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으다 보니 이덕형 샘의 책이 하나 둘 늘어났다. 맨 처음 가지게 된 책은 생일 선물로 친구에게 받은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이었고 이 책으로 인해 '러시아'라는 나라에 관심이 생겼다. 아니, 러시아에도 문화예술이? 라고 생각할 정도로 러시아에 대해 무지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태생인 줄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전문적인 영역을 아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의 이덕형 샘 덕분에 러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후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책을 선물한 친구의 고전 읽기 부추김이 없었다면.

 

얼마 전부터 고전을 읽기 시작하는 친구 덕분에 어렸을 적에나 읽었던 고전에 대해 다시금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어려운 고전에의 도전은 마음 먹기 쉽지 않았고 친구의 독서감상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입문서의 경우 초보자가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도대체 내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를 경우가 많다. 대충 읽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매번 꼼꼼하게 읽었는데도 혼란스럽다면 그건 저자의 정리법이 두서없는 경우일 수도 있다. 이덕형 샘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정리법이 탁월하다는 데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나는 한국인에게 지리적으로 분명 유럽보다도 가까운 나라인 러시아에 대해, 러시아의 문학에 대해, 러시아의 종교에 대해, 이렇다 할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구나, 라는 자각이 생겼다. 얼마 전 <이콘과 아방가르드>를 통해 러시아 정교에 대한 부분을 읽긴 했지만 비종교인에겐 너무 전문적인 책이어서 러시아 정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러시아에 대해, 러시아 문학에 대해, 러시아 정치에 대해, 러시아 문화에 대해, 알고자 하는 초보자에게 아주 좋은 입문서이다. 이 책의 이름이다.

 

 

 

 

 

 

 

 

 

 

 

 

 

 

 

 

 

 

1.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학업 및 창작을 한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의미를 짚으면서 시작된다.

 

1703년 표트르 대제의 로고스를 체현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엄'이자 '세계 문명 속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 '성 베드로의 도시'는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이 유럽의 모더니티와 착종된 결과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이브리드적인 이종접합의 스핑크스 도시였던 것이다.

 p. 11

 

 

나는 1703년을 이렇게 정리했다. 김연수의 최근작인 <원더보이>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나 할까.1234 숫자를 가나다라 와 매치를 시키는 방법인데 여기서 소개하면 소설이 재미없을까봐 소개안하고 패스~

 

 에 걸린 백한 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해.

아주 운치가 있는 정리법이다. 암튼 백야의 도시, 그러니까 창백한 달의 도시, 성 베드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에 탄생했고 태생부터 판타스마고리아적 의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적이 그 나라에 있을 때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지만 그런 유적이 영 딴판인, 게다가 아주 정교적인 나라에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세워진다면 그걸 보는 이국인이 얼마나 의아할 것인가. 그걸 보는 러시아 인은 또 얼마나 희박하기 그지없는 역사적 뿌리에 어이없을 것인가. 원로원 광장에 세워진 팔코네의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을 보면서 푸슈킨은 이 도시의 비현실적인 광기를 읽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의 주제를 '환상적인 형상'으로 변형시키는 상상의 힘을 발견한다. 이 상상의 힘이 바로 판타스마고리아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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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2 팔코네의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환영이라는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하는 판타스마고리아의 원래 의미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 즉 환(등)상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판타스마고리아의 개념은 발터 벤야민에 의해 보다 폭넓은 외연을 얻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모더니티가 가장 잘 구현된 장소를 '메트로폴리스'로 간주하는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모더니티의 수도를 파리로 보았고, 이 모더니티의 수도를 구성하는 핵심 거점을 '파사주'라는 아케이드로 파악했다. 이 아케이드는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우선시되는 최신 유행 상품을 파는 장소였다. 이곳은 상품 자본주의의 신전이자 성소였으며 상품은 성물이었다.

 

그러나 상품은 유행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동일 반복과 욕망의 산물이었고,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에서 이것을 판타스마고리아라고 불렀다.

p. 18

 

 

 

 

2.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로 1837년 5월, 표트르 대제가 세운 지 104년이 흐른 뒤, 도스토예프스키 부자가 간다. 황제 차르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있던 공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역시나 1837년의 소개는 이렇게.

 

요한 개의 트페테르부르크로 도스트예프스키 부자가 입성한 해.

