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을 읽고 지금은 없어진 ‘소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수용소에서 가게 된다. 책은 그의 수용소 시절과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군에 비친 소련군의 ‘자유스러움‘이었다. 오구마 겐지는 서슴없이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라고 기억한다. 그의 말이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력집단인 군대의 폭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추정치가 된다. 소련군은 포로가 보기에도 매우 자유스럽고 평등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다.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2700만 명의 희생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시기의 소련에서 게다가 가장 폭력에 친숙한 군대라는 조직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개인은 조직에서 사회화된다. 필자가 알고 있던 소련은 스탈린주의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지옥이었다. 오구마 겐지가 경험한 소련은 달랐다.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의 <진실이 밝혀지다>(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노사과연 펴냄)를 펼쳤다.

저자 마리오 소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포르투갈에서 1949년에 태어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반식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시작한다.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마리오 소사는 탈영한 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한다. 스웨덴에서는 버스 노동자로 일하며 급진적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다 보면 꼭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뭔데? 소련 망한 것 봤잖아.˝ 소련은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우리가 아는 스탈린주의 지옥은 실제 소련이 아니라 CIA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버스 노동자(정확하게는 ‘정치 활동가‘)의 말이라 무시할까봐 말해두자면, 소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은 소사 말고도 뉴욕주립대 역사학 교수이자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저자 로저 키란(Roser Keeran), 몽클레어주립대 교수이자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쏘련(책에서 고유명사는 원음에 가까운 발음으로 사용된다. 필자 주)의 노동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략) 그렇지만 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숫자들의 출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소련에서 수백만, 수천만이 살해된 것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이런 이야기들이 특정한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반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소련이 악마화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뒤 의회 화재 사건을 조작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를 확보한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진보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독일은 또한 재무장에 돌입한다. 이때 독일 지도부는 대(大) 독일(greater Germany) 국민생활권이라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현재의 독일보다 훨씬 큰 독일을 건설하려는 욕심이었다. 대독일의 핵심 지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통합해 독일의 곡물 기지로 변모시킬 야심에 들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었기에 성과도 미미했다. 그들은 이내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다. 외부 그것도 최강국 미국에서 협조자를 찾게 된다.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

마리오 소사가 말하는 기근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치와 허스트의 언론은 볼셰비키의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소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이었다고 전한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을 빈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내기 전에도 기근은 주기적으로 왔었다. 소사의 설명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 2000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유약해졌고 전염병과 유행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아졌다.˝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업집단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고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어간 유럽인만 2000만 명에 이른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 전염병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련은 지속적으로 서구의 심리전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사와 그로버 퍼는 볼셰비키가 그런 희생을 의도적으로 전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오쩌둥의 정책 때문에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선동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아무도 인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도 자본주의에는 희생자가 사라지고 중국 사회주의에만 희생자로 넘친다. 허스트 계열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의 약발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를 다시 퍼뜨린 것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였다. 소련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레이건 시기 콘퀘스트는 <서글픈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다. 콘퀘스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국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폭로한 그는 영국 정보국의 정보조작부서인 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진보진영과 관련한 조작된 흑색선전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1977년 극우파와의 협력이 문제돼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언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정보를 전달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은 1942년 유대인학살에 앞장섰던 우크라이나 극우 전쟁범죄자들이었다.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미국 정보부와 협력했던 언론인, 학자들 덕분에 이런 프로파간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꾸 접하다 보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드디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庫)를 개방했다. 소련을 비난해왔던 사람들은 비밀문서고가 열릴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문서고가 개방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서구의 선전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아마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래요. 정보 조작한 사람들이 엄청 과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5만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잖아요?˝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의 판단은 덧붙이지 않고, 일단 마리오 소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는 쏘련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000만~1억7000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 필자 주)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50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감이 안 잡힐 수 있기에 한국의 예를 들자면 교정시설 수용인원 총수는 2017년 현재 5만 7000명, 보호관찰 대상자 수는 2017년 현재 10만 5000명이다. 인구 대비 대략 0.3%가 된다.

