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신화력 - 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신화 수업
유선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그림 몽유도원도에서 시작한다. 도원은 유토피아와 같다. 토머스 모어 소설 속의 유토피아는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ou) 장소(topia)를 그렸고 이후로 이상향을 가리키게 되었다. 반대되는 말은 디스토피아. 저자는 그리스 로마 북유럽 수메르 인도 중국 한국 신화를 적절히 들려 주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 흩어져 있는 인간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들춘다. 저자가 책에 담은 모든 말들이 마지막 한 문장에 귀결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11월에 진행된 <도스토옙스키 컬렉션> 펀딩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찍이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전자책 200권을 구매하였음에도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펼치지 않은 평소 독서 습관으로 봐서 <도스토옙스키 컬렉션>을 구매하더라도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열독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한테 당장 구매력이 높지 않았다. 거의 비슷한 일정으로 <도스토옙스키 켈렉션> 말고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펀딩 역시 진행 중이어서 나의 관심이 후자 쪽에 쏠렸었다. 그렇지만 펀딩이 종료되고 <도스토옙스키 켈렉션>이 출간되기까지 사야할지 말지 고민을 거듭하였다. 11월 마지막 날에 결국 구매를 결행했다. 언젠가 나도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 같은 희망을 꿈꿔 본다.

첫째와 둘째가 11월에 자신들이 희망하는 직장에 입사하였고 드디어 첫 월급을 탔다. 무일푼에서 이룬 첫 수입이 로또 당청된 것 같다며 월급에서 일부를 “옛다!용돈” 메시지와 함께 용돈으로 보내주었다. 푼돈일 수 없는 귀중한 용돈을 기념하기 위해서 책과 CD 세트를 구입하였다. 평소 구입하고 싶었지만 품절 상태여서 구입하지 못하였는데 11월 중순에 재고 확보를 알려와서 지체하지 않고 구입에 나섰다. 2014년에 피레스 옹의 70세 기념 음반이 나온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최근에야 알았지만 국내서 바로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일단 기다려 보았다. 코리아 세일 페스타 덕분인 것 같다!

펀딩에 참여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발간일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동안 이 책이 발간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국내에서 칸타타 대본을 번역한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교회음악 전공자한테는 모르겠지만 바흐 칸타타를 감상하고 싶은 애호가를 위한 안내서나 공인된 번역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올해 초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전곡을 감상해 보자며 작곡된 순서를 찾아가며 감상하기도 하였었다. 바흐가 작곡한 칸타타는 실제 교회의 예배를 위한 음악이지만 종교를 떠나 클래식 음악으로 감상하기 좋다. 바흐의 선율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12월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와 함께 지낼 것 같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가디너의 <바흐: 천상의 음악>을 어서 먼저 읽어야 하는데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이 있어서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1-12-01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째와 둘째의 희망직장 입사에 용돈하사까지 ! 원하시던 cd도 !! 복받으셨습니다 오거서님 ㅎㅎ 축하드려요 ~~ 전 좀 전에 아이가 과패딩? 별게 다 있어요. 사는데 찬조 좀 해달라는 카톡을 ㅎㅎㅎ 받았습니다.

오거서 2021-12-01 23:08   좋아요 2 | URL
년말에도 복을 받을 수 있네요 ㅎㅎㅎ
과패딩 … 저도 찬조한 것 같은데 등짝에 큰 글씨로 학교와 과명을 써붙인 건데 과대표 등 이익금은 활동비로 충당되는 것 같아 구입하지 않으면 눈총 맞는 것 같더라구요. 자식 뒷바라지는 머나먼 길이죠 ^^

기억의집 2021-12-01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드님들이 첫월급으로 빨간 내복이 아니고 옛다 용돈~ 주셨군요. 부럽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이 보내주신 돈이 찍혀 있는 내역 보시면서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뿌듯하셨겠어요. 저는 아직 애둘 뒷바라지 하려면 멀어서… 저도 언제 오거서님같은 날이 올 수 있을까 싶네요!!!

오거서 2021-12-01 23:12   좋아요 2 | URL
저도 믿기지 않지만 이런 날이 오네요. 자식 뒷바라지 하는 것이 힘든 만큼 보람도 크지요. 기억의집님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

scott 2021-12-01 2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든든한 아이들
아부지에게 이런 감격의 효도를!
오거서님
연말 집콕 라이브러리와 공연 감상으로 가득 차 실 것 같습니다 !