 

도스토예프스키가 장차 공부할

 

공병학교 전체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엄격했으며 왠지모를 음산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미하일로프스키 성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대천사 미하일 축일에 상량식을 거행한 미하일로프스키 성채는 예카테리나 2세의 뒤를 이은 파벨 1세가 거주할 목적으로 여름 궁전 자리에 지은 건물이었다. 1797년 건축을 시작해서 1800년 11월 8일에 준공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성채에서 1801년 파벨 1세가 암살되었는데, 궁중에서 벌어진 암살 음모에 파벨 1세의 법적 상속자인 알렉산드르 1세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와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알렉산드르 1세는 결국 스물세 살의 나이에 러시아 황제의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왕관을 쓴 햄릿' '유럽의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차르'라는 신비스러운 별명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후 황실 가족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자리의 겨울 궁전으로 돌아갔고, 이 비극적인 성채는 폐가처럼 버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러시아 제국 정부는 1819년부터 그 불길한 성채의 건물 내부를 수리하여 공병학교의 기숙사와 교실로 사용하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폰탄카 샛강이 내려다보이는 '2층 모퉁이 구석방'에 자리를 잡았다.

...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집과 작품의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막다른 공간의 전조가 미하일로프스키 성채의 공병학교 구석방에서부터 시작된다.

p.58

 

 

 

<p.60 폰탄카강변의 미하일로프스키 성채>

 

<p.26 공병학교 인근의 지도>

 

미하일로프스키 성채, 즉 공병학교의 음울한 색채를 한껏 즐긴 후, 도스토예프스키의 학업과 이후의 창작 과정을 살펴봐야겠다.

 

 

 

 

 

 

 

 

 

 

 

 

 

 

 

 

 

 

 

 

 

 

이덕형 샘 책, 총 6권 모았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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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2-02-2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수아 라블레...저 책 집에서 봤어요!!!
동생이 산 건데... 괜히 반갑네요^^
저도 요즘 러시아에 관심이 생겨서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요 책을 찜해놨는데 여러 권임에도 불구하고 한 권당 32,000원이라...흐흑

달사르 2012-02-27 21: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반가워요, 꼬마요정님. 저는 프랑수아 라블레..도 어려워서 조금 읽다가 제껴놨어요. 지금 보는 판타스마고리아..책 읽고나서 다시 도전할라구여.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가격이 꽤 하더라구요.저는 품절이 우려되서 진작에 지르긴 했는데 아직까진 보관용이야요. 히. 부끄..
우리, 러시아에 대해 좋은 정보 같은 거 생기면 공유해 보아요. ^^
 

 

 

 

오후 5시. 퇴근을 했다.

 

평소 퇴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다. 일요일에 같이 개문한 다른 약국에 전화로 부탁을 하고, 인근 병원에 전화로 양해를 구해놓고 폐문했다. 징검다리로 계속 병가를 낸 직원으로 인해 덩달아 나의 몸 상태마저 말이 아니다. 2인 근무 직종의 애환이라고나 할까. ㅠ.ㅠ  최대한 버티고 버텼지만 오후 4시를 넘기면서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직업상 평소에 늘 환자들의 기침 포말과 접하기에 몇 년 전 신종플루 대유행 시절도 무사히 넘어갔고, 일반 감기는 오다가도 저 멀리 달아나 버리지만 체력이 다운된 상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약을 주는 사람이 멀쩡해야 약을 타는 사람이 안심하는 부분도 있기에 평소에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 신경을 쓰는 편이니 더욱 그러하다. 다음 날을 위해 몸관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일찍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마음 불편한 이른 퇴근이다.

 

설날 즈음부터 시작된 독감은 이제 대유행 전단계까지 가는 듯하다. 예년과 다른 점은 독감에 걸리는 아이의 태반이 영유아라는 점이다. 사분의 일 정도는 초등학교 저학년이고, 고작 15퍼센트 안쪽으로 성인이 걸리는 추세다. 아이들은 주로 (해열제를 먹어도 쉬이 떨어지는 않는) 고열 증상이고 어른의 경우는 견딜 수 없이 살이 아픈, 지독한 몸살을 동반한 고열이 많은 듯하다.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왔지만 고열을 동반한 심각한 증상이 이어지는 아이들은 비급여로 타미플루(독감 치료제)를 처방받았고 다행히 약을 먹고 대부분 경과가 호전되었다. 10세 전후의 아이들이 처방받는 경우엔 주의력 결핍 증상을 설명해야한다. 오래 전 일이지만 일본에서 이 약을 먹은 십대가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사례가 있은 후부터 10세 전후의 아이 부모에게는 반드시 설명을 하고 약을 준다. 간혹 이 설명에 너무 놀라하는 엄마 때문에 아이도 덩달아 불안해하는 경우가 있어서 엄마의 마음을 다독거리는 것까지 복약지도에 속하는 부분이다. 캅셀을 먹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는 가루약이 너무 써 뱉어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소량의 음료수나 요플레 등에 타서 먹이는 등 다양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어머니들에게 요긴한 부분이라 긴 설명을 요한다.

