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라네"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8년 이후) 오수초족도(午睡初足圖)

조선 19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평상 위에 놓인 책 더미에 윗몸을 기대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걸친 채 나이 지긋한 선비 한 분이 깜빡 낮잠이 들었다. 오수삼매(午睡三昧). 적당한 볕에 살랑거리는 바람까지 그야말로 단잠이 될 것이다. 깊은 산 속 시골집이다. 마당에 낀 푸른 이끼를 보아 여간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고요함과 한가로움, 느긋함과 편안함이 전부인 곳에서 책 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책을 읽다가 쏟아지는 졸음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대로 잠이든 모습니다.

 

오수초족도(午睡初足圖)는 송나라의 당경(唐庚, 1071~1121)이란 사람의 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 해는 소년처럼 길기고 하다 / 내 집이 깊은 산 속에 있어 /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 / 푸른 이끼는 섬돌에 차오르고 / 떨어진 꽃이파리 길바닥에 가득하네 / 문에는 두드리는 소리 없고 / 솔 그늘은 들쭉날쭉하니 / 새 소리 오르내릴 제 / 낮잠이 막 깊이 드네."

 

많은 옛 선비들이 꿈꿨던 삶이 아니던가. 자연 속 소나무와 학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책 읽고 시 쓰는 선비의 일상에 차 한 모금은 그 무슨 호사도 아니리라. 속세를 벗어나 자연의 품속에서 은일의 삶을 누리고 싶은 선비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속세를 벗어나 그림 속의 선비처럼 살 수는 없다. 하여, 이루지 못한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라도 그 삶의 맛과 멋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새 소리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에 낮잠이 막 깊이 든(금성상하禽聲上下 오수초족午睡初足)” 모양이다. 화제 끝에 찍은 인장은 "필하무일점진(筆下無一點塵)"이다. "붓 아래 세속의 띠끌 한 점도 없다."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니까.

 

이재관(李在寬, 1783~1838년 이후)의 호는 소당(小塘)으로 작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태조 어진을 복원해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산수, 인물, 영모, 초상에 모두 능했고 남종화법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그의 산수 인물화는 소재와 분위기 등에 있어 이인상(1710~1760)과 윤제홍(1764~?)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시원스럽다. 수묵은 묵직하고 투박한 듯 하지만 깨끗하고 맑은 담체를 곁들여 여유롭고 높은 정신의 세계를 잘 구현해 냈다. 일본인들이 좋아해 매년 부산에 들어와 작품을 사 갔다고 한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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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04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상화네요. 보기만 해도 여백의 삶이 그려내는 풍경이 부럽습니다. 점점 치열해지는 삶 속에서 가끔은 쉼표처럼 그려지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려면 욕심부리고 움켜쥐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하나 둘씩 버려야겠죠? 사실 제 한 몸 살아가기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거늘. . .
(이 와중에 저 인간의 신발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며. . ㅎ)

무진無盡 2015-02-04 20:50   좋아요 0 | URL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그러게요..잠에서 깬 것도 아니고 어디 갈 곳도 없는데 신발이 안중에나 있을까요? ㅎㅎ)

나비종 2015-02-04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주인이 맨날 일만 시킨다고 저 동자승필 나는 아이가 감췄거나, 아님 아궁이에 넣고 불 때는 중인지도. . 부채들고 눈치보는 중ㅎㅎ)

무진無盡 2015-02-04 21:16   좋아요 0 | URL
그 마음 달리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
(여기도 갑을관계? ㅎ)

나비종 2015-02-04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바뀌기도 하구요.^^
(이런. . 그럼 이건 역사적인 관점이 도입되는 건가요? 낮잠자는 저 노인 중심으로 서술된 제목하며ㅋㅋ 구석에서 열라 일하는 저 아이는 그저 새들과 함께 배경화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