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시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아니, 세상이 여전히 그대로인 게 이상하다. 나는 바뀌었는데, 세상이 그대로인게 당황스럽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다시 생각하니, 세상이 그대로여서 고맙다.

 

내가 바뀌는 잠시의 시간은 고작 1분일 수도, 한 시간일 수도, 하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잠시의 시간을 우리가 가지는 건 무척 어렵다. 그 잠시의 시간을 위해서 때론 1년이, 때론 10년이, 때론 평생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변하는 잠시를 가지게 된걸까.'변하는 잠시'.. 좋다. '변하는 잠시'가 있기에 변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잠시와 영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엔, 이 둘은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변하는 잠시'를 통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소리가 간혹 들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내가 얼마나 변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래 바라던 일 일수록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 변화 이전이 도리어 실감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다시금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판단을 전적으로 내가 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갑자기 부지런해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좀더 느리게 갈 확률이 크다. 순간과 영원이 같다면야 느리게 가는 발걸음이 더 빠를 수도 있게 되니까.

 

 

2.

 

퇴근 후 내 방에 들어온 나는 친구와 약속한 도선생의 <죄와 벌>을 펴들었다. 5월 1일부터 같이 보기로 했지만 미리 한 페이지를 들춰보고선 약간 실망을 했기에 호기심이 반감된 상태였다. 첫 페이지는 이랬다.

 

 

 

 

7월 초 굉장히 무더울 때, 저녁 무렵에 한 청년이 S 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듯 천천히 K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청년이 주인공인 듯한데, 세를 얻어사는 눈치다. 그렇담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이 아니고 '세입자로서 빌려 쓰고 있는' 이라든지, 그냥 세입자란 단어를 빼고 '빌려 쓰고 있는' 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님 혹시 골방의 주인이 따로 있고 이 골방을 세 든 사람이 또 따로 있어, 우리의 주인공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골방을 소위 말하는 전전세로  빌렸단 말인가. 하..러시아에도 전전세의 개념이 있단 말인가..그치만 골방 따위를 전전세로 빌릴 것 같지는 않은데, 책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그래도 전전세는 왠지 아닐 거 같다.

 

두번째로 실망한 건, 지명(도로명, 골목명, 다리명 등)을 약어로 지칭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책이든 외국 책이든 소설 류는 특히나 읽을 때 지명을 중요시하며 읽는 내 습성으로 봤을 때 이런 약어가 나오면 책을 조용히 덮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친구와 같이 읽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대충 읽어본 명작을 다시 제대로 정석으로 읽어보고픈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투정을 부렸더니 친구는 약어로 된 부분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아보는 재미를 가지라고 조언을 해준다. 내가 워낙 지도를 좋아라하고, 지도를 펴놓고 소설을 보는 스타일임을 익히 아는지라..

 

 

흠..그러지뭐. 내가 죄다 원래 도로명, 원래 골목명, 원래 다리명을 알아내고야 말겠어!! 불끈!

 

 

정자세를 하고 첫페이지를 다시 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옷매무새부터 남루했고 돈까지 없어서 휴학생 신분이었다. 그나마 과외도 끊겼고 집에서 근근이 붙이는 돈도 오지 않아 방값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요행히 팔아치울 물건은 있어서 노파가 운영하는 전당포에 들러 물건을 맡겼고 받은 돈으로 술집을 들렀다. 이때부터 라스콜니코프에게 쯧쯧..소리가 나왔다. 이놈이놈..20대 파릇파릇한 놈이 과외 좀 끊겼으면 노가다라도 해서 학비를 마련하든지 해야지. 벌써부터 전당포나 들락거리고..게다가 그 돈으로 술이나 퍼마시다니..

 

집에 돌아온 라스콜니코프는 전보를 받는데 이 전보 내용에 아..나는 감동을 했다. 우리나라 식 귀남이 신파와 비슷한데 아들 귀남이를 위해서 누이 후남이가 희생을 하고 엄마가 희생을 해서, 엄마는 삯바느질로 번 돈을 귀남이 학비에 보태고, 후남이는 싹퉁머리 부자집에 들어가 힘겹게 과외를 해서 번 돈을 귀남이 생활비로 보내고, 그 와중에 후남이는 추문에 쌓이지만 꿋꿋하게 견뎌내어 오해를 풀고 좋은 집에 혼담이 오고가고, 신랑 될 사람이 후남이를 위해 손을 써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둥, 우리 집의 보물 귀남아, 너를 위해서라면 우리들은 이 시련을 참을 수 있어, 괜찮아, 사랑한다 귀남아..식의 전보였는데 아직도 내 주위에는 이런 엄마(아빠)들이 많다. 사고뭉치 아들을 위해 늙은 육신을 아직까지 꿈지럭거리며 노동을 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주위의 엄마(아빠)들을 보면서 한심하면서도 그 애틋한 마음에 답답했는데 으매...러시아에도 저런 엄마가 있었단 말이지. 에이구..짠해라..