 

약국 직원도 독감과 비슷한 증상을 보여 병원에 보냈으나 조금 다른 질환으로 진단을 받았다. 독감은 아니었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지 못해 출근과 병가를 번갈아했고 2인의 사업장이기에 나 혼자 발을 동동거리며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봄방학이어서 조카들이 캐셔과 처방전 입력을 도와주었지만 직원의 병가 상태가 오래 진행되어 나와 조카들은 점점 파김치가 되어갔다. 급기야 오늘은 튼튼하기 그지없는 작은 조카 입에서 좀 쉬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마침 그 즈음에 조카 친구들이 약국에 놀러왔다. 집으로 놀러왔다가 약국 일 도와준다는 말에 약국으로 온 조카의 친구들은 조카보고 그만 일 도와주고 같이 놀자고 한다. 그렇지만!!  의리심으로 똘똘 뭉친 작은 조카는 놀지 못한다며, 이모를 도와야 된다며, 친구들보고 가라고 했다. 그 배려심에 감동받은 나는 조카의 친구들에게 짱구 이온음료를 하나씩 쏘았다. ㅋ

 

어찌 되었건, 일주일 가량을 하루 온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녀 살이 홀쭉해진 모습으로 퇴근을 했건 말았건, 집에 들어오니 너무 좋다!! 집의 따뜻한 온기도 좋고, 간만에 블로그에 들러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좋다. 고요한 내 시간을 이렇게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 케이팝스타 하는 날!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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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2-02-2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케이팝스타는 눈물겨웠어요. 이승훈 군이 올라가서 얼마나 기쁘던지요.
달사르님, 폭 쉬고 가뿐하게 일어나셔요!!

달사르 2012-02-26 21:48   좋아요 0 | URL
넵! 마노아님. 케이팝스타의 그 젊은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찌그리 이쁘던지요. 저도 이승훈 군 올라가서 좋았구요. 박제형 군의 편안하게 노래하는 스타일도 좋았어요. 손미진 양의 탈락이 아쉽기도 했구요.
하하. 케이팝스타 끝나자마자 글 한 편 올렸네요. 요새 보고 있는 책인데 정리 좀 하고 넘어가려구 말이죠. 아함~ 이제 자야겠어요. 마노아님, 안녕~

신지 2012-02-27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드는 탓인지 약값이 점점 많이 드는 것 같아요.( ")
문득 생각해 보니 최근들어 저도 참 심심하면 약국 가더라는;;

실은 병원은 정말 웬만해서는 가기 싫고, 약국은 마치 편의점처럼 편하게 부담없이 가도록 되어있어서 그런 듯.
전에는 별로 신경 안써서 몰랐는데, 자주 가다보니 약국도 사람처럼 인상이 좋은 곳, 싫은 곳이 있더군요.

나름대로 다들 열심히, 잘 하는 거겠지만... 저는 달사르님 같은 약사님 많이는 못 봤어요. 저도 오랫동안 자영업을 했었기 때문에 달사르님 마음이 이래저래 참 공감이 되네요. 주말 편안하게 보내셨길..

달사르 2012-02-27 22:06   좋아요 0 | URL
하하하. 심심하면. ㅋㅋㅋ (정답인데요. 저희 약국에도 심심하면 들러서 놀아달라는 손님들이 꽤 되십니다요. 나이 지긋하신 분부터 어린 꼬맹이까지요. 병원 가믄 하고픈 말을 다 못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상하게 약국 오믄 이런저런 속사정까지도 말하게 된다면서 요상하네...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꽤 되는 걸 보면 신지님 말씀이 맞나봐요.
ㅋ. 약국도 궁합이 있나봐요. 이 부분도 공감입니다. ^^

ㅠ.ㅠ 오늘 근황이 너무 걱정이 되었는지 밤새 온통 외국어로 된 약들에 둘러싸여 약을 조제도 못하고 낑낑거리는데 매대 앞에는 손님들이 잔뜩 있어서 혼자서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악몽에 밤새 시달렸어요..ㅠ.ㅠ 신지님도 자영업을 해보셨다니 공감대가 더욱 느껴집니다. 자영업이라는게 그냥 문 하루 문 닫지..를 넘어서는 책임감이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 책임감이 손상될 위기 상황은 정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상황 같애요. 하아..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갔네요. 신지님도 오늘 하루 잘 보내셨는지요.

