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해야 대학소설상인데, 이십대의 대학생(내지 졸업생)이 글을 얼마나 짜임새있게 쓰겠나. 신선함의 발견 만으로도 대단한거지. 그러니까 예비작가의 앞날을 보고 미리 작가를 뽑는 정도겠지.'라는 안이한 자세로 책을 폈다가 첫페이지부터 깜짝 놀랐다. 글이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첫 페이지를 보고 또 봤다. 몇 번을 봤는데도 좋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은유적 배경이 들어있지 않은데도, 사실적 세밀묘사만을 했는데도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어서 더 좋다.
짙은 안개에 달도 보이지 않는 밤. 먹빛 바다에 실금을 그으며 움직이는 작은 빛이 있다. 바다의 뒤척임에 부연 빛이 들썩인다. 빛은 파도를 따라 일렁일 뿐 그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도양 어딘가에 떠 있는 유조선 선미 마스트에서 나오고 있는 빛이다. p.7
소설에서 시작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은 적이 있다. 도입에서 독자의 몰입을 유도해야 그 힘으로 소설의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소설을 읽게 된다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부연하고 싶다. 도입은 독자의 몰입 유도와 함께, 달밤에 커튼 뒤로 비쳐보이는 듯한 그림자의 불완전성도 또한 있어야 된다고. 작가가 부러 불친절하게 빠뜨리는 부분을 찾는 재미가 도입에 있어야 독자의 호기심이 증폭되니까. 물론 이런 부분은 개개인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이 다름이 또한 소설을 읽는 맛이기도 하겠다. 그럼 도입부에서 작가의 불친절한 부분, 그림자의 불완전성을 찾아보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먹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유조선 위. 시간적 배경은 짙은 안개와 달도 없는 깜깜한 밤. 서두에 필히 나옴직한 두 배경이다. 이 배경을 깔고 나니 어디선가 빛이 보인다. 이 빛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론 깜깜한 바다에 떠있는 유조선 위니까 당연히 유조선 마스트에서 나오겠다. 그러니까 작가는 <...작은 빛이 있다.> 에서 뒤의 두 문장을 빼버리고 마지막 문장으로 바로 넘어가 <인도양 어딘가에..유조선 선미 마스트에서 나오고 있는 빛이다> 라고 해도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문장을 일부러 넣었는데 이 부분이 바로 그림자의 불완전성에 해당된다.
이 소설은 해적소설이다.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하는 해적들 중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한국어선이 피랍되고 그 어선 위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엔 어선이 아니고 유조선이 나온다. 소재가 한국어선의 피랍이라는 정보를 미리 들은 독자는 이 부분에서 헷갈린다. 왜 배가 달라졌을까. 물론 이 소재를 미리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선물은 있다. 유조선에서 나오는 빛이 왜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걸까. 배가 고장났단 말인가. 무슨 사고라도 났단 말인가. 어떤 사고가 어떻게 났을까 등등. 작가는 그저 물 위에 뜬 배 위에서 빛이 비추는 배경을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배경 설명 말미가 아닌 중간에 두 문장을 삽입하면서 작가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독자 스스로가 호기심이 생기는 듯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삽입 문장은 두 부분이 맞겠다. 주 요지인 한 문장만을 삽입했다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에 대해 간파할 수도 있을텐데 짐짓, 무관해 보이는 듯 '바다의 뒤척임'이라는 배경을 삽입함으로서 뒷 문장까지도 짐짓 무관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실지로 무관해지지는 않고 무관함을 포장으로 한 관심 획득이다. 소위 말하는 밀당(밀고 당기기)이라고나 할까. 그럼으로서 소설은 도입부터 생생함을 획득하게 되어 이후의 전개가 박진감있게 펼쳐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유조선의 우현 녹등은 깨졌다. 좌현 홍등은 노파의 숨소리처럼 잦아들다 결국 숨이 멎었다. 선수등이 있어야 할 선수 마스트는 송두리째 부러져 밑동만 남았다. 홀로 남은 선미등이 비추는 것은 배의 뒤편뿐. 유조선의 반신은 암흑 속에 갇혀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유조선이 파도에 흔들린다. p.7
이제 독자의 호기심에 대한 조금의 힌트가 나온다. 녹등은 깨지고 홍등은 숨이 멎었다. 선미등만 홀로 남아 배의 후미를 흐릿하게 비출 뿐이다. 아, 내 예상이 맞았어. 유조선이 지금 표류 중인거로구나. 왜 유조선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을까. 해적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등등의 생각들이 굴비 엮듯 나온다. 이제 주인공들이 등장할 시기다. 짜잔! 해적 등장!
일부분이 좋으면 아무래도 전체를 기대하게 된다. 이 작가, 글을 짜임새 있게 엮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걸까. 아니면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일까. 심사를 맡은 서영채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이십대의 대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솜씨있게 다루어낸다는 것 자체가 내겐 경이로웠다."
공감한다. 작가는 서두의 이 치밀함을 끝까지 끌고 간다. 소설을 덮고나서야 나는 아! 라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참 시원한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