소사의 글에는 당시 소련 인민들이 가졌을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좌파 이론가인 채만수의 논문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노동사회과학> 제7호, 2014)의 일부 글을 인용해본다. ˝당시 나찌 독일의 대대적인 전쟁 도발, 따라서 쏘련 침략은 누가 보기에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독일과 쏘련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 즉 피차가 모두 그 흥망 자체를 걸어야하는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면서도 그 전쟁을 늦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통해서 체코를 진상하면서까지 쏘련을 침략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독점자본들 역시 사회주의 쏘련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기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된 당시의 정세였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 교정시설 내부의 인권은 어떨까? 2005년 8월 19일 자 <시사저널>에 실린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 수형자의 인권을 개선시키자는 여론은 미국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열악한 인권을 소재로 삼아서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 8월~2017 5월까지 FOX에서 방영)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7년 3월 시작해 현재 시즌 6 방영 중. 넷플릭스 제작)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미국 교도소의 수형자는 범죄자이지만 소련의 노동수용소인 굴라그(Gulag)에 있던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공개된 문서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 죄수다. 게다가 당시 소련 인민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연구자인 서울 과학기술대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논문 ‘굴라그 귀환자들과 흐루쇼프 하의 소련 사회‘(<러시아연구> 25권 1호, 2015)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한 3주 후 굴라그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한다. 그 수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면 방면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넘칠 것 같았지만, 넘쳤던 것은 인민들로부터의 냉대였다. 당시 소련 인민들은 귀환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소련당국에 보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적 변화도 극적이다.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크게 낮아졌다.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항상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사실과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망률이 매우 낮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량의 경우는 어떨까? 1939년을 보면 5년 미만의 형 95.9%, 5~10년의 형 4%, 10년 이상의 형이 1%로 나타난다.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괴담은 소련에 대한 심리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조작된 정보였음을 말해준다.

고전에 대한 서평을 주로 올리다가 뜬금없이 소련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이유는 필자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필자의 목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급진 사상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신념체계, 허구적 사실에 기초한 문화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실이 아닌 믿음의 덩어리다. 마르크스, 알튀세 이래 이데올로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지젝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논문 ‘지젝의 사회정의론에서 바라본 바울 이해‘(<신약논단> 제2권 제2호, 2017)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산물, 곧 언어를 통해 매개된 하나의 상징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그것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환상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같이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체계로부터의 동력차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들면 사회 개혁세력을 악마의 동조자로 몰아갈 수가 있다.

격심한 빈부격차를 반복하던 북·서유럽은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미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구축되는 질서인 담론과 상징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워버렸다.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수단이 정보기관을 통한 소련에 대한 프로파간다였다. 부족한 사회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개혁을 회피한다. 사회주의 소련과 바로 인접했기에 악마화(demonization)가 잘 먹히지 않았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온건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대신 미국은 극단적 불평등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득권은 외부의 적을 설정한다. 외부의 악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고 회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개혁 세력은 늘 외부의 악마와 비교당해야 한다. 외부의 악마를 설정하면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개혁이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것이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fbclid=IwAR08N-7VgxFDgK5kbVDjnlzt6cKBCXd1qz1TgYk0d-vEDu7h30mfP8XbIZY#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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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체제 그리고 조봉암 사법살인

(민주당,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됐다. 현재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까지 권력욕을 꺾지 않았던 이승만은 1954년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전대미문의 수학공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등 독재정치를 일삼았다나이가 80이 다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을 그칠 줄을 몰랐다. 1951년 이승만이 주도하여 창당된 자유당은 사실상 이승만을 위한 당이었다특히나 한국전쟁 기간부터 갈등을 하게 된 정치세력들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는데그것이 바로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되었다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이철승박순천유진산 등이 민주당에서 활동했다또한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했던 자유당 인사들도 떨어져 나오면서 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다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대다수가 해방 이후 우익으로써 이승만 편에 서서 소위 좌익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거기다 조병옥은 이승만 악행사 민간인 학살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8년 제주 4.3 항쟁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이들의 반공의식은 이승만 못지않게 강경했지만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승만이 개인적인 권력욕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갈라지자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족벌정치와 독재정치를 실행하기 시작했다그는 충직한 비서출신 이기붕에게 자유당을 맡겼고초대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는 개헌안을 관철시킴으로써 영구집권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다당연히 여기서 이승만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듯이 비판세력에게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의 개념을 내세워 빨갱이(Commie)’ 딱지를 붙였다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반공정서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그는 1954년 7월 28일 그는 미국 상하의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소련과의 전쟁까지도 지체없이 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 반공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1950년대 판자촌, 이승만 정부 시절은 참으로 가난한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와 친일파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무능은 최악의 경제체제로 이끌었다. 이때분에 민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대찌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는 사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먹다 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을 한국사람들이 한국화해서 먹으면서 생긴 음식으로, 가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이승만이 이끄는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경제가 참으로 피폐했다휴전 협정 이후 대한민국의 GNP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53년 당시 GNP 성장률이 25.7%였지만 1954년에는 5.2%, 1955년은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까지 떨어졌다인플레이션도 매우 심각했다휴전 이후 4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은 26.4%, 51%, 42.9%, 37.8%였다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던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라고 했지만자유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하던 이승만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렇게 원하는 이승만식 자본주의는 사실 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현재 한국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철폐에 가까운 어리석은 논리다따라서 현재 전세계적 펜데믹 COVID-19의 무상진료도 이승만의 논리대로라면 자비로 치료받아야 한다즉 뉴라이트들은 이 정도의 상식도 없는 맹신적 자본주의자들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민중의 생활은 참으로 가난했다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먹다 벌인 음식 즉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우는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고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이들이 미군이 먹다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였다한국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일 때 자유당을 비롯한 친일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다대표적으로 이승만에게 자신의 아들을 이강석을 양아들로 넘겼던 이기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기붕 소유와 그의 아내 박마리아 소유의 건물과 땅주식재산 등은 상상을 초월했다이기붕 일가에 비하면 이승만은 양호한 편이었다다른 관료들 또한 이들 못지않는 부정부패와 재산축적을 일삼았다.

