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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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통 그림자극 홍루몽을 보고 나오면서 주인공은 실재와 허구, 있음과 없음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이 소설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죽을 때야 비로소 땅에 내려앉는다는 발 없는 새’, 장궈룽(장국영)과 워이커씽이 그런 존재다. 장궈룽은 실재고 워이커씽은 허구다. 작가는 장궈룽의 비극적인 결말에 허구의 인물 워이커씽과의 조우를 끌어들인다패왕별희의 감독 첸카이거의 회상을 통해 이들의 만남을 재구성한다. 장궈룽이 패왕별희의 주인공 뎨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워이커씽이다. 매이란팡(매란방)은 중국 경극배우로 실존인물이다. 이 매이란팡이 장궈룽이 연기했던 뎨이의 모델이다. 매이란팡과 장궈룽 사이를 허구인 워이커씽이 잇는다. 장궈룽은 패왕별희이후 뎨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영화 속 그의 연기를 보면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뎨이의 잘려나간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모친의 사랑을 상실한 유년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허구 속 인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고단한 날개짓을 하다가 죽음으로 안식을 얻었다. 워이커씽 역시 그 영혼이 쉬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허구적 공간에 살았던 실존인물 장궈룽의 삶을 실재 역사를 통과한 허구의 인물 워이커씽과 직조하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9p)” 세계를 창조한다.

 

워이커씽에게는 난징 대학살이라는 비극적 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비극이 그를 만들었다. 난징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이 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그는 난징대학살의 문제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규명하려 애쓴다. 땅에 내려앉기 위하여.

 

아이리스 장은 난징 대학살을 통해 감춰진 참극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녀는 인터뷰와 조사, 집필 과정에서 만난 난징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참혹은 그녀로 하여금 길을 잃게 했다. 난징이 발 없는 워이커씽을 낳았고, 아이리스 장에게서 발을 가져갔다. 두 사람 모두 인류라는 실존적 공간에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발 없는 새.

 

위안부로 난징에 끌려갔던 조선의 여인들, 히로시마에서 인류의 종말과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돌아갈 곳을 잃은 사는 동안 그 영혼이 쉼을 얻을 수 없었던 존재들이다. 일본, 한국, 중국의 예술가들은  예술에서 구원을 찾기도 하고 오히려 침몰되기도 한다. 첸가이거가 전자라면,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작가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허구적 서사를 현실 쪽으로 끌어오려고 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시도는 극단적 행위로 이어졌다. 영화감독 첸가이거의 나의 홍위병 시절은 큰 울림을 주었고, 그의 영화는 그에게 구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그의 작품을 보면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 중국이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방향에 발을 맞추고 있는 그의 행보는 역사와 그 시대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혹시 그것이 중국인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발을 딛고 사는 방법은 아닐지?

 

소설 속 워이커씽은 첸카이거와는 다른 방향에서 찾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난징대학살과 같은 잔인하고 참혹한 범죄의 근원을 천황숭배에서 찾는다.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체주의가 아닌 숭배! 그러기에 그들은 죄의식을 갖지 않는 듯 보인다. 그 숭배는 홍위병의 폭력 안에도 존재한다.

 

한중일의 근현대사를 이룬 사건과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이 조우하고 마주쳐 생성한 이야기는 장자의 몽상처럼 여겨진다.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워이커씽은 비극에서 탄생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장자가 나비를 보듯, 나비가 장자를 보듯,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언뜻 선문답 같지만, 가해자가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말에 힘을 싣고 보면, 폭력과 비극으로 점철된 과거사를 정리하는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를 다시 봤다. 뎨이는 중국의 근현대사-청나라의 패망, 중일전쟁, 문화혁명 등-를 통과하며, 경극배우로서 영욕을 누린 인물이다. 그의 잘려나간 손가락은 가슴 아픈 가족사를 상징한다. 불운한 역사와 비극적인 가족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개인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결박해서 몰고 간다.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과 션판의 홍위병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 달리, 영화패왕별희』, 『인생』,『붉은 수수밭(홍까오량 가족)』, 『사람아 아, 사람아!와 같은 문학에서 더 실재를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삶과 결혼했다는 들뢰즈의 말이 다시 내 안에서 인용된다. 그렇게 허구가 실재가 되고 실재가 허구가 된다. 나는 그 실재가 된 허구에서 삶의 진실과 가치를 길어 올린다.