 

내가 두 눈이 크게 떠진 건 이 감동적인 전보를 읽고난 라스콜니코프의 반응부터다. 전보를 읽자마자 미안해하기는 커녕 분개해하는 라스콜니코프는 누이의 결혼에 반대표시를 하면서 그 이유를 열 개도 더 대며 조목조목 (혼자 속으로) 따지기 시작한다. 누가 법대 휴학생 아니랄까봐. 말은 잘한다. 머릿 속에서 생각이 타래처럼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누이에 대한 애정으로 인한 분개인지,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한 분노인지, 자신의 삶에 대한 슬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감정들이 뭉뚱거려지면서 엉뚱한 쪽으로 사건이 터지는데, 돈많은 전당포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죄목을 씌워버린 것이다.

 

돈이 너무나도 필요한 라스콜니코프.

돈은 많지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전당포 노파.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에게 후원해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고 있고,

노파는 자신의 사후를 관리해줄 무덤 관리자 등을 바라며 자신의 돈을 쓰려고 하고 있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돈도 아니면서 노파의 허투루 쓰는 듯한 돈에 분개해하고 있다.

그럴 듯한 대의명분까지 만든 라스콜니코프는 한달에 걸쳐 생각을 했고, 생각만으로 이미 죄의 굴레를 덮어쓴 듯 수시로 흠칫거리며 놀라게 된다.

 

노파의 살해는 꿈처럼 몽롱하게 이루어진다.

자다 깨어 꿈결처럼 길을 걷다 노파의 살해 시각을 정하고

또 자다 깨어 살해 도구인 도끼를 얻는 일이라든지 살해 후 집 앞에 사람이 있었음에도 운에 운을 거듭해 아무에게도 눈에 띄이 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든지.

그리고선 다시 잠에 빠지다 깨다를 반복하며 살인의 증거품들을 처리한다. 역시나 꿈인 듯이.

 

열과 오한을 반복하는, 이제는 살인자인 라스콜니코프의 불안한 마음은 읽는 사람을 역시나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덩달아 무서워져서 읽다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라스콜니코프의 저 살인도 '변하는 잠시'에 들어갈까.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절대로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텐데. 그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묘사는 너무 리얼해서 읽다가 깜짝깜짝 놀란다. 내 옆에 살인자가 있는 듯해서 자꾸 두리번거려진다. 이제 1권의 절반도 안 읽었는데 많이 무섭다. 친구가 각오를 하고 읽는다고 한 말의 이유를 알겠다. 근데 무서운데도 나는 오늘 밤에도 조금은 읽을 것 같다. 스스로 선택한 '변하는 잠시' 를 지나친 라스콜니코프의 이후가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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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5-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아내고야 말겠어!! 불끈!에서 그만 하하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사실 저도 좀 놀랐는데요, 고전문학에는 K시니 R거리 같은 표현이 없을 것같았거든요.
이런 걸 좀 현대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변하는 잠시'를 통해 변하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말씀에 참 공감되네요.
이렇게 평소 익숙했던 시간의 개념이 다르게 다가오는 거, 상당히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예요.
좋을 때도 있지만 꼭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고...
다만, 운명같은 뭐에 의해 불행하게 변한 적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무서운 책이지만 무사히 완독하시길..^^

달사르 2012-05-09 20:25   좋아요 0 | URL
이히히히히. 분홍신님, 알아냈어염!!! 이거 자랑해야는데, 빨랑 포스팅 해야는데 말이죠. ^^
제가 하도 갑갑해서 민음사 출판사 말구요. 열린책들 출판사 거도 질러버렸는데요. 거기도 K시니..로 되어 있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책들은 다 지명이 있었는데 말이죠. 아마 너무 지엽적인 지역이라서 그냥 이니셜로 하고 말았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나, 또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자의적으로 수정을 했나..생각 정도 하고 말았어요. 암튼, 나는 알아냈으니 말이죠. 힛.

넵! 변함과 변하지 않음. 이 부분이 저는 늘 궁금해요. '사랑'도 '우정'도 변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변하는 부분이 있어야하니까요. 그래야 자연의 성장 속도에 맞춰서 인간도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연의 여름처럼 인간의 여름, 자연의 가을처럼 인간의 가을, 그리고 다시 봄. 이 회전 속에 변하는 잠시와 변하지 않는 세계가 공존한다 생각해요.

맞지요. 좋을 때도 있지만 꼭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많은 거 같애요. 후자가 점점더 많아지는 것이 어쩜 인생일지도..

넵! 일단 한 번 다 읽었구요. 다시 한 번 더 읽으려구요. ^^

transient-guest 2012-05-3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쓴 리뷰를 볼때마다 난 뭘 쓰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에 좌절이...ㅋ
죄와벌은 후기 여러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대작이죠. 완독한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살인'을 전후로 하는 심리묘사이상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한줌의 귀족과 토호들 빼고는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던 제정 러시아의 비참함 같은거. 그나저나 '아들'하나에 모든 기대를 걸고 뒷바라지를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그렇단 말이죠...