(이승만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무려 24m나 된다. 이승만은 전 사회적 영역에서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실행했다.)

 

이승만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숭배가 있었다이승만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됐다. 59년 10월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서울 뚝섬에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송덕관우남회관우남정등의 건물이 건축됐고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심지어 서울시를 우남시로 변경하려는 시도도 있었을 정도였다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찬양가를 지어 배포했는데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오늘은 리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피고 새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대통령 만수무강을.

온겨레가 다같이 비옵나이다.

우리들을 리대통령 뜻을 받드러.

자유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몸과 맘을 다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반공청년단 관련 기사, 반공청년단은 이승만을 맹신적으로 따르는 단체였다. 그들은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이승만 정귄 시기 각종 어용 조직 단체가 활기쳤다이승만은 반공청년단’, ‘상이군경회’, ‘서북청년단’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을 압력단체로 이용하였고이들 압력단체들은 여당 기간단체 내지는 산하 단체로서 애초부터 정부권력 및 정당의 뒷받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이승만은 1957년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미국에서 사망하고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물론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이후 1957년 신학기를 맞아 서울법과대학에 부정 입학시킨 것이 탄로가 났었다.

(이승만 일가,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유당 독재 국가로 이끌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가 실행됐다집권당인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이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하고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내세웠다또한 혁신계의 진보당은 전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1956년 선거 당시 민주당은 불행을 겪었다이승만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들이 내세웠던 후보 신익희가 열차에서 심장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투표일 10일을 앞둔 사망이었다투표 당시 이승만을 따르는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했지만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조봉암 216만 3,808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가 나왔다이승만 득표율 80%라는 예측은 완전히 빚나갔다그리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인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됐다사실상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패배한 셈이다.

(조병옥, 해방 이후 반공노선으로 가며 이승만과 함께 했던 조병옥은 한국전쟁을 이후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 결과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반이승만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대세력들에게 탄압과 공작을 일삼았다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 이승만과 자유당 측이 고용한 암살범이 명동 시공관에서 장면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하지만 이 사건은 살인미수에 그쳤다저격사건의 범인은 자유당 정책위원이자 이기붕의 측근 임홍순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 김상봉이었다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에 넘겨졌다권총을 발사했던 김상봉은 권총 발사 이후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범행을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치졸한 연극을 연출했다물론 이것은 사전이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이정재, 이정재는 자유당의 끄나풀로 소위 동대문파를 이끌었다. 그는 한때 김두한 밑에 있던 조직 폭력배였으나, 1950년대 동대문파를 이끄는 조직 폭력배 두목으로 성장했다. 결국 그는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처형된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이승만은 반공청년단과 같은 여러 청년 단체와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을 좋아했다대표적으로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들 수 있다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임화수유지관 등 동대문파 정채깡패들은 1957년 5월 25일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시국강연회를 방해하는 사건을 벌였으며당연히 이것은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의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폐간 관련 기사, 이승만 정부는 1958년 경향신문을 폐간조치했다.)