오거서 2021-12-01 23:16   좋아요 2 | URL
scott님 덕분에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 컬렉션 발간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고민 끝에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 ^^

새파랑 2021-12-01 23: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놓으시면 언젠가 읽으실겁니다~!! 축하드려요 ^^ 도선생님은 사랑입니다~!

scott 2021-12-01 23:56   좋아요 3 | URL
대를 물려 주실 것 같습니다 ^^

오거서 2021-12-02 12:45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이 격려해주시는 말씀에 힘을 얻겠습니다. 아자! ^^

오거서 2021-12-02 12:52   좋아요 2 | URL
자식들이 책을 좋아하면 물려줄 테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무리하면서까지 물려줄 생각은 없고요, 당장은 저가 저 책들과 친해져야 하는데 언제 친해질런지… 저의 약점을 아는지 어젯밤에 아내가 타박을 주던데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더군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1-12-02 00: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옛다, 용돈!
이 말이 주는 용도가 아닌 받는 용도로 사용되면 아주 정겨울 것 같습니다 ㅎㅎ

오거서 2021-12-02 12:53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아주 정겨웠어요 ^^
저는 실용주의자임을 다시금 깨달았어요 ㅋㅋㅋ

수이 2021-12-02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드님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책과 시디 구입하셨다고 하니 내게는 언제 그런 날이 온단 말인가?! 하고 아직 한참 남은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한참 갈등을 하다가 도끼옹 전집을 11월 마지막날 구입하고 말았습니다. 이럴거면 그냥 미리 펀딩 참여할걸 하구요 ㅎㅎ

다락방 2021-12-02 10:11   좋아요 3 | URL
구매하셨군요, 비타 님! ㅋㅋ

수이 2021-12-02 11:11   좋아요 2 | URL
락방님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1-12-02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처럼 조금합이 있답니다. 올해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는데 이젠 12월밖에 안 남았으니 말이죠. 그래서 생각한게 반 이상 읽은 책들이라도 먼저 읽어서 완독하여 독서 노트에 적어 놓자,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오거서 2021-12-02 21:28   좋아요 2 | URL
페크님의 진솔한 글들을 읽으면서 부러운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
페크님의 독서노트는 12월에 더욱 알찬 내용으로 채워질 것 같아요. 응원합니다!

책읽는나무 2021-12-02 2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구입한 자도 읽을 것이라고 해놓구선 ~~늘 그렇듯~~그저 쳐다 보고만 있네요^^
그래도 오거서님 부럽습니다.
<옛다! 용돈> 따님들(따님들 맞으시죠??지난 번 페이퍼 때 따님들이라고 읽었던 것 같아서요!)의 첫 월급 용돈으로 구입하셨으니 얼마나 귀한 책이고,음반일까~흐뭇함과 동시에...나는 언제 옛다,용돈 받아 볼까요???그저 부럽습니다^^

오거서 2021-12-02 21:39   좋아요 3 | URL
컬렉션을 직접 보니까 정말 구매하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저 바라만 보아도 흐뭇합니다. 그래서 다시 드는 생각이 출판사가 잘못… 책을 읽고 싶게 만들어야지 바라보고 만지기만 해도 만족감을 주면 책을 읽지 않잖아요. 책을 읽지 않는 변명거리 늘어나고요…
이런 날이 올 때까지 세월이 쏜살같이 지난 것 같아요. 나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들은 더디게 자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쑥쑥 자라요. 책읽는나무님한테도 그런 날이 머지않아 도래할 겁니다. 매일 바삐 지내시다 보면 그리 될 겁니다. 암요… ^^

Conan 2021-12-03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용돈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오거서 2021-12-03 12:57   좋아요 3 | URL
Conan님 감사합니다. ^^
용돈을 받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ㅎ

라로 2021-12-03 2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용돈도 받으시고 부러워요,, 제 아들은 용돈 줄 것처럼 큰소리 치더니 벌은 돈에서 세금내고 십일조 내고 하니까 없다고 그래서 제가 되려 줬어요.ㅠㅠ

오거서 2021-12-03 20:30   좋아요 1 | URL
제 자식들은 저한테 십일조 한 셈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ㅎㅎ
 
드립백 코스타리카 엘 베나도 라 로마 - 10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2월
평점 :
품절