달사르 2012-05-31 19:22   좋아요 0 | URL
이 리뷰도 정식 리뷰와는 느낌이 다르지요? ^^; 리뷰를 쓰다 쓰다 안되서 요새는 그냥 내 스타일대로 막 써버려요. 쓰다보면 대개 에세이 느낌이 나는 잡종리뷰가 되긴 하지만, 그래도 뭐.. (히히. 근데 트란님(애칭 괜찮죠?)이 잘 쓴 리뷰라고 해주시니 어깨가 으쓱으쓱. 하하.)

넵. 전 죄와벌이 '살인' 사건을 다룬 거라는 것도 모르고 읽다가 엄청 무서웠는데요. 후반부의 심리묘사는 무섭기도 했지만 몰입되는 부분이 있어서 후다닥 읽었어요. 트란님은 제정 러시아의 비참함 쪽까지 읽으셨군요. 책을 세밀하게 다시 읽어보면 저도 그런 부분 찾을 수 있을 거 같애요. 안그래도 한번 더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맞죠! '그놈의 아들'이 뭔지..그 아들을 위해 딸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 그것도 아주 기꺼이..성스럽게..희생하는 장면은 참..안좋더란 말이죠. 쩝..(참, 요새 러시아에선 이혼을 그야말로 밥 먹듯 한다던데 요새는 여성의 인권이 많이 올랐구나..싶어서,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더군요. 좀 이상한 말이긴 하다만..)
 

봄비가 종일 내린다. 올해는 벚꽃을 보러 가지 않았다. 아, 작년도 안 갔다. 제작년엔 갔던가..

이 봄비 멎으면 벚꽃이 다 질텐데..

 

올해는 풍성한 벚꽃 노래로 눈 대신 귀가 호강했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도 매일 들을 정도로 좋았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이런 날엔 말로의 음색으로 들어도 좋을 듯하다.

 

 

도입부의 흘러내리는 하모니카 선율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벚꽃같다.

몸이 그대로 악기 같은 말로의 음성 연주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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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5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탄하 2012-04-2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서재 한바퀴 돌아보고 난 소감, "야~호~!"
관심분야가 많이 비슷해서 참 반가워요(심지어 조카까지^^).
글 올리시면 또 쪼르르 놀러올께요.

달사르 2012-05-03 12:11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저 역시 분홍신님 서재 보고선 야~호~ 하고선 계속 들락거렸거든요.
아하! 조카! 조카 있는 이모는 행복한 이모라는 진리를 아시는군요. 히힛.

넵! 그래요. 저도 놀러갈께용~ 저도 이제 슬슬 한가해져서 서재에 자주 들어오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서재에서 자주 뵈어요~
 

 

 

 

너무나 오래도록 간절히 바라던 무엇이 눈 앞에 있다면 행복할까 슬플까. 그 무엇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면 또 어떨까. 얼마나 가지고 싶어질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서지우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나온 쌍꺼풀의 운명을 따라 살았다고 느낀다. 그의 쌍꺼풀은 단지 깊은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허랑하고 범박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였다.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쌍꺼풀'은 그리하에 육체에 깃든 그의 젊음을 시시각각 먹어치웠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놈의 '쌍꺼풀' 때문에 이미 중년이거나 장년이었다. 평생 그는 허당을 짚고 걸어야 했다. 칼 크롤로나 자크 오디베르티를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시의 독자성에 대해서도. 그러므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닌 죄의 심지였다.  p.34

 

 

작가 서지우는 20대 초반 자신의 영혼을 건드린 노시인 이적요를 오랜간 시봉했다.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시인의 손과 발이 되어 오랜간 보필했다. 서지우는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굴하고자 노력했고 노시인 역시 서지우에게서 그런 재능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둘다 알았다. 서지우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세상엔 노력해서 되는게 있는 만큼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노시인을 존경하고 그의 행동을 따라하고 그의 습관대로 살아도 노시인의 머리 속을 카피할 순 없는 것이다. 그의 시를 줄줄 암송한다고 그의 시 같은 시가 나오진 않는다. 그럴 때, 여지껏 했던 대로 습작을 계속 하면서 가슴 속 절망을 숨길 때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는 작품을 건네서 내 것으로 하라고 권한다면 어떨까. 내가 쓴 글은 아니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내 속마음을 고대로 글로 옮겨놓은 작품이라면. 10여년의 긴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서지우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작품을 건네주는 노시인의 소설을 받았고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얼떨떨하던 시간은 흘렀고 각종 인터뷰와 대담을 겪으며 서지우는 그 작품이 자신의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다음 작품, 다음 작품, 을 요구하는 출판관계자의 요구에 서지우는 어느날 도둑질을 감행한다. 어차피 같은 거짓말 아닌가. 어차피 내가 쓰려던 내용이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서. 물론, 재능이 없는 서지우를 도와주려는 마음 약간, 자신의 재능을 몰래 과시하려는 마음 약간, 시 이외의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싶은 창작자의 마음 약간이 고루 섞였던 노시인 역시 조금씩 변한다. 그 중심에 은교가 있다.