 

언론탄압도 심했다. 1958년 1월 27일 서울시경은 만화작각 김성환을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신문사에는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혐의로작가를 즉결 심판에 회부하여 과태료 450환에 처했다이른바 <고바우 만화필화사건이다당시 정부 정책에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언론사는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이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을 지속적으로 쓰자이승만은 그 신문사를 폐간시켰다결국 경향신문은 4.19 혁명 이후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이승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모든 분야에서 이승만이 강조됐다부정부패한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아부떨기 바빴고이승만과 자유당은 영구집권을 위한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해나갔다반공교육은 전사회적으로 실행됐다.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조봉암을 포함한 진보당 인사들을 검찰이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이승만 정부가 조봉암을 구속한 죄명은 이른바 간첩죄였다.

(죽산 조봉암,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일제시절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서 유학했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지만, 박헌영과의 노선갈등으로 탈당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됐고, 간첩죄로 구속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대중적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일제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가 해방 이후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남로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써 유상매수 유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인물이었다그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이승만과 갈등하게 됐고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극했다특히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거기다 조봉암은 이승만과는 달리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다경제적 분야에서의 개혁을 추구했던 조봉암은 통일론에서도 이승만과 달랐다그 또한 반북주의가 있었지만이승만과는 달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부터 계속 구호에만 그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하고는 달랐다.

 

이승만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했다이렇게 구속된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는 반공세력들은 판결 뒤 청년들을 동원하여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라며 난동을 부렸다결국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고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사형선고를 받은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조봉암 무죄 선고, 죽산 조봉암은 사형선고 52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판결받으면서 명예가 회복됐다.)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는 등 사건조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들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봉암 집에 있는 서재에서 마르크스 관련 책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았다또한 그가 주장하던 평화통일론을 빨갱이 사상이라며 폄하하기 바빴다조봉암 간첩 누명은 사형집행 52년 만인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무고함이 확인됐다당시 조봉암이 구속되자 아이러니 하게도 이승만 반대편에 있으며한때 자유당과 같이 진보당을 좌익으로 몰았던 조병옥이나 장택상 등이 그를 변호하기도 했었다즉 이것만 보더라도 조봉암은 애초부터 간첩이 아니었고이승만 정권의 억울한 희생자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장면 암살을 시도하고반공청년단이나 이정재의 동대문파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했으며자유당과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도 마다하지 않았다북진통일론을 끝까지 주장했으며 북한과의 적대적인 노선 추구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며 세계적인 반공투사를 자임했다즉 이승만은 외교적으로도 반공을 주장했던 것이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국유화한 수에즈 운하를 폭격하자, “우방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망발을 했었다그의 집권 기간 동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민중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미국이 경제개발을 요구해도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사법살인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조봉암 사법살인에서 알 수 있듯이당시 한국 사회는 약간이라도 진보적인 주장을 하면 사법살인이 가능한 반공독재국가였다반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얼마든지 공권력을 동원해 처벌할 수 있었고이승만은 이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악용했다죽산 조봉암이 사법살인 당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막장을 향해 더욱 질주하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과 경제구조는 무너질 상황이었고간신히 미국의 원조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그러던 중 이승만 정부를 끝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그게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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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1공화국 시절에는 물자가 하도 모자라서, 화장실에서 대변을 닦은 휴지도 재활용을 해서 그걸로 책을 만들었는데 재활용 기술도 형편없어서 대변 처리도 제대로 안 되어 대변에 포함된 고춧가루 같은 물질이 그대로 묻은 재생지로 이루어진 책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의 1950년대 편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NamGiKim 2024-02-04 23:25   좋아요 0 | URL
워낙 가난한 나라니 가능성 있죠. 거기다 전쟁으로 인프라 다 파괴됐고.
 

(꽝응아이 성 위치, 꽝응아이 성은 베트남 중부에 자리잡고 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던 한국군은 주로 꽝남(Quang Nam)성과 꽝응아이(Quang Ngai)성 그리고 빈딘(Binh Dinh)성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었다전쟁 특성상 남베트남 내부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베트남 전쟁은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민중 사이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들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따라서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고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또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해서 많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그 이전인 1966년에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그것이 바로 꽝응아이 성에서 청룡부대(Blue Dragon Army)가 저지른 빈호아 학살(Binh Hoa Massacre)이다.

 

맹호부대백마부대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부대로 파병됐던 청룡부대는 1966년 9월 19일부터 1968년 1월 6일까지 꽝남 성 인근에 있는 추라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전개했었다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이 항상 자랑하며 높게 평가하는 짜빈동 전투(Battle of Tra Binh)도 꽝남 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빈선 현 빈호아 사에서 벌어진 학살은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총 3일간 전개됐다이 과정에서 빈호아 사 9개 촌에서 모두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그 중 268명이 여성이었고, 109명이 노인이었으며, 182명이 어린이었다그리고 여기에는 7명의 임산부도 포함됐다.

