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세계사 서양미술편& 읽다 만 책 뽀개기 2~ 그랜드투어(설혜심작가님)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을 보면 배경이 특이할 때가 있다. 분명 여름 한복을 입고 계신데, 배경은 눈 오는 산이라던가, 누가 봐도 어색한 벚꽃 나무 그림아래서 양산을 들고 찍은 사진이라던가. 그 당시 사진관에는 커다랗고 조잡스러운 그림 몇 장을 배경삼아, 그렇게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눈 오는 산에도, 벚꽃 날리는 그 곳에도, 야자수 우거진 머나먼 섬에도 가본 적은 없지만, 다정히 어깨를 맞대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나마 꿈을 꾸는 것.
그런데 유럽에도 이런 그림들이 유행했다고 한다. 사진이 나오기 전 “베투타”(이탈리아어 veduta는 영어로 view)라고 불리는 그랜드 투어의 인증샷!
주로 부유한 귀족들이나 상인들의 자제들에게, 그리스와 로마 여행은 교양의 필수코스였다. 요리사와 가정교사에 전속화가까지 대동하고 가는 요란한 행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속화가까지는 무리였나 보다. 몇 년에 걸쳐 서양문명의 요람들을 돌고 오는 여행, 엄청난 경비가 든 만큼 뭔가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베투타” 그 중에 특히 안토니오 카날레토는 베투타의 독보적 화가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좋은 것은 다 그려줬기 때문이라고.
대성당과 곤돌라와 조각 등 좋은 것들은 다 모아 마치 합성사진처럼 그려준 것, 그리고 그 중간에 그랜드투어의 주인공이 사색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나중에는 배경을 다 그려놓은 뒤, 사람얼굴만 그려넣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그랜드투어를 다녀온 이들끼리 “딜레당트협회”를 만들었고, 그들은 이런 그랜드투어의 베투타앞에서 서로의 추억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랜드투어를 가지 못한 사람들도 은근슬쩍, 카날레토에게 그림을 주문했고, 화가는 눈치껏 성의있게 상상의 베투타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에케 호모 ( 이 사람을 보라)로 유명해진 귀도레니,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유럽사에서의 정형화된 예수상을 완성했다. 푸른 눈에 높은 코와 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실제 중동 출신인 예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당시 유럽인들의 마음엔 쏙 든 모양이다. 그 이후 예수의 모습은 좀처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탕달이 심자박동이 빨라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는 그림이 바로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젠치>이다.
“스탕달 신드롬”을 낳은 베아트리체 첸치는 비운의 인물로도 유명하다. 워낙 아름다워 미모에 대한 칭송이 드높았던 베아트리체는 친부 첸치백작에게 14세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계모와 오빠의 도움으로 백작을 망치로 때리고 실족사로 위장했지만, 첸치의 재산에 탐이 났던 교황의 집요한 고문으로 결국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베아트리체는 사형을 당한다. 사형장에서 급하게 귀도 레니가 스케치한 그림이다. 사형장으로 가는 그녀의 얼굴이 마냥 슬프거나 비통해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한 앳띤 얼굴이, 그 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22살 “천사의 다리”에서 참수당한 베아트리체, 그러나 그 “천사의 다리”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헵과 그레고리 펙이 키스한 로맨틱한 장소로 유명해졌다. 그 전에는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던 곳이라고 한다.
오로지 눈빛, 그리고 그 눈빛 속의 불안과 공포와 경계, 불안이 가득했던 실레의 인물들.
그리고 르네상스 3대 화가 중 잘생긴 걸로도 유명한 라파엘로, 그의 연인은 빵집 딸인 마르게리타로, <아테네 학당>의 히파티아(이집트 여성 수학자)로 그려져 있다. (아무리 해도 그림이 자꾸 눕는다 ㅠㅠ)
카라바조의 전속모델인 필리데 멜란드로니는 로마의 매춘부였지만. 카타리나 성녀로, 유디트로 막달라 마리아 로 그려진다. 그녀의 포주였던 토마소니와 싸우다 카라바조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다양한 화가들의 뒷이야기 뿐만 아니라, 미술용어와 시대사조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퍼레이드를 할 때, 그 마차에 꼭 노예를 함께 태운다고 한다. 그리고 온갖 환호와 찬사를 받는 개선장군옆에서 계속 나지막하지만 들리게끔 “메멘토 모리”를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한다.
온갖 진귀한 것들을 그려 부를 과시했던 네덜란드의 정물화에, 꼭 불안정한 접시나 시든 꽃 등이 그려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네덜란드 정물화보다 더욱 더 부를 과시했던 “그랜드 투어”가 생각났다. 읽다가 만 책,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읽다가 다른 소설책 보면서 깜박 한 책?