 

 

그를 가르쳐 좋은 시인의 길을 가게 하려고 마음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사람으로서 그는 미운 데가 별로 없었다. 순정이 있었고, 충직했고, 보기에 따라선 쌍꺼풀도 남달리 이뻤다.

그러나, 서지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멍청'했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 그에겐 그게 없었다.  p.69

 

 

 

서지우에게 왜 그것이 없을까. 그렇게 착하고 순하고 충직하고 열심인데 섬광 같은 그 하나가 왜 없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 역시 뜨끔했다. 최근에 읽고 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은유가 흘러넘치는 자서전을 읽고 내가 서지우 같다 여겼기 때문일까. 노시인의 발가락의 때 만큼도 능력이 없으면서, 심지어 서지우처럼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에 감탄만 하면 될 일을. 감탄을 넘어서는 안타까움이라니..인간의 이런 욕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만약 내가 습작의 시기를 오랜간 보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형편없는 작품에 절망하는 상황이라면 노시인의 작품에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노시인에게 은교가 치명적이듯.

 

 

아래는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보고 지은 시이다.

 

 

 

 

간밤 꿈에 시인의 육필 원고 두루마리를 주웠네
생생한 촉감과 두툼한 질감에 넋을 빼다 문득 깨고 보니
시인의 구절 한 자락 훔치지도 못한 등신이 눈을 끔벅이네


<훔치고 싶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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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4-2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마지막에 자작시인 거죠?
참 좋은 걸요.^^ [은교]에 작가가 인용한 시들도 전 참 좋더군요.
따로 모아보기도 했었지요. 영화도 기대하고 있어요.^^

달사르 2012-04-25 14:12   좋아요 0 | URL
히. 넵!
자작시가 먼저였고, <은교>를 읽은 건 최근입니닷. 그래서 서지우의 입장이 무척 이해가 되었어요. 네. 맞아요. 작가가 인용한 시들. 프레이야 님은 따로 모아보셨군요. 저도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시만 집중적으로 볼려구 생각해요. ㅎㅎ 저도 영화 보고픈데 이 시골에 저 영화가 들어올래나요~ 안 들어오면 도시 나가서 봐야되는뎅. 히히.

자목련 2012-04-25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훔치고 싶은 시, 정말 매력적인 제목이에요.
원작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고 하던데,
영화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책을 다시 꺼내볼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4-25 14:26   좋아요 0 | URL
아. 자목련 님. ^^
히..정말루 꿈을 꿨더랬어요. 꿈을 깨고나니 얼마나 아깝던지..저 시 한 구절만 훔쳤더라면, 어딘가에라도 투고를 해볼텐데..했지요. ㅋ

아. 그렇구나. 저는 보고는 싶은데 여건이 따라줄지 모르겠어요. ㅎ 자목련 님, 책을 다시 꺼내보시어요. 저도 한 번 더 볼 거거든요.
 

 

 

 곁에 없다고 칭얼거리는 나에게 그는,

 

곁에 없어서 더 소중하게 생각되나봐."

 

라고 말해주었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예약된 병원에 급히 가느라 읽던 책을 일터에 두고 왔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생각났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소중한 마음은 떨어져봐야 아는 법이지. 그 사람이든 책이든 뭐든지 간에. 병원에서 아픈 치료를 받는 내내 퇴근 전 잠시의 한가한 시간에 컴터에 옮겨놓았던 글귀를 떠올려보았다.

 

에.....시는..

    ...

     ...

        태어났다.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슬프긴 했지만 내 나쁜 기억력을 어쩌라고 뭐.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고 두 달이나 미뤄왔던 컴퓨터 수리를 맡겼다. 두 달만에 컴터를 켜본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화면이 켜진다. 문맹의 세계에서 문명으로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다. 내 블록을 들어와본다. 아까 옮겨놓았던 문구가 보인다. 아..이런 내용이었구나. 다시 읽어도 매력적이네.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쓸까. 내 마음에 살짝 구멍을 내어 솔솔솔 뿌려보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검색해봤다. 이 책을 알게해준 친구 덕에 러시아에 점점 매력을 느낀다. 몇 년 내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 앉아있어봐야지~ 상상에 행복해한다. 그동안 러시아어도 좀 배우고 말이지. 헤^^

 

 


 

 