『길 저쪽』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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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23 1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는 역시 명품입니다! 저는 정찬 작가의 작품을 이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요. 장국영 이야기를 다루고 중국 근현대사 관련해서 나온다는 배경만 아는 상태에서 읽었어요.
그레이스님 글 읽으니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지고 더욱 풍성한 읽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다시 리뷰하는 느낌으로 읽고 가네요^^

그레이스 2023-06-23 10:3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정찬 작가의 다른 책도 읽게 되네요.

미미 2023-06-24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징대학살 >과 <발없는 새>를 읽고 <패왕별희>를 다시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난징대학살도 홀로코스트만큼 깊이있게 연구되어져야겠죠?
정도가 다를 뿐 그 혐오와 잔혹성만큼은 결코 과거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3-06-24 11:58   좋아요 1 | URL
저는 모옌의 <붉은수수밭> 읽을때 <난징대학살> 함께 읽었어요.
충격이었죠.
<패왕별희>는 이 소설을 읽은 후에 봐서 그런지 다르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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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상실의 슬픔에 깊이 잠겨있는 고백이다. 신의 사랑, 영원한 생의 소망으로 위로받기를 유예하고 깊은 애도의 터널을 통과한다. ‘사랑한다‘는 독백은 죽음에 대한 역설이다. 상실에 대한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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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17 1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보뱅 책이네요^^

1984Books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보뱅 책들 표지를 우아하게 깔맞춤 하셔서 출간하셨는지
보뱅의 문장과 어울리고, 쎈스가 그냥 아주!!

그레이스 2023-06-17 15:39   좋아요 1 | URL

저도 표지 넘 맘에 들어요~♡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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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책, 글쓰기에 관해 쓴, 시처럼 숨을 멈추게 하는 글들이다. 그 행위는 고독하고 황홀하다. 지나가면 놀이, 사랑처럼 무용한 듯 보이지만 기도처럼 숭고하다.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어, 타자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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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07 18: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백자평이 아름답습니다…!!

그레이스 2023-06-07 18: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보뱅의 글이 아름답습니다~♡

자목련 2023-06-08 0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뱅의 이 책 정말 아름답지요. 그레이스 님의 백자평도 마찬가지고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는 어려워 저는 가슴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데...

그레이스 2023-06-08 10:04   좋아요 1 | URL
미흡하지만 책속에서 인상깊었던 표현들을 기억해서 써봤습니다. 다음은 그리움의 정원에서...
벌써부터 좋네요~♡

레삭매냐 2023-06-13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뱅 작가의 책들 한참 모았는데
다 읽었는지 가물가물하네요 벌써.

