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오랫동안 들었던 곡처럼 편안하게 나를 꿈결로 인도했다. 굵은 스트링으로 깔리는 첼로(맞나..) 선율은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고 규칙적인 피아노 리듬은 심장박동처럼 일정했다.
볼륨을 조금 올려 보았다. 음량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렸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계속 들었다. 서서히 갑갑함을, 숨이 막혀옴이 느껴진다. 이 느낌은 얼마전 그림책에서 봤던 그 느낌과 닮았다.
"엄마, 너무 갑갑해. 내게서 저 하늘을 걷어줄 수 없어? 저 하늘이 너무 갑갑해."
아이를 위해 하늘을 걷어내 줄 수 없는 엄마를 떠나서, 꼬마 성자는 길을 떠났다. 하늘이 없는 곳을 찾아서.
텅 빈 공간. 지상의 번잡한 것들이 없는 무공해의 공간처럼 여겨지는 파아란 하늘이 갑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꼬마 성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느낌을 내 나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소녀는 행색이 그리 좋진 못하다. 옷이 화려하지도, 신발이, 두건이 고급스럽지도 않지만,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사그라진 표정이다. 자연의 들판에서 한때의 휴식을 즐기지 못하고, 근처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대지를 툭툭 치며 잠시의 휴식을 때우고 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표정.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한 표정. 저 아이에게는 무엇이 위안이 될까. 온통 풀밭인 자연이 갑갑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래, 온통 자연. 온통.
온통 무엇으로 가득차서 내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 순간의 느낌. 그런 느낌. '온통'엔 그런 느낌이 있다. 나의 의지가, 나의 개입이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무심한 자연에게 내가 어찌할 것인가.
듣고 있는 음악도 '온통' 음악이다. 음악으로 꽉 찬 공간에 들어간 느낌. 음악 이외의 딴 생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음악으로 충만한 공간. 어쩔 땐 희망이기도 한 공간이,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땐 갑갑함의 대명사가 된다. 이 양자간의 차이는 그저 그 속에 있는 인간의 변덕에 불과한 걸까.
가을이다. 강변가의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지상으로 나폴거리며 떨어지는 작별의식이 있을 터이다. 떨어지는 낙엽은 '온통 자연'의 느낌에서 쉴 수 있는 숨구멍의 기능을 한다. 떨어지는 낙엽을 생각하자, 그제서야 나는 조금 숨통이 틔었다. 그림의 소녀도 온통 풀밭의 공간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쌓이며 밟히다 사그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순간의 여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면 이전의 갑갑하던 완벽한 풀밭은 어느새,
그리움이 가득찬, 수줍은 새싹들이 고개를 들며 소녀에게 인사를 하는 봄의 계절로 바뀔 것이다. 다시 찾아오는 여름의 완벽한 풀밭은,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황량함을 기억하는 소녀에게 더 이상 갑갑하지 않을 터이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나자, 음악으로 꽉찬 연주곡이 더 이상 갑갑하지 않게 느껴졌다. 완벽한 잠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어졌다. 비에른스타의 다른 곡이 마저 듣고 싶다. 음악의 낙엽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