 시는 이런 여러 흐름이 갈등하는 물결들 속에서, 그들이 유동하는 틈바구니에서, 보다 느린 흐름이 뒤로 처지고 그래서 쌓인 퇴적으로부터, 기억의 심오한 지평선 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격렬한 흐름을 이루었다. 사랑은 자연의 모든 것에 앞서서 태양과 앞을 다투며 달렸다. 그러나 비록 사랑이 어쩌다가 두드러지게 마음을 지배하기는 했어도, 우리 집 한쪽을 황금으로 물들이고 다른 한쪽을 청동빛으로 물들이며, 날씨르 다른 날씨로 씻어내고는 한 해의 네 차례 계절마다 무거운 문을 밀어 열었던 태양은, 거의 언제나 사랑과 경쟁을 벌이며 줄곧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멀찌감치 뒤안길에는 멀고 가까운 갖가지 감정의 자취가 유유히 뒤따르고는 했다. 나는 나의 내면이 아닌 곳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앙칼진 소리도 가끔 들었다. 뒤에서 소리가 뒤따라와서 나를 잡고는 두려워하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것은 박탈을 당한 하루의 일상으로부터 발현하여, 현실의 발목을 잡아 묶어두려고 하거나,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에 합류하여 생명을 숨쉬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시선에서 시적인 영감이 일어났다.

 

 보다 비창조적이고 곪아터진 존재의 조각들은, 밀려나간 머나먼 거리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생히 되살아나기도 했다. 생명력이 없는 사물들은 그보다도 더 힘차게 움직였다. 그런 대상은, 미술가들에게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표현의 수단인, 정물화를 위한 살아 있는 모델 노릇을 했다. 살아 움직이는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언저리에 쌓여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대조의 경계선이라고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테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로 하여금 움직이는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였다. 그들은 놀라움이나 공감을 전혀 강요하지 않는 저편을 갈라놓는 변경에 위치했다. 그곳에서는 과학이 현실을 구성하는 인자를 찾아내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한 세계에서 현실의 앞머리를 마구 낚아채어 끌어내서 제2의 현실로 끌고 가기도 불가능했으므로, 모든 대상을 똑같은 하나의 평면상에 놓고 상징으로 크기만을 가리도록 제한하는 대수에서처럼, 현실에서 외면으로 드러나는 바를, 상징의 형태로서 조작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런 상징은 내가 어려움을 벗어나는 하나의 수단은 될지언정, 자체로서 목적은 되지 못하는 듯싶었다. 목적이란 이미 살아버린 과거를 궤도에 올려놓고 인생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상징이 차가운 축으로부터 뜨거운 축으로 옮겨가는 변화라고 나는 벌써부터 파악했었다. 내가 얻은 결론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으며, 그때 내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상징에 변천을 씌워 흐려놓으려고, 인간을 상징으로서 취하고는, 그들이 타고난 환경에 상징을 배치한다. 그리고 우리는 변천, 또는 결국 변천과 똑같은 개념이기는 하지만, 본성을 취하고 - 그것을 우리의 정열로 뒤덮어 흐려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를 얻으려고 일상적인 대상들을 산문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음악을 얻으려고 산문을 시로 이끌어간다. 그렇다면 이것은 살아가는 인간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때마다 한 번씩 종을 치는 시계가 설정하는 것으로, 나는 그것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를 쓴 사람이다. 시인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 칭해지는 소설. 분명 예전에 읽었지만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의 하나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예전의 나는 은유나 수사 부분이 나오면 무조건 건너뛰고 읽었으니 제대로 기억해낼 리가 없지. 이번엔 다행히 제대로 읽었다. 아니, 너무 재미가 있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시인이 쓴 소설은 여기저기 잔뜩 숨어 있는 은유를 찾는 재미 투성이였다. <닥터 지바고>리뷰를 쓰기 전에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조회를 해보았고 몇 권의 책을 찾았다. 그중에 하나, 이 책. <어느 시인의 죽음>

 

나는 이 제목에서 언급하는 '시인'이 보리스 자신을 지칭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그가 존경했던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주말에 이 책을 다 읽을 작정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인해 윗 부분까지밖에 못 읽었다. 아직 그 '시인'이야기는 나오지조차 않았지만 위에 적은 저 부분만으로 이 책은 내게 충분히 의미가 생겼다. 나에게 희미하게 느껴지던 '시'의 이미지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통해 진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나는 어느날 충격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시의 정체에 대해 아직까지도 계속 의아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예를 들면,

 

 

왜 시는 느닷없이 다가오는지. 사랑처럼 말이다. 왜 시는 충만한 느낌으로 불현듯 와서 썰물처럼 일시에 사라지는지. 사랑처럼 말이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이다. 아직 앞부분만 읽었지만 시인이 쓴 자서전은 어려운 내용이 잔뜩 적혀있는데도 그냥 다 알아먹겠는 말로 바뀌어 읽히는 느낌이다. 쉬운 글인데 도통 이해가 안되는 글도 있지만 반대로 어려운 내용인데도 바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아주 긴 시'이기 때문일까. 시는, 읽는 사람의 살아온 이력에 따라, 읽는 사람의 고뇌의 지점에 따라, 읽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읽힌다. 심지어 같은 사람인 경우라도 다음에 다시 읽을 경우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내가 지금 집중하고 싶은 건 마지막 부분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인 경우에조차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달라지게 만드는 시의 정체. 그 시의 탄생이 궁금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의 궤적을 이제 날이 밝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동안(이틀동안?)  그리움이 조금 쌓인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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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2-04-23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저는 시를 모르는 인간입니다만... "그리고 우리는 시를 얻으려고 일상적인 대상들을 산문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음악을 얻으려고 산문을 시로 이끌어간다. 그렇다면 이것은 살아가는 인간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때마다 한 번씩 종을 치는 시계가 설정하는 것으로, 나는 그것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저는 결국 예술도 모르는 거였어요!

