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이 유독 생생하게 기억나는 음식들이 있다. (…)
요즘이야 건강에 한결 신경을 쓴 시리얼들이 차고 넘치지만 1980년대 말 당시 시중에 나오는 시리얼들을 두고 엄마가 진심으로 ‘영양이 풍부한 건강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도 않다. 엄마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근하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불 앞에서 무언가를 지지고 볶고 도마 앞에서 무언가를 썰고 다질 필요 없이 시리얼 광고들이 속삭이는 것처럼 간단하고 건강하게 한 끼를 만들어주는 음식이라고. 적어도 우유라도 먹일 수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부디 시리얼이 당시의 늘 고단했던 엄마에게도 달콤한 아침잠 몇십 분과 잠시 트이는 숨통을 선물했기를 바란다. 엄마는 한 끼를 거저먹고, 나는 한 끼를 과자 먹고,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아침들이었기를.

나의 아침은 원두를 갈며 시작된다. 요즘은 친구들이 마침 비슷한 시기에 좋은 원두를 선물로 잔뜩 보내줘서 세 종류의 원두 중에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커피 호황기를 보내고 있다. 신맛이 나며 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시카고 커피 브랜드인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ia)’의 원두를 고른다. 이름을 의역하면 ‘배우신 분’이라는 점이 약간 비웃김 포인트인데, 커피 맛에 살짝 섞여 있는 자두향이 입안에서 우엉향으로 돌변하는 것도 코믹하게 느껴지는 유쾌한 커피다. 도드라지는 맛 없이 부드럽고 묵직한 커피가 필요할 때는 코로나 발발 직전에 가까스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온 유서 깊은(무려 1876년에 오픈한) ‘카페 첸트랄’의 원두를, 쓴맛이 그리울 때는 ‘일리’ 원두를 꺼낸다. 고른 원두를 핸드밀에 넣고 가만히 갈고 있으면 자갈 밟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바퀴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렇게 커피 내려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루를 시작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긴 오직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운동도 다시 시작했으니 전혀 일리 커피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원두를 갈면 하루가 시작되고 페달을 밟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디카페인커피를 마시면 하루가 끝난다. 형용사는 소중하지만, 동사는 필요하다. 여행에서도 그랬다. 오로라를 보던 압도적인 순간이나 유빙에 둘러싸였던 꿈결 같은 순간에는 늘 한두 잔의 술이 함께하며 찬란한 빛을 더해주었지만, 그런 순간들 뒤에는 아침마다 마주하는 이국의 낯선 공기를 좀 더 편안하고 친밀한 무엇으로 바꾸어주며 차분하게 하루의 모험을 계획하게 만들었던 한두 잔의 커피가 있었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냈더라도 아침에 마실 맛있는 커피를 생각하면 그래도 내일을 다시 살아볼 조그만 기대가 생기고, 여전히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다가도 저녁에 자전거를 탄 뒤 마실 끝내주는 커피를 생각하면 아주 망한 날만은 아닐 것 같은 조그만 위안이 생긴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원두를 갈고 있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nn 그리하여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신 앞에서, 술과 커피 중 하나라는 일생일대의 질문 앞에서, 나의 대답은 역시 커피가 된다. 물론 비장의 카드 하나를 계산에 넣어두기는 했다. 위스키를 베이스로 넣는 ‘아이리시커피’. 제아무리 신이라도 아이리시커피가 커피가 아니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고, 나는 위스키를 아주 듬뿍 넣을 것이다.

맞다. 모름지기 하지에는 맥주다.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해봐도 그렇다. 예부터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짓날은 감자 캐 먹는 날이고 ‘보리환갑’이다"라는(약간 비문이 아닌가 싶은) 옛말이 전해져올 정도로, 하지는 질 좋은 감자와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 적기이자, 수확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져왔다. 하지가 지나면 보리 알이 잘 영글지 않아 보리가 마르고 감자 싹이 죽어서 그렇다는데, 그래서 ‘보리환갑’과 짝을 맞춰 ‘감자환갑’이라고도 부른다. 그 시대에 비해 부쩍 늘어난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지금은 ‘보리팔순’ ‘감자백세’ 정도로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어쨌거나 하지는 보리와 감자의 환갑잔칫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짓날 보리로 만든 맥주를 마시는 건 하지를 기념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맥주 마실 명분이 이렇게 뚜렷하면서 미풍양속적이기까지 한 날이 또 있을까.

이렇게 하지 즈음에 수확을 끝낸 하지보리와 하지감자는 ‘햇보리’ ‘햇감자’라는 이름으로 6월 말부터 세상에 나와 여름 내내 제철음식으로서 한자리를 톡톡히 차지한다.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가장 부지런하게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나에게 여름은 수제맥주와 가마솥감자칩의 계절이다. 하다못해 시중의 공장제 봉지 감자칩들도 6월의 토실토실한 하지감자로 만든 늦여름‒가을 제품이 유난히 더 맛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봉지 감자칩에도 미세하게나마 제철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nn 그래서 더욱 나는 감히 맥주와 감자칩, 줄여서 ‘감칩맥’도 여름 제철음식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단지 ‘여름이니까 → 시원한 맥주!’ ‘맥주에는 → 짭짤한 감자칩!’ 이런 단순한 도식을 넘어, 영양학적 풍속적 미각적인 가치를 획득한 제철음식이라고. 곧 죽어도 감자를 삶아 먹거나 식당에 들러 감자전을 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감자칩을 주문해 먹는 부지런은 있는, 보리밥을 지어 먹거나 보리차를 끓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맥주를 골라 마시는 부지런은 있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제철음식. 꼭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어야만 제철음식이란 법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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