(한국군 증오비, 현재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얘기에 따르면 두 명이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며 한 명은 목이 잘렸고 다른 한명은 칼로 배가 갈라졌으며 두 가구가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이런 잔혹한 학살에 원한이 맺힌 마을 여인들은 아기를 재울 때 자장가를 불렀는데그 자장가는 빈호아 사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이었다이 자장가는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라로 시작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기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36명을 죽여 폭탄 구덩이에 시신이 가득 쌓였구나

아가야 쭈옹딘 폭탄 구덩이를 기억하거라

 

일반적으로 아기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로는 끔찍한 내용이다하지만 이것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이자 표현이기도 하다후대가 이렇게 기억을 하듯이 빈호아 사 인민위원회 관사 옆 언덕에는 인민위원회가 세운 증오비가 있다그리고 그 증오비 옆 언덕 위에는 영국인이 세워준 위령비가 있으며 희생된 430명의 이름이 적혀있다이 증오비는 1994년 미라이 박물관(My Lai Museum)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자료를 본 한 영국인이 모금 운동을 벌여 위령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아기에게 부르던 자장가)

 

학살은 1966년 12월 3일 빈호아 사 롱빈 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 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 작전을 하면서 일어났다이 중 응옥 흥 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 놓기도 했으며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은 강간당했다또 두 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한 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다그리고 1966년 12월 5일 찌호아 촌과 롱빈 촌에는 한국군들이 들어가 36명의 주민을 체포하고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해 죽였다이 구덩이 자리에 현재 증오비가 서 있다.

 

1966년 12월 6일 오전 10시 한국군들은 안 촌과 썸꺼우 촌에서 주민들을 모와 오후 4시경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171명의 주민을 학살했다같은 날 까이자 촌 동쭝 마을에서는 13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이렇게 해서 총 3일간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에서 무려 43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전 빈호아 사 당 서기장이자 인민위원회 주석이었던 생존자 팜 반 꾹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빈호아사 입구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이곳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이 진행되어 총 422명이 희생된 곳이다이후 영국의 후원으로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이곳에 위령탑이 건립됐다. 1966년 2월 3일과 5뚜이호아 마을에서 15사당 뒤 폭탄구덩이에서 36명 등 5개 지역에서 총 430명이 죽었다또한 1966년 12월 6동쪼이 마을에서 66숲 근처에서 59우물을 파러갔던 청년들 131명과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모두 553명이 학살을 당했다그리고 록선 마을에선 44안푹 사에서 114동쭝 마을에서 134며으 뚜이호아 마을에서 34록뜨 마을에서 13안크엉 마을에서 5명이 학살당했다위의 희생자들 중에는 노인이 109여성 298어린이 28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한국군이 총을 쏘았을 때나도 다리에 총을 맞고 볏단 속에 숨어 있었으며한국군이 물러가자 유격대원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아 주었다한국군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일부 주민들만이 집에 있었으며많은 사람들이 논에 일을 하러 갔었다한국군들은 주민들을 여러 그룹으로 모아 놓고 총을 닦았으며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그리고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전하기를한국군들이 총을 쏘자 어떤 사람들은 위로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그들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고 목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오후 6일을 나갔던 사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은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했다어떤 집의 경우엔 20여 명의 가족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진창구덩이 속에는 몇몇 아이들이 사람들의 밑에 깔려 여전히 살아 있기도 했다어머니의 젖을 찾아 기어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사람들의 밑에 가려 숨죽여 있던 7명의 이이들은 살아났다베트남과 미국-한국 간의 교전이 이루어지면공중에는 미군 전투기가지상에서는 한국군들이 공격을 해왔고 외곽에서 미군들이 폭격을 가하면한국군들은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폭탄과 수류탄을 터뜨렸다이 지역에서 모두 549명이 학살을 당했으며그중에는 어른과 아이 모두 한데 엉겨 쓰러져 있었다한국군이 들어와 마을을 소탕했을 때그들은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안심시킨 뒤에 총을 쏘았다희생자들 대부분은 노인과 어린이었으며청년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단지 한국군이 공격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만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대체적으로 많은 양민 학살이 이루어졌고어떤 지역에서는 5~7또 어떤 지역에서는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됐다우리 가족의 경우에도 어머니누이조카 등을 포함 모두 11명이 참사를 당했다. 1994년 영국인 여성 한 명이 이 지역을 조사하러 왔을 때 나는 모든 자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영국인 여성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1996년 다시 베트남에 돌아와 이 학살 사건의 희생자 430명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겠다고 정부에 보고했다영국은 이를 위해 4억 동을 지원했고꽝응아이 성에서 2억 동을 지원해 모두 6억 동의 재원이 마련됐다그리해 1998년 그 부인은 위령비 건립을 위해 다시 베트남을 방문했다그는 또한 영국에 돌아가 빈호아 사에 병원이나 학교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지금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방문해 준 데 대해 우리 빈호아 주민들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국민들과 세계 각국의 친구들이 이 학살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1967년 10한국군들이 철수했을 당시 이 지역의 총 희생자는 553명이었으며, 842채의 가옥이 불태워지고, 428마리의 물소, 423마리의 돼지가 불태워지거나 살해되는 등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출처 : 미안해요 베트남 p.175~176