달사르 2012-04-24 12:39   좋아요 0 | URL
아. 팝님. 이 부분은 제가 일부러 진하게 안 칠했어요. 숨겨놓은 보석처럼 말이죠. 팝님이 이 부분에 끌리셧군요. 히. 저도 이 부분이 참 좋았어요. 시와 산문과 음악, 그리고 예술은 모두 한 몸이다. 이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끌어들이고 이끌어가는 관계라는 보리스의 관점에 푹 빠졌어요. ^^

ㅎㅎ 시도 모르고 예술도 모르는 우리지만 그래서, '알아가는 재미'라는 걸 또 우리가 선물받는 것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으로 시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예술도 느끼고 하는 거 같애요. <은교>의 이적요 시인처럼 천재적인 감성과 직관은 없더라도 말이죠. 아..그치만, 그네들의 직관은 정말루 부럽기 그지없어요.

다락방 2012-04-23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저는 시를 모르는 인간입니다만...2

멋져요, 달사르님.
:)

달사르 2012-04-24 12: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방금 다락방님네 가서 다락방님의 멋진 시를 한 편 봤습니다만...

멋진 시나 작품을 읽고 나면 그 감흥으로 창작에의 욕구가 솟구치는 걸 가끔 느끼곤 해요. 그렇다고 대단한 작품이 나오거나 하진 않지만 그런 욕구가 생기는 거 자체가 기분이 좋아요. 알라딘에서 그런 창작 작품을 접하는 것도 저에겐 큰 흥분이구요. 그런 의미로 말인데요. 제가 다락방님 시의 팬이라는.. ^^

비로그인 2012-04-2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저는 시를 모르는 인간입니다만...3

오랜만에 오셨네요, 달사르님! 인용된 부분도 이 글도 무척이나 아름다워요. 저는 요새 자꾸 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는데 아마 이런 글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아직 시를 모르고 또 예술을 모르고 어딘가 모르게 껍질로 꽁꽁 묶여있으니까 자꾸만 쓰고 싶고 지우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굿바이님 서재에 들렀다가 '목련 통신'을 읽고 아주 감탄했더랬죠. 그런 감성이 참 아름다워요.

그동안 이래저래 일이 많으셨나봐요. 컴퓨터도 고장나고... 문맹의 세계를 다녀오시고... 그런데 병원은 무슨 일로... 어디 아프신 건가요? ( '')


달사르 2012-04-24 19:00   좋아요 0 | URL
넵! 말없는수다쟁이님. 컴터는..어제 또 고장났네요.ㅠ.ㅠ 왜 자꾸 고장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또 한 두달간 쉬었다 고쳐야되나 컴터 바꿔야되나..생각중입니닷. 병원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소개루다..히히힛.

말없는수다쟁이님의 그 마음, 저도 이해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저는 지우고 싶은 마음이 많은데도 꾹 참고 있어요. 글은 일단 지우고나면 아주 후련하잖아요. 아..개운해~ 처럼요. 대신에 허전함 또한 책임져야되는데 그 허전함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저는 마음만 먹고 아직까진 못 지우고 있어요. 헤. 말없는수다쟁이님도 계속 글을 쓰고 또 쓰다보면 보리스의 윗 글처럼 아름다운 글이 나올 거예요. 팟팅! <목련통신>. 제목부터 근사합니다. 저도 찾아서 읽어볼게요.
 

대금 수업을 들었다. 월요일 오전에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화요일부터 하는 대금수업을 같이 듣지 않을래? 친구의 급작스런 문자에 1분 가량 고민하고 오케이했다. 수업을 듣는 곳은 문화예술회관이다. 약국에서 걸어서 가자면 30분을 너끈히 넘기는지라 택시를 타고 갔다. 늘 친구가 약국으로 찾아왔고 한동안 수다를 떨다가 갔기에 친구의 일상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택시를 탈 때부터 생각이 저절로 되었다. 차를 잘 타지 못하는 나는 항상 뒷좌석을 탄다. 폐문을 하고 나오니 친구는 이미 택시를 잡아놨고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나도 같이 뒷좌석에 타려고 뒷문을 열었는데 친구가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아니 친구의 손짓 이전에 이미 내 눈이 보았다. 뒷좌석은 친구의 목발 한 쌍이 자리를 꽉 채워 내가 탈 공간이 없었다. 뒷문을 닫고 앞좌석에 탔지만 가슴에 이상한 느낌이 스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회관에 도착 후 계산을 하고 택시에서 내리고 차문까지 닫았는데 친구는 아직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친구가 앉은 뒷문을 열어주었고 하체에 힘이 없는 친구가 팔의 힘과 엉덩이의 힘으로 목발을 잡고 힘겹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회관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친구는 목발을 한 쪽씩 차례로 다음 번 계단에 올린 다음 다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친구의 걸음은 한 살박이 아기의 아장아장 걸음보다 늦었고 친구의 옆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의 정체에 대해 낯설어했다. 회관에 도착한 우리는 등록을 하기 위해 3층의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친구와 같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들어가야되는데 들어가지 못했고 문이 닫혔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되는지 친구가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되는지 판단을 하지 못해서 당황했다. 기계치여서 내가 먼저 들어갔다가 친구가 미처 들어오기 전에 문이 닫겼는데 내가 열림버튼을 찾지 못해 친구가 문 사이에 끼일까봐 두려웠다. 친구는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빨리 닫히지는 않는다고 말을 해준다. 다시 문이 열렸고 과연 나와 친구가 모두 탈 때까지 문이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 켠은 여전히 불안하다.