그레이스 2023-06-13 21:12   좋아요 1 | URL
저는 그런 작가들 너무 많아요
 

그녀의 글은 너무 솔직하고 디테일해서 당황스럽다. 자신을 소재로 한 글인데, 이렇게까지 밝혀도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진정한 장소를 읽고서야 그녀의 의도와 글의 의미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세월을 읽을 때는 그런 난감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 속 그녀를 불러내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읽은 책, 단순한 열정에서는 작가 서론부터 난감했다. 이 소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해야 하는가?’에 답을 찾는데 조금 지체 되었다.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 설레임, 무기력함, 열정, 상실감, 그리움, 나이 차, 국적, 외도와 같은 일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그동안 지향해왔던 사유를 무시하고, 지양해왔던 태도를 연인에게서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 특별하다. 그래서 아마도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작품중간에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36p)라고 덧붙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신이 제물이 되어 자신이 속한 종()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서술하는 작가다. 50에 들어선 경계에 서있는, 단순히 열정을 불태우려면 사회적 관념을 뛰어넘어야 할 여성 지식인이 가진 욕망을 드러낸다. 헤어진 후 그녀의 아픔은 육체의 상실에 대한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빈옷장부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첫 장면 역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식료품점의 딸 드니즈 르쉬르는 진통이 오길 기다리며, 그녀의 부모, 살고 있는 환경, 사립학교, 남자(아이)들과의 위험한 만남에 대해 서술한다. “언제나 우등생이며, 일요일에는 짧은 발목 양말을 신는 얼간이이자 장학생(12)”인 그녀가 낙태진통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오게 된 과정이다. 첫 페이지에 적힌 텅 빈 옷장에 가짜 보물을 간직해 두었지로 시작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는 유년의 유산들-부모로부터, 어른들로부터, 학교교육으로 받은-이 거짓된 것들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녀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15p)”고 말한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남자를 가볍게 만나는 것조차 사회적 격차에서 온 열등감, 모욕감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의 자리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은 그에 대한 기억과 글을 불러낸다. 그녀가 갖고 있는 열등감과 수치심의 근원에 부모님이 있다. 그녀가 빈옷장에서 밝혔듯이 그들의 계급이 갖고 있는 삶의 습관과 특징들로 인해,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이의 소녀에게 많은 독서와 성찰과 수업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고 사립학교를 다니며 부모와의 격차를 경험하게 되고, 특히 아버지와 소원해 지게 되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그의 사투리가 섞인 언어는 그의 계급을 특징 짓는다. 이 언어는 두 사람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버지의 삶,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부끄러움, 그로 인한 자신의 수치심과 죄의식…….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103p)”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 살지 못 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다.(남자의 자리48p)”

부끄러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역시 충격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싸움이 끝나고 모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런 다툼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단 의미일까? “1952615일의 일이다. 내 유년 시절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 그 사건이 그녀의 부끄러움의 핵이 되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사춘기와 청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주된 정서는 수치심과 분노다. 식당과 잡화점을 잇는 통로에서 숙제하고 책을 읽으며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던 기억 역시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환경이었다.

그녀는 사립학교에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105p)”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부끄러움 속에 편입(105p)”되었다고 고백한다.

 

나에게 가장 슬프게 기억된 장면은 비아리츠 해변에서의 그들이다. “옷을 다 입고 신발을 신은 채 비키니 차림의 그을린 몸들 사이로 해변을 걸어 다니던(117p)” 딸과 아버지는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소외당한 계급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이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할까?(126p)”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쓴 글이다. 돌아가시기 전 잠시 자신과 함께 살던 어머니,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장기체류하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해 쓴 일기 형식의 글이다. 딸이 느끼는 주된 감정은 죄책감이다.

다른 딸에서 다른 딸이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어린 나이에 죽은 언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어른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다른 딸이다. 언니의 사진과 자신에게 감추던 어른들의 비밀스런 대화 속에서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착한 딸은 작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어두운 부분이다. 다른 딸에게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한다. 어른들은 죽은 다른 딸의 모습과 성품을 작가에게 투영했고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사진의 용도는 내가 가장 난감해했을 만한 작품이었지만, 가장 마지막에 읽어서인지 그냥 수월하게 넘어갔다. 61세의 아니 에르노와 22살 아래 마크 마리가, 그들의 사랑의 흔적을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글로 남긴 책이다. 61세의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카테테르를 꽂고 방사선 치료를 위한 표식을 그려넣은 몸의 묘사, 수술 후 베네치아로의 여행에서의 이벤트는 드러냄의 의지다. 감추고 억압한 여성의 몸을 폭로하는 것이다.