(빈호아 학살 50주년 당시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

 

2016년 뉴스타파에서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다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공론화에 앞장섰던 구수정 박사와 평화재단 일행들의 평화기행을 담고 있었는데구수정 박사의 말에 따르면 “4년 전(2016년 기준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평화기행을 인사하기는커녕 눈도 안 마주치고 한국 사람들이 있으면 피해 다녔다.”고 한다그만큼 마을사람들이 한국군의 학살을 잊지 않았다는 얘기다그리고 현재까지 빈호아는 마을 안쪽으로는 아직까지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푸른역사, 2011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책임없는 전쟁뉴스타파, 201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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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8-22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 국제시장 보면 한국인(황정민)은 베트남 아이를 구한 영웅으로 등장하는데 진심으로 토가 쏠렸씁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진짜 뻔뻔하구나.. 그런 생각. 베트남전 때 한국군 정말 잔인했죠.. 백 배 천배 사죄해야 합니다..

NamGiKim 2020-08-22 08:28   좋아요 1 | URL
그리고 베트콩을 실제 한국군 처럼 묘사하죠. 역사왜곡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그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도 무수히 많이 비판받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나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를 불러왔고, 그런 살육의 현장 속에서 그는 어떠한 인종주의적 내지는 극우 민족주의적 선입견과 편견에 빠져 유대인 대학살(Holocaust)를 계획했고 실행했다. 그 결과 대략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집시와 반 나치 인사 그리고 전쟁포로와 타 인종들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그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반인륜성과 비도덕성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루스벨트나 처칠 그리고 스탈린과는 달리 당시 시대상과는 다르게 재평가 내지는 중립적으로 보려는 여지가 없다시피 한다.

 

따라서 히틀러는 그가 자살한지 7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도 인류최악의 범죄자로서 기록되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대변하듯이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선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더불어 악역을 도맡는 5대 트로이카이다. 반일 불매운동이 번지던 작년에 많은 사람들을 읽게 했던 <일본 제국 패망사 :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존 톨랜드(John Tolland)1970년대 독일의 독재자이자 반인륜적 범죄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게 작년에 와서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 : Adolf Hitler Definitive Biography>.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서 근무했던 톨랜드는 이 책을 쓰면서, 소위 우리 기억 속에 악인의 이미지로서 각인된 아돌프 히틀러의 삶을 우리가 정치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보는 100년 전 인물(1970년대 기준인 것 같다.)인 것처럼 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거나 강하기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인터뷰 했고, 국립문서보관소를 포괄한 수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비록 1970년대에 집필한 책이라 톨랜드의 책보다 비교적 최근에 출한된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이나 이언 커쇼의 <히틀러 1,2>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최신 자료나 연구를 담지 못하고 있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한계점을 보완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문체로 히틀러의 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존 톨랜드 특유의 문체는 책의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힌다. 논픽션이 저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던 1889년부터, 히틀러가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알려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까지의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필자의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역사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시절 아돌프 히틀러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부터였다. 다른 독빠(독일빠) 밀리터리 덕후들이 그랬듯이 필자 또한 전쟁광 히틀러에게 일시적으로 매료되었으며(물론 이런점은 성장하면서 극복해냈다.), 긍정 부정의 의미를 떠나 이는 필자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였다. 하지만 필자는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딱히 읽어본 책이나 논문이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를 내려놓고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을 펼치게 되었다.