자목련 2012-02-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심한 감기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고마운 조카네요.
지금은 벌써 수요일, 달사르님은 여전하게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겠네요.
평온하게 채우시길 바라요..

달사르 2012-03-02 00:03   좋아요 0 | URL
이제 서서히 봄이 오는 듯해요. 봄기운에 독감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버렸으면요!

조카는 이제 3년동안 주말 알바를 시킬 생각입니다. ^^
넵! 어제는 분주한 하루를 보내서 오후 늦게까지 다음날인 3,1절이 쉬는 날인지도 몰랐지 뭐에요. 하하. 오늘.. 음악이 흐르고 음식이 넘쳐나서 무척 행복합니다. 특히!! 음식에서요!!! 하하하.
 
조드 2 - 가난한 성자들 조드 2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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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마음의 벗이자 또한 적이기도 한 자무카와의 대결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간이 놓지 말아야 할 그 무엇에 대해 고민하는 칭기스칸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속엔 `사랑`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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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1 - 가난한 성자들 조드 1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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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테무진을 통해 인간을 느끼게 해 주는, 아주 길고 아름다운 서정시같은 소설이다. 문명의 어항 속에 뻐끔거리며 사는 현대인에게 어항 밖 세계의 넓고 찬란한 빛의 존재를 감지하게도 해주는 마법 같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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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나자마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바쁜 월요일 오전 시간이었다.

"때르릉"

"예. 약국입니다."

"접니다. 저 대신 보쌈 값 좀 내주세요."

"네? 어디에 전화 거셨어요? 여기는 약국입니다."

"네. 저라니까요. 제가 보쌈을 시켜 먹었는데 자꾸 외상값 갚으라고 독촉을 해서요. 약국으로 보내줄테니 저 대신 외상값 내주세요."

"...아....저기...지금은 제가 바빠서요.."

 

바쁜 와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일주일 내도록 생각했던 그녀와 나와의 미래 대화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일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밀린 손님들에 미처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직원이 받았다.

 

"네? 병원으로 게보린을 갖다 달라구요? 병원에 입원했다구요?"

 

여자는 심신미약으로 입원을 했다고 한다. 원룸 생활비도 없는 형편이니 먹을 것 나오고 재워주는 병원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인 듯도 싶다. 그렇지만 병원 약과 중복되기에 게보린은 줄 수 없다고 전했더니 아들을 보내겠다고 말을 한다. 저번에 아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잠시 갸웃거렸다. 아..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 모양이다. 그래도 줄 수 없다고 말을 전했고 여자가 전화를 끊었다. 10분 후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다짜고짜 택시비를 달란다. 병원에서 택시를 불러서 약국을 들르겠으니 택시비를 내놓으란다. 게보린을 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정말로 여자가 택시를 타고 왔다. 누군가에게 택시비를 꾸어서 왔다. 게보린 5 곽 값까지 들고서. 하지만 나는 여전히 줄 수 없다고 말을 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반약은 드리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퇴원하면 주겠다고 말을 했다.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중얼 욕을 하며 문을 열고 나갔고 근처의 다른 약국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머리 속으로 명확하게 그리진 않았지만 그녀를 도울 나름의 상이 있었다. 여자가 홀로서기를 하는데 있어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이런저런 생각도 했다. 여자는 그러나 내 생각을 벗어났다. 나는 여자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메러디스의 말처럼. 그렇지만 나는 메러디스의 말이 여전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준비됐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이 생활도 끝이야. 네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인 거다. 지금부터는 모든 게 네 책임이고, 너 자신 말고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해라."

메러디스 콤스.

나를 보육원으로 돌려보낸 수많은 입양 가족의 선정 책임자였던 사회복지사. 그녀가 감히 내게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p.15

....

 

펠가에 접어들면서부터 메러디스는 쉴새없이 떠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인 이유를 열거하면 샌프란시스코를 반은 가로지를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아무 의욕도 연고도 없고 사회성도 없는 나. 그녀가 내게 장래 계획을 묻고,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 거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p.21

 

 

바보같게도 나는 매러디스의 말과 닮은 내 생각들이 그녀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매러디스의 그녀,빅토리아가 메러디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듯 그녀에게는 내 생각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생각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나 커서 섯불리 무언가를 시도하지 못한다거나, 주위의 도와주는 이들에게 보답할 정도로 꿋꿋하게 일어서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다거나, 아니면 주위의 사건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거나. 암튼 여자는, 자신의 든든한 배후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과 자신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그 생각에 대해서는 그녀를 존중하기로 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이니까.