 

3층의 사무실에선 수강신청을 나중에 한다며 엘리베이터를 다시 내려가서 연습실로 가라고 말을 한다.

"사람을 힘들게 오라가라하고 말야."

나도 모르게 투덜거린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한 칸 밑으로 내려간 뒤 회관 본관의 넓은 홀을 지나쳐 뒷쪽으로 난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회관은 5층 건물이었고 연습실은 옥상이었다. 빨리 가면 1분이면 올라갈 거리를 친구는 10분에 걸쳐 올라갔고 난 중간에 친구가 혹시 넘어질까봐 불안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어야될지 몰라 당황했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게 친구에게 제일 편하겠다 싶어 이런저런 농담을 시작했고 친구 역시 농담을 받아치면서 한 계단씩 올랐지만 마음속에 빈 공간이 커져가는게 느껴졌다.

 

'아. 친구가 말했던게 바로 이거였구나.'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나는 친구와 친하지 않았다. 나는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며 놀기 바빴고 친구는 발레를 하느라 조용하게 지냈다. 일년에 몇 번 있는 축제를 할 때면 친구는 아주 어른스러운 화장을 하고 발레를 선보였고 코흘리개 우리들은 두근거리며 친구의 발레를 구경했다. 중학교는 같은 중학교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정도로 지나쳤고 고등학교부터는 정말로 얼굴 한 번 못보고 얼마전까지 지냈다. 약국에 왠 여자가 목발을 짚고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도 나는 친구를 몰라봤다.

 

"친구야. 소식 들었어. 고향에 약국 차렸다며. 진작에 왔어야 하는데 이제사 와본다. 나, 초등학교 동창인데 혹시 기억하니?"

 

기억못했다. 통틀어 대화 열 마디도 안 해봤을 정도의 친구를 기억하겠는가. 한 반이 되었던 적이 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나인데. 그렇지만 내 소식을 듣고 먼저 다가와서 나에게 아는 척을 하는 친구가 신기했다. 친구 생각에도 우리가 친하지 않았던 사이라는걸 알텐데, 나를 찾으러 왔을 땐 친구는 분명 용기가 많은 쪽이었다. 기억 속의 새침한 인상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현재의 친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같이 밝게 웃으며 매대를 나와 친구 옆에 앉았고 친구와 대화를 했다. 친구 옆엔 휠체어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약국엔 갖가지 사연으로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친구의 목발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디서 삐끗했겠거니. 접촉사고라도 났겠거니.

 

대화 끝에 무심히 친구에게 물었다.

"물리치료 받는 중이니?"

친구는 대답했다.

"아니. 이제는 물리치료는 더이상 받지 않아."

"아. 그래? 이제 다 나아가는거야?"

"아니. 이제 더이상 낫지 않아서. 그래서 물리치료가 필요없어. 가끔 상처가 곪을 때 병원 치료를 받기는 하지."

대화가 서로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는지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실은..나. 예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 스물살 초반에.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목발이 내 다리야."

"그렇게 오래전에 사고가 났었어? 나는 몰랐어.."

 

친구는 그 뒤로도 종종 약국을 들렀고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많이 분발하고 하더라. 나처럼 이런 몸을 하고도 공부하러 다니고 뭐 배우러 다니는걸 보면서 멀쩡한 몸을 가진 자기들이 보고 배워야한다고 말야. 너도 그런 의미로 나와 대화할 때 뭘 배우고 싶다고 말을 하는거지?"

친구의 뜬금없는 말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생각나는대로 말했다. 그때 나는 스포츠마사지를 배우고 있었다.

"아니? 난 내가 그냥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건데? 내가 배우는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너는 그냥 내 친구지. 뭘 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 친구 아니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래나. 몰라. 암튼 나는 너를 보고 아무 생각도 한 적 없는데."

친구가 얼굴이 붉어졌다. 친구는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을까. 사람들이 친구에게 그런 말을 은연중에 많이 했던걸까.