 

히틀러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삶에서의 여러 우여곡절과 어머니의 죽음,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그리고 독일의 패배 등의 환경은 화가가 아닌 그가 나치당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는 연설을 매우 잘했고, 나치당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 히틀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생각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예를들면 오스트리아의 관리였던 히틀러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많은 자식을 낳았고, 여러 명의 여자와 결혼한 사실이나, 히틀러의 일가친척 중 한명이 영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다는 그런 내용들 말이다. 이런 사실들은 히틀러 일대기에 대한 필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히틀러에게 친한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숙자 시절 히틀러에게 노숙자 쉼터에서 방을 쓰게 해준 것도 유대인이었고, 매너하임에서 지낼 당시 그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2명은 유대인이었다. 또한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그의 상관 또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유대인 친구를 두었다는 사실은 책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매너하임에서 히틀러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2명은 유대인이었다. 1명은 애꾸눈 열쇠공 로빈손으로 그를 자주 도와주었고, 다른 1명은 요제프 노이만이라 불린 헝가리인 파트타임 미술품 거래인이었다. 노이만은 히틀러가 다 해진 옷을 입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프록코트를 벗어주었다. 히틀러는 노이만을 매우 존경했는데 한번은 그에 대해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그림을 사준 다른 3명의 미술품 거래인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말을 했다 히틀러의 대리인이었더 하니슈는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히틀러의 호감을 산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93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당시 반유대주의는 유럽 포퓰리즘이라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입대해 참전했던 히틀러는 항상 애국심과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또한 동료들을 아끼고 전장터에서 발견하여 키운 폭슬이라는 강아지에게 매우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소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피하려는 사람들을 매우 혐오했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전쟁을 방해하는 세력에는 유대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반유대주의적 감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아 잠시 눈이 멀었던 이후 전쟁의 종결과 사회주의자들의 시위가 독일에 일어나면서 더 극심해졌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군인으로 복무했을 당시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감을 동료들에게 마음껏 드러냈으며, 전쟁을 회피하는 사회주의자들 중심에는 항상 유대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혁명을 겪으면서 더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나, 벨라 쿤, 트로츠키 등은 실제로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히틀러는 이들을 증오하고 혐오했다. 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히틀러는 만연한 혁명 때문에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조국에 대해 이처럼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최근 인종주의에 관한 팸클릿(아마도 에카르트가 발행한 것일)을 접하게 되었는데 비엔나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인생에서 다시 진화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마음속에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들끓고 있었는데 뮌헨 거리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가속화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스너, 톨러 같은 무정부주의자, 마지막으로 러시아 출신의 빨갱이 레비네 등 유대인들이 어디서나 권력을 잡고 있었다. 베를린의 로자 룩셈부르크, 부다페스트의 벨라 쿤, 모스크바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모두가 다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이전에 의심을 품어온 음모 이론이 현실로 다가왔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154

 