 

 

"일자리는?"

"무슨 일자리요?" 

"일자리 구했냐고"

"구했겠어요?"

 

"구했어야지! 넌 일자리를 찾아서 지원하고 채용이 되어야만 해. 안그러면 6주 안에 거리에 나앉게 될 테고, 추운 밤에도 널 재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넌 원해야만 해. 난 네가 원하는 만큼만 해줄 수 있어.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원해야 한다는 거야."

"널 거리로 내쫓는 건 나한테도 힘든 일이야. 하지만 명심해. 난 그렇게 하고 말 거니까."

그게 힘든 일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p.27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보육원에서 겨우 나와 석달 동안만 무료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구해주었고, 종종 들러 근황을 살폈으며, 어쩔 땐 돈봉투까지 방문 밑으로 살짝 밀어넣고 갔어도 빅토리아는 메러디스를 믿을 수 없었다. 매번 파양당한 아픈 기억이 빅토리아를 괴롭혔으며 파양 후 늘 돌아가던 보육원 생활이 빅토리아를 불안하게 했으며, 자신만을 향하지 않는 메러디스의 눈 앞에서 빅토리아는 신뢰를 버렸다. 숱한 파양으로 인해 입양 대기자 목록에서 빅토리아를 빼자고 하는 판사의 제안을 메러디스가 묵살할 때도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의 눈에서 그저 사회복지사로서의 수치심만을 읽었다. 어렸을 적부터 빅토리아를 봐오던 메러디스에게 어느 정도의 정이 있는지는 메러디스만이 알 일이다. 상대방은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느낄 뿐이다. 빅토리아가 메러디스에게서 그런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 자체로 사실인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의 '그게 힘든 일이라는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라는 생각이 이해가 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입 밖으로 나오는 말 이외의 것들 또한 많은 역할을 한다. 오랜간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의 관계에서 빅토리아는 메러디스에 대한 평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잠시의 만남에서도 말 이외의 것들은 상당한 역할을 한다. 흔들리는 눈빛, 말들 사이의 쉬어가기, 무의식적인 손동작, 그리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흐름.

 

빅토리아의 믿지 못하는 마음을 읽을 때 나는 약국에서의 그녀의 눈물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어터진 손이 떠올랐다. 빈 원룸에서 그녀가 그동안 혼자 무얼 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도와줄 때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도움주기와 받기는 서로 맞지 않을 경우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처럼 어긋나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메러디스가 당연히 아니며 메러디스는 어쩌면 주인공의 미래의 방해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의도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직업으로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든 나처럼 닥친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누구를 도우게 되든지간에 결론은 그 사람이 잘 되는 일일 것이다. 타인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은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그녀는 조만간 또 내방할 것이다. 그때 또 어떨 일이 생길까. 나는 또 어떻게 행동을 할까.

 

소설에서 빅토리아가 두려운 마음을 떨치고 생계를 위해, 혹은 미래의 꿈을 위해 첫 발을 내디디듯 그녀 역시 무언가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녀에게는 어떤 꽃이 어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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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주기와 받기는 서로 맞지 않을 경우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처럼 어긋나버린다' 네, 맞아요, 달사르님. 달사르님이 생각하신 도움 혹은 줄 수 있는 도움과 그녀가 생각한 혹은 받고 싶은 도움이 달랐던 것 같아요. 이런건 다를 경우 꽤 불편해질 수 있는데 .. 앞으로 내방할 그녀과 달사르님 사이에 생길일이 기쁘기 보다는 혹 불편한 것이 되는게 아닐까 싶어서(지금도 불편해 보여요) 사실은 그녀 혼자 스스로 잘 이겨내고 똑바로 서고 달사르님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달사르 2012-02-10 21: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제가 힘들었을 때 기억이 나서 가급적이면 도울 수 있는 한도까지 도와주고 싶은데, 생각대로 잘 되질 않네요. 네. 맞아요. 불편함이 느껴져서 제가 그녀를 도우는 방식이 그녀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 혼자 잘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만 갖고 있고 다른 방식을 찾든지 아니면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될 거 같애요.같은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다락방님이 메러디스와 빅토리아에 대해 잘 아시니 다락방님의 조언이 더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다락방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을 무렵에 위 사건이 생겨서 제가 고민을 좀더 깊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어요. 한달도 넘게 고민만..ㅠ.ㅠ
하하. 다음엔 빅토리아와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또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2-02-22 0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6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