그랜드투어를 통해 영국과 유럽의 18세기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종교분쟁도 정리가 되고, 경제적 풍요도 누리게 되면서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이 유럽으로 떠나, 외국어와 세련된 취향, 거기에 감식안까지 배워오길 꿈꾸며 몇 년을 계획삼아 보내는 “그랜드투어”는 진정한 상류층의 과시였지만, 그것만으로 보기엔 영국의 예술과 문화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그랜드투어를 통해 유럽의 상류층들 사이에서 동질감을, 그리고 계몽사상의 전파와 예술과 건축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먼저 그랜드투어는 리처드 러셀스가 <이탈리아 여행>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유럽에선 “영국인들의 대륙침략”으로 불릴만큼, 영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시조격은 16세기 필립시드니로, 18살에 외교관으로 필요한 자질을 배우고 훈련을 하기 위해 떠난 것으로 엘리자베스여왕이 비용을 댔다고 한다. 말 4필과 하인 세 명, 말동무이자 비서격인 컴패니언 한명(이탈리아 혼혈)을 대동하고 떠났으며, 효과가 컸다고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월싱엄이 맞아 그를 도와주었는데, 이 월싱엄이 스파이, 정보력의 대가로 영국의 007이나 M16의 초석을 세운 이라고 한다. 필립 시드니는 외모도 뛰어나고 스파이로서도 뛰어났지만, 일찍 요절했다고, 그의 그랜드투어 경험이 실린 글들이 <유익한 가르침>이란 책으로 편찬되며 문필가로도 이름을 날린다.
그랜드투어 이전 서양 최초의 여행자로는 헤로도토스를 꼽는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여행자가 있었으나, 그들은 주로 군사 선교 등 다양한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것이고, 헤로도토스는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해 여행을 한 것으로는 처음 기록된 이라고 한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역사>를 썼다고 한다.
고대에는 주로 온천으로 가는 치유여행, 휴가여행등이 있었으나, 중세에 들어서면서 금욕주의와 교역의 쇠퇴, 그리고 토지에 속박되면서 여행의 자유도 사라졌다. 그러나 여행하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꼼수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순례” 합법적 여행으로, 주로 예루살렘이나 로마,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였다고 한다. 특히 산티아고는 야고보가 순교하면서 유언에 따라 유골을 이곳에 모셨고, 성주가 모시기로 하자 성주의 몸이 조가비로 덮혔다고 한다. 그 후 산티아고 순례의 증거로 조가비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순례단의 단체여행이 성행했는데 지금과 아주 유사한 모습이라고 한다. 경비와 해적이나 도적 만날시 내야하는 위험비 등 이 경비로 계산되었고, 질병등으로 순례를 가지 못할시에는 대리 순례꾼을 고용했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종려나무 가지를 증거로 가지고 가야 했다고 한다.
중세 말에 들어서면서 자유의지로의 여행이 늘어났고, 그 계층은 주로 기사집단이었다고 한다. 땅을 상속받기 힘든 차남들이 무장을 하고 자유롭게 여행했고, 여기서 기사문학이 발달하게되었다. 더불어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탐험가들의 여행도 활발해졌다.
중세에는 의심과 눈총을 받아야 했던 호기심이, 15세기 들어서면서 인간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호기심의 시작은 바로 여행, 탐험가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여행과 독서는 교육을 위해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16세기 휴머니즘이 도입되면서 내 나라 알기가 영국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주로 나라안의 문화유산답사 여행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장된 것이다.
유럽의 소국으로 열등감을 가졌던 영국이 가장 먼저 발전했고, 또한 종교적으로 가톨릭 국가 여행을 막았던 제재도 종교적 갈등의 완화로 누그러졌다. 엄청난 부를 쌓은 귀족과 상류층 젠트리 계층들은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낡은 공교육에 대한 실망도 한 몫을 차지했다. 또한 불륜의 장소, 여인들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들의 짐에는 침구부터 이쑤시개통, 각종 약, 향신료에 자물쇠 등 온갖 것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벨링턴 백작은 트렁크만 878개였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부터 자식까지 모두 그랜드투어를 떠났지만, 아들은 안타깝게 로마에서 사고로 사망한다. 괴테 또한 불한당에게 권총으로 위협당해 돈을 빼앗겼는데, 그 불한당이 경찰이었다고 한다. 미술사가 빙겔만 또한 강도에게 피살당한다.