종이클립을 펼쳐 컵에 걸고는 뜨거운 물을 컵에 가득 채우고나서 잘못된 것을 알았다. 추출법과 다른 물붓기… 드립백을 티백으로 오해하다니 면목이 없다. 아무쪼록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11-30 13: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ㅋ 드립백과 티백이 좀 햇갈리긴 하죠 ^^

scott 2021-11-30 13:53   좋아요 5 | URL
붓거나 푹 담그거낭 ㅋ^^

오거서 2021-11-30 18:13   좋아요 3 | URL
실은 푹 담궜다가 꺼냈어요 그 바람에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죠 ㅋㅋㅋ

scott 2021-11-30 13: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거서님 추출 하신것 처럼 마신적이 있는데 커피는 커피일뿐 ㅎ^ㅎ^

책읽는나무 2021-11-30 16:16   좋아요 3 | URL
아....바로 이해못하다가 한참만에 이해!! 뒤늦게 빵~터졌어요!!ㅋㅋㅋㅋ
컵에 걸어서 물붓기 맞는데 왜???
하다가....댓글 보고 알았어요^^
저는 드립백 주문한다는 게 암생각 없이 원두분쇄가 배달와설라무네 거름종이 사러 나가고...
암튼 커피는 커피일 뿐이죠ㅋㅋㅋ
맛만 좋음 되는 거죠^^

책읽는나무 2021-11-30 16:18   좋아요 3 | URL
두 분도 이런 실수를 하시는군요??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십니다~~^^

오거서 2021-11-30 18:16   좋아요 3 | URL
저렇게 하면 연한 커피가 되더라구요… ^^;

scott 2021-11-30 18:17   좋아요 3 | URL
디 카페인 ^^

Kletos 2021-11-30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

오거서 2021-11-30 18:20   좋아요 2 | URL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요 ^^;

mini74 2021-11-30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죠 댓글도 오거서님도 다들 귀여우세요. 전 그런 적 없던것처럼 시치미를 떼며 ㅎㅎㅎ

오거서 2021-11-30 22:23   좋아요 1 | URL
미니님 시치미 본체만체 해야 하나요… ㅋㅋㅋ

라로 2021-11-30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저도 책나무님처럼 오거서님이 더 친근하게 느겨져요!!!^^

오거서 2021-11-30 22:28   좋아요 1 | URL
라로님도! Hello! 아델 생각… ㅎㅎㅎ

페크pek0501 2021-12-02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수도 하고 살아야 매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
 

정말이지 일에, 사랑에, 생활에, 모든 것에 무능했다. 눈 닿는 곳마다 나에게서 홱 돌아앉은 등뿐이었다. 그나마 상반기를 버틴 유일한 힘이었던, 생활도 재정비하고 하반기 회사 일도 미리미리 준비해두리라 벼르고 별렀던 여름휴가의 첫날 에어컨이 덜컥 고장 났을 땐 웃음밖에 안 나왔다. 하늘에 대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아 진짜! 나랑 장난해요? 네?

하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힘든 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지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J의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 덕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만남이 유독 생생하게 기억나는 음식들이 있다. (…)
요즘이야 건강에 한결 신경을 쓴 시리얼들이 차고 넘치지만 1980년대 말 당시 시중에 나오는 시리얼들을 두고 엄마가 진심으로 ‘영양이 풍부한 건강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도 않다. 엄마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근하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불 앞에서 무언가를 지지고 볶고 도마 앞에서 무언가를 썰고 다질 필요 없이 시리얼 광고들이 속삭이는 것처럼 간단하고 건강하게 한 끼를 만들어주는 음식이라고. 적어도 우유라도 먹일 수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부디 시리얼이 당시의 늘 고단했던 엄마에게도 달콤한 아침잠 몇십 분과 잠시 트이는 숨통을 선물했기를 바란다. 엄마는 한 끼를 거저먹고, 나는 한 끼를 과자 먹고,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아침들이었기를.