 

프랑스 여성들의 11%가 유방암에 걸렸고, 유방암을 앓고 있다. 삼백만 여성이 넘는다. 꿰매고, 스캔하고 붉은색, 파란색 그림으로 표시하고, 방사선을 쬐고, 재건한 삼백만의 가슴이 셔츠와 티셔츠 안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과감히 보여 줘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가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드러냄의 의지에 동참하는 것이다.](85p) 

진정한 장소야 말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가이드북이다.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세르지에서의 생활과 파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일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간과 인간에 대한 그녀의 사유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주거환경과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작품에 기록된 사실들을 통합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가족이 그녀에게 미친 정서들, 독서, 그리고 글쓰기……. 빈옷장』 『남자의 자리』 『얼어붙은 여자』……『세월등 작품에 관한 대담이 이어진다. ‘진정한 장소란 작가의 정체성과 항구성을 갖게 하는 그녀를 그녀 되게 하는 진정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저를 최후의 참호로 몬다면, 그래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은 역시 거기(글쓰기)이니까. 저만의 진정한 장소이죠.(138p)” 

이 책에서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과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읽었다. 구별짓기는 아직 상권만 읽었지만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길어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계급과 취향과 아비투스에 관한 사회학자의 글은 계급 전향자로서 자신과 부모의 갈등과 유년기에 형성된 수치심에 대해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창을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다.

사물들은 그녀가 부르주아를 향한 문턱을 넘어가 파리 생활을 할 때 경험했을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나처럼 전율했는지 모르겠다.

 

쁘띠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사회세계에 대한 쁘띠 부르주아적 경험은 우선 자신의 신체와 언어를 아주 수줍어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곤란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신체와 언어를 한 몸처럼 느끼는 대신이 양자를 타인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감시하고, 교정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소외된 대타 존재 un étre-pour-autrui aliéné를 재소유화하기 위한 절망적 시도에 의해 과잉교정과 서투른 시도 속에서 계속 헤매다 스스로를 타인의 신체와 언어의 소유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리고 만다.(구별짓기삐에르 부르디외,334p)”

 

아니 에르노의 작품 읽기는 잠정적으로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오늘도 출판 소식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몇 권을 보게 될 거라 생각된다. 조르주 페렉 읽기가 이어질 듯하다 오늘도 두 권을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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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31 0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에 관해 유익한 정보를 배워 갑니다.

그레이스 2023-05-31 06: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5-31 08: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소논문 쓰셔도 될 수준으로 섭렵하셨는걸요. 저는 달랑 1권이지만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두 번 읽을 독자로서 무슨 의미로 그레이스님께서 이야기하시는지 조금은 알것 같아서 좋았어요.

근데 저 새물결의 [구별짓기]는 절판이던데, 그레이스 님께서는 가지고 계시네요^^ [단순한 열정]에서 음악취향에 대한 묘사였던가? 저도 브루디에를 떠올렸어요.

그레이스 2023-05-31 08:22   좋아요 3 | URL
ㅎㅎ
과찬 감사합니다^^
구별짓기 좋은 책인데, 번역을 좀더 친절하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더라구요.
다시 재출간 하기엔 프랑스 사회에 대한 진단이 시간이 많이 흘러서 out of date 한 면이 있죠.
읽을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부르디외의 책 몇권을 갖고 있었네요.

페크pek0501 2023-05-31 16: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전 독서광이십니다. 저는 아니 에르노 작품 중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던데,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0   좋아요 3 | URL
^^
언제부턴가 한 작가 시작하면 연결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2023-05-31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7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께요~~^^♡

레삭매냐 2023-06-01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K문고에서 선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을 다 읽고 나서 거의 충격...

노벨상 받은 다음에 산 책은
아직 펴 보지도 못했네요.

페렉의 책들도 수집해 두었지만
여전히 -

그레이스 2023-06-01 12:42   좋아요 0 | URL
<단순한 열정>은 첫 페이지 빼고는 그래도 괜찮은듯요^^
<사진의 용도>는 더 충격이죠^^
저는 페렉 두권 더 받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06-22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분석대로 진정한 장소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3-06-22 23:40   좋아요 0 | URL
응원합니다~♡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적은 너무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다. 도처에 있고,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생체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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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30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시무시한데요, ㅠㅠ

그레이스 2023-05-30 09:54   좋아요 1 | URL
ㅎㅎ
작가가 우리 안에 있다라고 한 적은 자본주의!
상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잘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