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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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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모두 다른 공간, 다른 시간, 다른 세계, 각자의 우주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는 어쩌면 폴 오스터의 말처럼 의지와 개인노력과는 별개로 피할 수 없는 우연의 힘으로 삶을 결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연의 마주침은 사랑이 되기도 하고, 결정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저 스쳐 지나간 우연이지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무언가를 갈망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우연 속에, 각자 다른 소우주들이 만나 새로운 우주와 미지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사랑하고 연대하고 인정하고, 그래서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이야기.
다르지만 달리 보지 않는다.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잘 풀어나간다. 다르다는 것, 이 우주의 먼지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의 다르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계와 결함을 갖고 태어난 라이오니 사이의 그리움과 기다림, 타인이 보기에 결핍으로 태어났으나 결핍을 확장으로 바꿔나가려 하는 마리의 춤, “잘못된 지도”로 설계도와 달리 만들어진 몸으로 고통을 안고 살아가며 신체의 변형이나 증강을 원하는 이들.
행성의 시간을 나눠주는 오브들.
시간의 흐름이 달라져 버린 언니 이야기.
격자틀 속에 담긴 인지 공간.
이 소설집은 내겐 따뜻한 동화로 다가온다.
그저 순수한 이야기,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 이야기다. 신이 되려고도 영웅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 이야기다.
(누군가 용기내어 내게 웃어줄 때, 우리 또한 용기 내어 웃어주자. 비록 오징어 머리에 문어다리의 외계인이라도. 에어리언처럼 생겼다면? 도망치자, 그런데 에어리언이라면 웃음보단 침부터 흘리지 않을까
우리는 멸망의 현장으로 떠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에 이끌린다. 로몬들은 유능한 유품정리사이자, 멸망의 단서를 탐색하는 1급 수사관이다. 행성 하나의 생태계가 삶과 죽음의 순환 위에 세워져 있듯이 죽음의 순환을 우주 전체로 확대해보면 멸망의 가치가 드러난다. 어떤 죽음은 다른 삶을 지탱하는 것이다. 우리는 멸망한 폐허에서생의 온기가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여 우주의 다른 공간으로 보내며, 그로써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은 조금씩 유예된다. 로몬이 대부분 거대한 회수선을 능숙하게 다루며 복잡한 회수 장비들에 익숙한 것, 터널드라이브에 잘 견디는 신체를 가진 것을 두고 다른 종족들은 우리를 유능한 회수인이라고 일컫지만, 그에 앞서 로몬들은 태생적인 회수인이다. 로몬들은 날 때부터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으며, 성장 과정에서도 참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강인함을 지니도록 훈련된다. 행성 생태계에서 미생물들이 죽음을 다시 삶의 원료로 되돌리듯이 우리는 전 우주적 규모에서 순환의 매개체를 자처하며, 이러한 삶의 방식에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저 밤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아서 우리의 인지 공간은저 별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저 별들을 나누어 담는다면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침내 이 행성 바깥의 우주를 온전히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곳을 향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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