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났다.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간이역에서 환승기차를 기다릴 때의 풍경은 미리부터 눈이 시려오는 예감을 품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각자 제 갈 길을 떠날 사람들이 잠시 모여있는 간이역엔 그 흔한 자판기도 없다. 전봇대처럼 우뚝 솟은 기둥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차량 번호판 앞에 서 있었지만, 그러나 기차는 한참 일찍 정지했고 우린 우리 번호판의 차량을 찾아서 뛰어야 했다.
환승기차 안은 고즈넉해서 기차바퀴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리 뒷좌석엔 엄마와 아기가 타고 있었고 엄마는 아기에게 조용조용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우린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낯선 역에 내린 우리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다. 하늘에 박힌 해는 열기를 지상에 고스란히 뱉었고 우리는 통구이라도 좋다며 역 밖을 나왔다. 생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의 어깨를 스치며 거리를, 거리를 걸어다녔다. 교차로 한 귀퉁이가 훤해서 쳐다보니 공원이다. 공원 입구는 산을 깍아내려 절벽처럼 되어 있었고, 꼭대기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니 한 눈에 들어온다. 개략의 위치를 잡은 우리는 내려와서 다시 걸었다. 가보마, 했던 곳을 가던 중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지명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을 물어보려는 나를 친구가 제지한다.
"묻지 마"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한 쪽은 도로가 넓게 뚫렸고 높은 아파트가 줄을 지은 신도시였고 반대쪽은 오래된 허름한 집들이 단층으로 모여있는 옛집들이었다. 우린 옛집들 거리로 걸었고 조금 걸으니 나즈막한 구릉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친구가 먼저 그 길로 들어섰고 나도 따라 걸었다. 지도팻말이 있었고 지도상으로 목적지는 아주 멀어 보였고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되는 듯했다. 목적지를 포기하고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얕은 구릉지에 드문드문 무덤들. 여러군데서 올라올 수 있게 만들어놓은 나무계단들. 구릉지 바깥쪽으로 구릉지를 보호하듯 밀집해있는 대나무들. 어린 죽순은 대나무 숲을 벗어나 나무계단 근처까지 진입을 해서 낯선 객의 시선을 끌었다. 조금 걷다가 보니 잘하면 이 길이 목적지와 연결될 수도 있겠다, 란 생각이 들었고 우린 모험을 계속 하기로 했다. 구릉지 여기저기엔 마을 청년들이 앉아서 쉬기도 했고, 어른들이 죽순을 캐기도 했으며, 노인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작은 돌길을 걸으며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물었으면 이 길을 못 찾았을 거야."
옛날 선조들이 걸었음 직한 옛길을 걸으며 나는 묻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금 갑갑하더라도, 시간에게 기다림을 주는 것이 어쩜 새로운 길로 인도해주는 삶의 비밀스런 방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