 

 

계단을 오르는 10분동안 갖가지 생각들이 반추되었다. 친구의 힘겨움이 몸으로 느껴졌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움도 같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한다는 친구의 대단함의 의미도 이해되었다. 이런 멋진 애가 내 친구구나, 라는 자부심이 어딘가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나는 있지. 지난 해에 가야금 수업도 이렇게 들었어. 난 수업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지. 아주 착실하게 들었어."

나는 수업을 착실하게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뭐든지 듣다가 중간에 농띵이를 몇 번은 부려야했다. 착실함은 나와 거리가 아주 먼 단어였다.

"나도 한 번도 안 빼먹을께."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미처 머리가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다. 자신은 없다. 오늘만 해도 약국 일에 지쳐서 갈까 가지 말까를 몇 번이나 망설였던가. 친구가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첫 날부터 수업을 제꼈을거다. 입에서 먼저 나오는 말들은 후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은 머리보다 입이 더 기특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는 듯하다. 친구의 성실성 덕분에 나도 덩달아 성실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엔 불도 켜놓지 않아서 깜깜하다. 다른 수강생들은 어디 있는지 그 10분의 시간 동안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친구의 이마엔 진작부터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친구의 땀방울을 닦아준다. 친구는 간만에 하는 운동이라고 계단오르기의 유익성에 대해 말을 쏟아낸다.

 

드디어 계단의 끝이 보인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보았다. 차가운 바깥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친구의 땀방울에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친구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친구는 최근에 비정규직으로 관공서에 채용되었다.

"빨랑 돈을 모아야지. 돈이 모이면 나는 해외여행 갈거야.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도 들르고, 영국도 가고, 죄다 가볼거야."

친구가 이 말을 지키는 여자라는 걸 왠지 알겠다. 저 머나먼 타국에서 친구가 보내오는 엽서를 받아드는 날이 언젠가 꼭 오리라. 옥상에 가건물로 세운 연습실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오늘은 우리의 첫 수업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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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2-03-0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 모두를 격하게 응원할 수밖에 없어요. 뭉클합니다.

달사르 2012-03-08 22:11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응원 캄사요~ 오늘도 연습하고 왔어요. 히.
오후에 피곤해서 갈까 말까를 열 번이나 반복했는데 결국 데리러 온 친구와 손잡고 같이 가서 배웠어요. 갔다오고나니 하루가 왜이렇게 뿌듯한지요. ^^

다락방 2012-03-0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도 멋지지만 글로서도 멋지네요. 어디에 먼저 감탄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우리의 첫 수업날이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글이 참 좋으네요. 그러니까 글이 멋져서 내용이 멋진건지 내용이 멋져서 글이 멋진건지, 그것들이 상호보완작용을 한 건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좋은 것들인지, 여튼 정말 멋진 글이에요.

:)

달사르 2012-03-08 22:25   좋아요 0 | URL
느낌이 왔을 때 순식간에 휘리릭 쓴 글이 제 마음에도 더 오래 남아있는거 같애요. 진심이 좀더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느낌 때문일까요. 오늘은 두번째 친구와 동행이어선지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친구의 목발에 신경이 계속 갔어요. 근데 수업 시간 접어드니 서로가 좀더 잘 불러야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불러제끼느라 정신이 홀딱 빠졌더랬어요. 수업 끝나고나니 목발에 더이상 신경이 가지 않아서 한결 홀가분해졌구요.

그러니까 친구의 목발은..친한 친구가 소개해주는 애인과의 첫 대면이 서먹한 것처럼, 그런 느낌인가봐요. ^^

하늘바람 2012-03-0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금 수업 멋지네요 말만 들어도요

달사르 2012-03-08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늘바람님.
넵! 대금소리가 이렇게 멋있는 소리인줄 몰랐어요. 테레비에서 들리는 소리로 내지는 시디 소리로만 듣다가, 아주 가아끔 공연으로 듣다가, 실지로 눈 앞에서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대금 소리는 말이죠. 정말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렸어요. 그것도 높거나 새된 소리가 아니라 편안하게 대화하는 소리 말예요. 아직까지 구슬픈 소리를 느끼는 정도까진 못갔구요. 그저 편안하던데요. 헤헤.

2012-03-12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도 멋지고 글도 좋고 달사르님도 멋지셔요. 대금수업 화이팅입니다~!^^

달사르 2012-04-04 19:1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섬님.
바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3월에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서 더 바빠 버렸네요. 대금수업도 그래서 몇 번이나 빠졌답니다. 흑..이제 4월 접어들면서는 농띵이를 안 부려야 되는데 말이죠. 친구는 저보다 열씨미 수업을 듣고 있어요. 역시나 은근 짱인 친구더군요. 히.

섬님의 블록에서 본, 고향집에 만들어놓으신 책 선반이 제 마음에 쏘옥 들어서요. 제 방도 그렇게 운치있게 꾸몄으면 좋겠다..생각을 하곤 했어요. 근데 제 방은 너무 작아서 말이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