192311월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성공한 사례를 본받아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쿠데타는 진압당했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재판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히틀러는 자신의 비서인 루돌프 헤스와 함께 책 한권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나의투쟁 : Mein Kampf>였다. 나의투쟁은 히틀러 개인이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를 이론화시킨 것이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고 하여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실현해야 한다고 햇는데, 이것은 제국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정복주의적 비젼이었다.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 민족이 더많은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타국을 정복해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1939년 히틀러가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해서 이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실현화 시킨 예시다.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경제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1920년대 독일 경제는 휘청거렸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독일 경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에 직면했었다. 전쟁 전 단 1마르크사 6014,300마르크로 평가절하되고, 달걀 1개의 값이 3천만 마르크가 됐고, 200조 마르크 지폐는 800달러 정도면 환전이 가능했다. 이렇게 독일 경제는 인플레이션을 직격타 맞았었다. 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실업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는데, 그런 노력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률이 급증하자 독일의 나치당은 민중의 투표를 통해 지지받을 수 있었다. 그런 지지가 결국 1933년 히틀러를 독일 수상 자리에 올려놓았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한 일은 바로 실업률 해소와 경제발전이었다. 사실 우리가 부르는 나치의 뜻을 번역하면 민족 사회주의가 된다. 일각에선 국가 사회주의라 번역하지만, 독일 파시즘이 추구하는 것이 민족 공동체라는 점에서 민족이라 번역하는 게 보다 정확하다. 소위 히틀러의 국가는 단기간에 실업률을 해소하고 노동자 복지 정책과 아우토반 건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경제난을 해소했다. 히틀러 집권기에 이런 변화가 있자, 나치당 집권 초기 민중의 지지율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유다. 하지만 히틀러의 계획에는 오직 독일민족만 포함되었지, 타인종에 대한 배려정책은 없었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더더욱 그랬다. 당시 독일에 있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은행에 있던 재산이 동결되기 까지 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탄압당했다. 하지만 유대인 인구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대다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계속 지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자신의 당 정적이었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제거할 수 있었고, 독일을 재무장 할 수 있었으며,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까지 개최하여 전 세계에 나치독일을 홍보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빼앗겼던 라인란트 지방을 무력으로 되찾았고, 스페인 내전에 이탈리아와 더불어 군대를 파병했으며,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관계, SA 대장 룀의 동성애와 숙청 그리고 에바 브라운을 포함한 히틀러를 사랑했던 여인의 스토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존 톨랜드 특유의 필체 덕분에 책이 술술 읽혔지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를 얘기할 때, 빨갱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책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시대적 배경에 맞는 번역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런게 맞지 않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 내지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라는 단어로 표기한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히틀러의 초기 생애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까지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내용은 조만간 2부를 읽고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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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치를 향한 발걸음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을 보면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남북한의 병사들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전을 한다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이러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지속됐다. ‘반공포로 석방’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쳤다한국전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이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동생이다. 그는 이회영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6형제 중 한명인 이시영은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새 국가건설에 노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물론 이승만의 견제는 점점 심해졌고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결국 부통령 이시영은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이승만은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여겼다그는 매사에 유아독존적이었다정부의 각종 행사장에서는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국정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소외시키기 일쑤였다국회는 5월 17일 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김성수도 부통령직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1952년 5월 29일 폭탄적인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사용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지만이승만은 노회함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거기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이렇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신이 주도하는 당을 발족했다그 당이 바로 자유당이다당시 자유당은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는데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원외파는 이범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구도였다이승만은 이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생각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28일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났다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한청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소위 이들은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 요구 등을 내건 이승만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하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관제데모는 결과적으로 반 이승만 정서를 고조시키는 역풍을 불러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헌병들은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연행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기 위해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그는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대치중이던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을 선포했다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했고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다음날인 5월 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 가서 연행했다이게 바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었다이런 상황까지 가자 이시영김창숙김성수장면 등 반이승만 야당원로들이 부산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불리는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6.25기념식상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와 김시현 등이 주도한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친일경찰 채용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으로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직선제로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서 충직한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족청을 등에 업은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결국 이범석을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자파라도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그 뿌리부터 자르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노회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투표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하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은 국내 정치적으로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미만이었던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급격히 자라났고경찰력도 증강되어 반공안보체제를 강화했다그리고 반공이라는 체제의 가치는 국시로서의 지위로 더 강화되었고소위 사회주의 노선이나 민주사회주의 노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를 보이면이단취급 받는 광적인 사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한국에서 실시되었다3대 총선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우선적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범석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이승만은 먼저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각종 청년단체를 불법화하였고자유당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범석의 족청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그러고 난 뒤 이승만은 헌법 속에 들어있는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다수의석을 차지하고자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을 통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공고화 되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점차 반이승만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해방 후 이승만과 한편에 섰던 조병옥이나 이범석 그리고 신익희 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고이승만을 위해 백색테러를 일삼다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들어가게 된 조직폭력배 김두한 또한 반이승만세력이 되었다아무튼 제3대 총선은 이승만이 이와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자유당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유권자를 매수하는 한편 깡패들을 동원하여 야당의 유세장을 기습하고 야당 후보 및 무소속 후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특히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등록 서류를 탈취하여 후보등록을 못하게 하고장면의 측근 오위영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 자유당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을 대변했던 정당이다.)

 

온갖 부정타락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으로민국당 15대한국민당 3국민회 3제헌동지회 1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1954년 9월 7이승만의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을 포함한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이렇게 하여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개헌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 의원을 2부제로 개선.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 부여.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원칙.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 폐지.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과 2년전 부상정치파동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이승만은 자유당의 개헌안을 공고기간에 거쳐 11월 1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또한 이승만은 국회상정에 앞서 우파 반공주의의 본산인 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부 60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부결이 선포되었다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전대미문의 수학계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2/3는 135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의 수학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하여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에 착안하고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 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발표를 했다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이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의 논리)

 

이승만은 이런 전대미문의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토대를 마련했다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불법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헌정사상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이승만의 악행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권을 강화하면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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