나의 아침은 원두를 갈며 시작된다. 요즘은 친구들이 마침 비슷한 시기에 좋은 원두를 선물로 잔뜩 보내줘서 세 종류의 원두 중에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커피 호황기를 보내고 있다. 신맛이 나며 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시카고 커피 브랜드인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ia)’의 원두를 고른다. 이름을 의역하면 ‘배우신 분’이라는 점이 약간 비웃김 포인트인데, 커피 맛에 살짝 섞여 있는 자두향이 입안에서 우엉향으로 돌변하는 것도 코믹하게 느껴지는 유쾌한 커피다. 도드라지는 맛 없이 부드럽고 묵직한 커피가 필요할 때는 코로나 발발 직전에 가까스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온 유서 깊은(무려 1876년에 오픈한) ‘카페 첸트랄’의 원두를, 쓴맛이 그리울 때는 ‘일리’ 원두를 꺼낸다. 고른 원두를 핸드밀에 넣고 가만히 갈고 있으면 자갈 밟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바퀴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렇게 커피 내려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루를 시작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긴 오직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운동도 다시 시작했으니 전혀 일리 커피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원두를 갈면 하루가 시작되고 페달을 밟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디카페인커피를 마시면 하루가 끝난다. 형용사는 소중하지만, 동사는 필요하다. 여행에서도 그랬다. 오로라를 보던 압도적인 순간이나 유빙에 둘러싸였던 꿈결 같은 순간에는 늘 한두 잔의 술이 함께하며 찬란한 빛을 더해주었지만, 그런 순간들 뒤에는 아침마다 마주하는 이국의 낯선 공기를 좀 더 편안하고 친밀한 무엇으로 바꾸어주며 차분하게 하루의 모험을 계획하게 만들었던 한두 잔의 커피가 있었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냈더라도 아침에 마실 맛있는 커피를 생각하면 그래도 내일을 다시 살아볼 조그만 기대가 생기고, 여전히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다가도 저녁에 자전거를 탄 뒤 마실 끝내주는 커피를 생각하면 아주 망한 날만은 아닐 것 같은 조그만 위안이 생긴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원두를 갈고 있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nn 그리하여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신 앞에서, 술과 커피 중 하나라는 일생일대의 질문 앞에서, 나의 대답은 역시 커피가 된다. 물론 비장의 카드 하나를 계산에 넣어두기는 했다. 위스키를 베이스로 넣는 ‘아이리시커피’. 제아무리 신이라도 아이리시커피가 커피가 아니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고, 나는 위스키를 아주 듬뿍 넣을 것이다.

맞다. 모름지기 하지에는 맥주다.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해봐도 그렇다. 예부터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짓날은 감자 캐 먹는 날이고 ‘보리환갑’이다"라는(약간 비문이 아닌가 싶은) 옛말이 전해져올 정도로, 하지는 질 좋은 감자와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 적기이자, 수확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져왔다. 하지가 지나면 보리 알이 잘 영글지 않아 보리가 마르고 감자 싹이 죽어서 그렇다는데, 그래서 ‘보리환갑’과 짝을 맞춰 ‘감자환갑’이라고도 부른다. 그 시대에 비해 부쩍 늘어난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지금은 ‘보리팔순’ ‘감자백세’ 정도로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어쨌거나 하지는 보리와 감자의 환갑잔칫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짓날 보리로 만든 맥주를 마시는 건 하지를 기념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맥주 마실 명분이 이렇게 뚜렷하면서 미풍양속적이기까지 한 날이 또 있을까.

이렇게 하지 즈음에 수확을 끝낸 하지보리와 하지감자는 ‘햇보리’ ‘햇감자’라는 이름으로 6월 말부터 세상에 나와 여름 내내 제철음식으로서 한자리를 톡톡히 차지한다.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가장 부지런하게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나에게 여름은 수제맥주와 가마솥감자칩의 계절이다. 하다못해 시중의 공장제 봉지 감자칩들도 6월의 토실토실한 하지감자로 만든 늦여름‒가을 제품이 유난히 더 맛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봉지 감자칩에도 미세하게나마 제철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nn 그래서 더욱 나는 감히 맥주와 감자칩, 줄여서 ‘감칩맥’도 여름 제철음식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단지 ‘여름이니까 → 시원한 맥주!’ ‘맥주에는 → 짭짤한 감자칩!’ 이런 단순한 도식을 넘어, 영양학적 풍속적 미각적인 가치를 획득한 제철음식이라고. 곧 죽어도 감자를 삶아 먹거나 식당에 들러 감자전을 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감자칩을 주문해 먹는 부지런은 있는, 보리밥을 지어 먹거나 보리차를 끓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맥주를 골라 마시는 부지런은 있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제철음식. 꼭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어야만 제철음식이란 법 있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