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흉을 보려거든, 내 속이 썩어 문드러져야 한다."

 

얼마전 아는 언니네 놀러갔다가 들은 말이다. 그 언니와는 이제 알게 된 지가 횟수로 6년을 접어드는데 속이야기를 종종 하는 사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속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아서 거리감이 느껴진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친언니도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하는 걸 보니 이것도 가족내력인 모양이다. 내 고민을 이 사람에게 하소연, 저 사람에게 하소연 하거나 치근덕대는 걸 싫어하기도 하지만, 가급적 고민이란 건 내 선에서 해결하는 게 원칙이다. 고민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이후의 상황에 대한 상담 정도는 모를까, 한창 고민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러니까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뭐든 과장되기 쉽상이고, 게다가 털어놓고 난 후는 항시 후회하기 마련이다. 일단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속에서 나온 말이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다.

 

 

 

 

 

그 언니와 나는 속이야기를 할 때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이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줄래. 내 이야기. 너만 알고 있어."

이런 말은 듣기는 쉬운데 지키기는 사실 어렵다.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이라니, 얼마나 짜릿한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다가 마침내 병이 생긴 사람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 살다보면 종종 타인의 비밀을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병이 생길 순 없지 않은가.

 

그럴 때 먼저 입 밖에 이렇게 말을 내뱉고 나면 이후의 행동에 책임지기 쉬워진다. 같은 결과물이라도 남이 시키는 것과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은 천지차이지 않은가. 타인이 자기 입에서 비밀 이야기를 해놓고는 (누가 말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비밀을 지키라고 말을 하면 곤혹스럽지만, 내가 먼저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을 꺼내면 내 의지가 개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가 좀더 쉬워진다. 첫 한 번은 어려울 수 있지만 곧 버릇이 들어 저절로 비밀을 지킬 수 있게 되면, 이후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왜냐면 지킬 비밀이 하나일 때는 힘들지만 비밀이 여러 개가 되면 대수롭잖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타인의 비밀 자체가 대수롭잖다는 말은 아니다. 타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내 상황 자체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타인의 비밀 자체는 어디까지가 보호받아야할 그 어떤 것의 일종이다. 타인은 나를 믿고 비밀을 말했으며 그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마음이 후련해졌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으며 또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으로 일종의 동지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후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이 제 3자에게 말을 옮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면 또다른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지만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자.)

 

간혹 남의 비밀을 지킨답시고 제3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제3자는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상황 그 순간에야 미주알고주알 말이 많지만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 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3자가 그 상황에 관심도 없는데 굳이 그 상황을 들춰가며, 게다가 거짓말까지 붙여가며 타인의 비밀을 지키는 경우는 한마디로 오버적인 행동인데 이것은 타인의 비밀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마음의 재산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나 타인의 비밀을 많이 알아.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등등. 타인의 비밀은 절대 나의 (마음의) 재산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으로 타인과 친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을 진실되게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타인을 이용할 뿐인 것이다. 나중에 거짓말이 들통났을 경우 그 욕이 고스란히 타인에게 갈 건데 그 책임을 과연 질 수나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타인은 정작 그 사람이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한 상황 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말이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불러 자기들끼리 뭉쳐 제 몸피를 넓히는 데 재주가 있기 때문에 타인을 위한답시고 하는 거짓말은 그저 거짓말에 불과하다. 결코 하얘질 수 없다. (아. 타인을 지키기 위해 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의 거짓말은 제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고민이나 비밀이란 것에 대해 이런 기본 생각을 가진 내가 앞서 언급한 언니에게 만큼은 간간이 비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언니가 타인으로 인한 상처를 입었을 때 내가 들어주는 과정이 첫 시작이었는데 그 둘을 모두 아는 나는 갑작스러운 언니의 의기소침에 놀랐고 이후 지속적인 대화를 하면서  언니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언니와 있었던 비밀 이야기를 옮길까, 언니가 (또다른, 새로운)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나의 과거 경험으로 우러난 생각이다. 나 역시 과거 누군가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는 과정에서 꼭같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고민을 털어놓을 때, 털어놓고 후련할 때와, 시간이 지난 후 고민이 입 밖으로 나와 오픈된 상황이 되어 내가 제어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완전히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민이 내 입 안에 들어 있을 때는 얼마든지 수정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지울 수도, 없던 일로 만들수도 있지만, 입 밖에 나온 이상 그 고민은 더이상 나만이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 인식되어진 오픈 상태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혹은 언령)의 무서운 일면인데, 이 상황에 심각하게 직면을 해본 사람은 어지간한 말은 입 밖에 내기 저어할 정도로 바뀔 수도 있다. 암튼, 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언니의 마음 상태를 미루어 짐작한 나는 언니에게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나 이 말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게요."

시간이 흘러 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내 고민과 내 비밀을 언니에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사건이 일어나고 1년도 훨씬 지나고 난 후였다. 직업적인 힘듦을 가족이나 기타 친한 지인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던 나는 역시나 제 3자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언니가 편했고 그 언니는 놀라면서도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언니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아무에게도 이 말 안해줬으면 해요."

 

 

 

시간이 또 흘러 며칠 전 언니는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언니는 미처 마음 정리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말을 할까 말까 저어했다. 그러나 이윽고 말을 하기로 생각을 했는지 입을 열었고 긴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최대한 언니를 도우려고 했고, 대화하는 와중에 언니의 상기된 얼굴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언니네 가족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지만 너무 버거웠던 언니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그 요청에 성실히 임했다. 마침내 언니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고 일상으로 조금은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는 우리 둘의 암묵적인 오랜 약속을 입 밖에 꺼냈다.

"언니,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을게요. 나는 우리 식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아요. 언니, 알고 있지요?"

 

입 밖으로 낸 말은 실은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이랄 수도 있다. 자칫 실수로 언니의 비밀을 말하지 않게 해달라는 나만의 기도법이라고나 할까. 입 밖으로 비밀을 말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내 입술에 대한 빗장이랄까. 타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고랄까.

 

가끔 그 언니와 서로의 옛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서로의 상황을 체크하는 우리들은 이제 그 상처들이 더이상 아프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보다 세상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우리 둘이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언니는 언니의 시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나에게 전해준다. "남의 흉을 보려거든, 내 속이 썩어 문드러져야해. 남의 흉을 보려면 제 속에 악한 기운을 담아야 되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 우리는 이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남의 흉을 안 봐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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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4-02-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켜야할 비밀이 많아지면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된다...이거, 기억해두면 좋을 원리네요.
일종의 마음 연습이 되는 것 같아요. 비밀이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두면 빗장이 자주 걸리게 되고,
그러면 비밀을 지키는 것에 대해 그러려니...하는 습관으로 여기게 되는 것. 좋은 습관입니다.^^

아뉘, 언제 이렇게 많은 페이퍼를 남기셨어요?
제가 너무 뜸했다가 뒤통수 맞았네용.

2014-02-16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