“독일에서는 군인, 이탈리아에서는 산적, 프랑스에서는 늑대, 지중해에서는 해적”을 조심하라는 것이 당시의 표어였다. (69페이지)
주로 루트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독일등에서 다시 파리, 그리고 영국이었다고 한다.
파리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
프랑스 최신 패션으로 옷 사입기
프랑스 토박이 하인 고용
숙소를 호텔 또는 아파트로 정하게
오페라관람, 연회, 베르사유, 박물관...
시간이 되면 알프스 넘어보기 (영국 수상 로버트 월풀의 아들은 알프스에 갔다가 굶주린 늑대가 애완견 토리를 잡아먹었다고. 지독한 휘그당 지지자로 애완견 이름은 왜 라이벌 정당으로 한 걸까?)
아버지에게 편지쓰기
동행교사 골탕먹이기
여자 사귀기
술, 도박 해보기
간혹 공부하기
그랜드투어를 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아마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 68명의 안내인을 거느렸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영국인들은 이탈리아 음식에 굉장히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인들의 다양한 식재료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랜드투어의 목적은 교육과 외국어 습득, 고급스런 대화를 위한 풍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대화의 스킬이 중요했는데,
논쟁하지 마라, 특히 종교같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듣고 스스로는 적게 말하라
자랑을 해서는 안 되지만 자학적인 발언도 하지 마라
한 가지 주제만 계속 이야기하는 인간은 마치 전염병과 같은 인간이다. (151페이지)
뭔가 지금도 통용되는 대화의 스킬같다.
결국 주목적은 영국에서 엘리트가 되고, 엘리트로 행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허세와 과시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영국의 조지왕과 부인이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를 보고 싶어, 조파니에게 그려오라고 하자, 그 당시 피렌체에 있던 그랜드투어 여행객들이 그림에 들어가길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조파니의 그림 또한, 더욱 풍부해 보이기 위해 우피치 갤러리에 없는 것도 그려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파니의 그림, 카프라치오의 그림 등이 바로 그랜드투어의 인증샷인 것이다.
오페라와 음악도 건너갔다고 한다. 특히 디바의 인기가 높았고, 카스트라토의 인기 또한 높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파리넬리, 그의 본명은 카를로 마리아 미켈라젤로 니콜라브로스키이다.
아리아를 합창하고, 꽃과 수건을 던지고, 좋아하는 성악가가 나오면 괴성을 질렀다고 하니, 지금의 콘서트장과 분위기가 비슷했던 거 같다.
유명한 동행교사로는 로크, 홉스, 존 무어, 애덤 스미스 등이 있다.
주요 기념품으로는, 담배통이나 값비싼 불법적인 예술품들, 책들, 그리고 피라네시(피라네시의 영향을 에셔가 받았고, 오징어 게임의 계단 등은 에셔의 영향을 받았다.)의 동판화 등이 인기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게 된 젊은이들은, 돌아와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부모와는 거리가 멀고, 외국생활 등에서 배운 방탕한 행동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유길준 또한 외국물 먹은 개화인들에 대해 비난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교양인으로 거듭나며, 영국의 건축과 예술, 음악 등 다양한 면에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철도 등이 발달하면서 고급스런 그랜드투어는 막을 내리고 관광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랜드투어의 전통을 그 당시에는 미국인 부호들이 계승했고 그 중엔 이디스 워튼 같은 문인도 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여행자를 광명을 나르는 자라고 했다. 새롭고 참신한 여행에서의 경험들을 듣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러니 여행자의 말엔 은근히 과장이 섞이기도 하고 허영과 거드름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런 반면에 새로운 여행에서 배운 경험과 사색을 책으로 혹은 다양한 예술활동으로 풀어나가며 많은 이들에게 광명을 준 이도 있다.
얼마 전 김혼비의 산문집에서 단체관광객을 비하하는 누군가의 블로그 글을 발견하곤(마침 김혼비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이들이었다고 한다), 씁쓸해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당시 상류층들도 그런 단체 관광객들을 우루루 몰려다니며 교양이라곤 없는 이들이라며 폄하했고, 교양없는 그들의 여행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는 거 같다. 그 길에 서서, 그 곳의 건물과 조각을 보고, 노을 진 언덕을 오르는 이들. 여행에서의 기쁨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각자의 가슴에 품은 감정만큼 느끼고 행복하면 되는 것, 지식의 양만큼 행복한 것은 아니다. 여행지에서조차 편협한 이들이 오히려 그들을 못마땅해하느라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한 체, 허영만 가지고 돌아올뿐이다.
(그랜드투어를 통해 알게 된 18세기, 아주 흥미로운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