몰아치는 태풍은 엄청난 위력에 대견함과 겸손함이 생겨서 좋았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도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리는 비가 싫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내 감정을 눈치챘을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평생 애인 같은 느낌일줄 알았던 비가 싫어지기도 하다니 말이다. 물론, 여행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은 탓도 있다. 운동을 하면 조금 회복되는 느낌인데 그런 운동을 내리는 비 때문에 못하니 신경질나기도 할 터이다. 내 뜻대로 안되는 사람 감정에 마음 상한 것도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비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고작.. 

내 사랑은 고작..  

'비'에 대한 내 변덕을 알아차리면서 내 주제를 알았다고나 할까. 나는 고작..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천년의 세월을 한자리에 있는 바위의 정숙함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져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며 들어가는 비의 부드러움도 모르고, 고작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애꿎은 비에다 화풀이만 해댄 것이다. 그것도 늘 그 존재에 감사해하는 비에다가! 어리석기 그지없는 하루살이 삶이로구나. 

아침에 출근을 하고보니 오늘도 종일 비가 올 태세다. 태풍이 몰아치는데 비가 동반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간만에 조용한 일요일 근무가 될 듯하다. 음악도 틀지 않고, 빗소리를 가만가만 들었다. 뒤죽박죽 엉망이었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는다. 어제 하루 내 못된 행동들에 상처받았을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서야 드러난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왠 남자가 약국을 들어선다. 화상환자다. 무릎에 화상을 입었는데 집에 굴러다니던 접착형 메디폼으로 자가치료를 한다고는 했는데 뭐가 좀 이상하다며 오셨다. 환부를 들여다보니 상태가 별로다. 몇 일간 생으로 고생만 하시고 치료는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화상을 입었을 때는 우선 흐르는 물에 환부의 열을 식히는 것부터해서, 리도가제를 붙여서 열독을 내리는 것까지 설명을 해주고, 환부에 화상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리고 접착형 메디폼 말고 좀 두터운 2미리짜리 메디폼을 붙여주고, 그 위에 반창고격인 픽싱롤까지 덧대주었다. 남자는 화상을 입었음에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오늘 경기가 있다면서 다리를 요리조리 움직여보더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자가 보기에도 내 처치가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치다. 그럼..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컵라면을 먹는데도 물 붓다가 팔에 부어버려 화상 입는 사람인데..화상을 입지 않으면 요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화상경력이 좀 된다고 말을 해줬더니 남자가 웃는다. 몇 십분을 문을 연 약국을 찾아다녔다며 문 열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상처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다시 쏟아지는 비 속으로 나갔다. 쏴아아~ 빗소리가 청량하게 들린다.  

마음이 안 좋은 날, 누군가를 치료해주게되면 내 다친 마음까지 같이 치료되는 느낌이다. 늘 받는 느낌이지만, 매번 고마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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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6-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갑작스런 변심은 아니구요~~ 원래 집에서 놀면서 비올때! 부침개먹는 그런 비오는 날만 좋아하는 그런~~
착실했던 연인이신 달사르님보다야 참 변덕스러운 애인?인거죠^^;
화상과 요리는 절친인거죠ㅋ 어찌나 피부가 얇은지 명절이나 제삿날, 생신날 등등 본격적으로다가 전을 부쳐야되면 기름이 튀어서가 아니라 기냥 열기에 얼굴도 뎁니다... 여름엔 필수적으로다가 가재손수건 사용해서 땀을 찍어서 닦고요~ 심하면 노란화상약이 가제에 묻어있는 그거 (이름은 모름@@;) 볼따구에 붙이고 그럽니다.. 저 쫌 덴뇬이랍니다*^^*

저희동네에 달사르님처럼 친절하고 박식하신 약사님이 있었는데요~ 재개발재건축어쩌구해서 약국이 없어지면서 겸사겸사 은퇴하셔서 넘 아쉬워요~

달사르 2011-06-29 11:18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맞아요 맞아. 화상과 요리는 절친! 요리에 화상이 빠지면 뭐가 덜 들어간 느낌! 아고..열기에도 델 정도면 완전 요리의 달인이신데요? ^^ 평소에 매일같이 요리를 해야하는 주부님들은 그러고보면 정말 대단한 인내력을 가진 직군인거 같애요. 안녕하세요 pjy님. 만나서 반갑습니닷! 반갑게 내리는 비처럼 반갑네요 ^^

아...재개발되면서 단골약국이 없어졌군요. 저희 동네에도 지금 재개발문제 때문에 비슷한 경우가 생겨서 근처 약사님들이 많이 곤란해하시는걸 봤어요. 재개발이라는게 참..

2011-06-29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0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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